여우비 下
한 여름에 오는 장마소식은 반갑지 않은 손님 같았다. 더운 날씨와 더불어 습하고 끈적거리는 공기는 나를 더욱 숨 막히게 만들었다.
그에게 들킨 날은 우숩게도 끝날 것 같지 않았던 긴 긴 장마의 마지막 날이었다.
그의 시선은 항상 나를 향한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하지만 그는 이방인 즉, 곧 떠날 사람이라는 뜻이었다.
그저 내가 모른 척 알아도 모르는 척만 한다면 우리의 끈은 자연스럽게 풀어질 운명이었다.
“お前日本語分かるんじゃないの? そうじゃない?” [ 너 일본어 알아듣잖아? 아니야?]
네가 그 말을 하기 전까지 말이다.
언제나 그랬듯 나는 그들의 대화를 듣고 싶지 않아 화장실로 발걸음을 돌렸다. 거울속의 내 모습을 집중해서 보다 교복 주머니를 뒤져 어제 새로 산 립밤을 꺼내들었다. 복숭아 냄새가 나는 붉은 색의 립 밤은 나를 더욱 생기 있게 만들어주었다.
다시 자리로 돌아오니 스나와 그는 자리에 없었다. 나는 창가에 부딪혀오는 빗소리를 노래삼아 들으며 교과서를 꺼냈다.
수업종이 치기 전 스나는 다시 자리로 돌아왔다. 한 손에 단지모양의 바나나우유를 들고 온 것을 보아 아마 매점에 갔다 온 것 같았다.
“...桃の香り” [ ...복숭아 냄새 ] 자리에 앉은 그는 내 림밤의 냄새를 맡은 듯 낮게 중얼거렸다.
그의 목소리에 나는 무의식적으로 입술을 오므렸다 폈다를 반복했다. 바를 때도 냄새가 강하다고 생각했는데 그에게까지 냄새가 흘러가나보다 라고 생각을 했다. 다음엔 바르지 말아야지 라는 생각과 함께 말이다.
그때 스윽- 하고 바나나우유가 책상위로 올려졌다. 내 시야에 갑자기 들어온 그의 길고 야무진 손에 고개를 들어 그를 쳐다보았다.
그는 마시는 행동을 취하며 시선은 살짝 아래를 향하고 있었다. 그의 시선이 어디에 향하는지 알 수 있었던 나는 살짝 얼굴이 붉어졌다.
그래도 그에게 감사인사를 해야 할 것 같았다. 급하게 핸드폰을 들어 그에게 번역된 말을 건넸다.
「ありがとう。 いただきます。」 고마워. 잘 마실게
그는 그저 고개를 끄덕였다.
비가 너무 휘몰아치는 바람에 체육시간이 자습으로 바뀌었다. 체육관도 있었지만 어제부터 갑자기 시작된 공사에 지금은 들어갈 수가 없었다.
아이들은 비도 오는데 무서운 영화를 보자며 반장에게 말을 건넸다. 아이들의 성화에 떠밀려 허락을 맡아온 반장은 소리 지르면 안 된다며 주의를 준 뒤, 도서관에서 빌려온 영화를 틀기 시작했다. 일본인인 스나를 고려해 일본 영화를 빌려온 반장이었다.
영화 속에서 들리는 괴기스러운 소리와 밖에서 치는 천둥소리는 멀쩡하던 등골을 오싹하게 만들었다. 평소 좋아하지도 싫어하지도 않는 공포영화지만 그날은 유독 보기가 너무 무서웠다.
결국 영화보기를 포기한 나는 고개를 돌려 스나를 보았다. 그는 영화에 관심이 하나도 없는 듯 핸드폰만 하고 있었다.
「あなたは映画見ないの?」 너는 영화 안 봐? 그에게 핸드폰을 건네니
「이미 보았어. 너는?」 핸드폰으로 답이 왔다 그래서
「怖くて見ていられない」 무서워서 못 보겠어 라고 다시 보여주었다 그러자 그는 손을 빠르게 움직이더니
「소리는? 이 영화 대사도 잔인해」 라는 글이 눈에 보였다. 그리고 얼마 있다 들려오는 그의 목소리에 심장이 덜컥 내려앉았다.
“お前日本語分かるんじゃないの? そうじゃない?” [ 너 일본어 알아듣잖아? 아니야? ]
그는 입 꼬리만 웃은 채 나를 쳐다보았다.
‘어떻게, 언제부터, 왜’라는 생각만 머리에 맴돌았다. 나의 모든 것들을 꿰뚫어보는 듯한 그의 시선에 소름이 돋고 손에는 식은땀이 났다.
“お前...いつから分かったの?” [너... 언제부터 알았어?]
“知っているのは数週間前. 確信したばかりだ.” [알고 있는건 몇 주 전. 확신한지는 얼마 안 됐어]
“でもなんで言わなかったんだよ” [근데 왜 말 안했는데]
“君が明らかにしたかったらもう言っただろう” [네가 밝히고 싶었으면 이미 말했겠지]
‘설마 나를 배려한건가’
“滑稽だった” [...우스웠겠네]
“別に” [별로]
“でも、もうその唇は使わないみたい?” [그런데 이젠 그 입술은 안 쓰나 봐?]
아...
그가 말하는 입술의 정체를 파악할 즈음 그와 스치듯 눈이 마주쳤다. 여전히 입 꼬리를 올린 채 시선은 내 입술을 향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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