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뭐야, 넌. "
잠이 오지 않는 새벽이다. 주현은 창살 사이로 갈라지는 달빛을 바라보았다. 어쩌면, 그 달빛에 드러낸 수영을 보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길고 거무죽죽한 색의 망토를 뒤집어쓴 수영은 가만히 있질 못 한다. 주현을 보고 다가가려다 주현이 싸늘하게 대하자 금방 발걸음을 멈추고 꼼지락 거린다. 가, 소리 질러서 교수님들 깨우기 전에. 몇 번을 말해도 들어먹질 않는다. 결국 포기하고 다시 두꺼운 책을 펼쳤다. 망토의 끝자락이 바람에 펄럭거리는 소리와 함께.
" 나 기다리고 있었어요? "
망토를 대강 벗은 수영이, 허락하지도 않았는데 주현의 책상에 걸터 앉는다. 이상하게 비키라는 말이 나오지 않는다. 주현의 입술보다 눈동자가 먼저 움직였다. 투명한 달빛을 잔뜩 머금은 하얀 얼굴을 훑으며, 그 빛에 드리운 긴 속눈썹의 음영을 보다가, 시선을 돌렸다.
" 잠이 안 와서. "
보고 있던 어둠의 마법 책을 덮었다. 이 교실 안에서 할 수 있는 것은 얼마든지 많다. 기초적인 주문을 습득하는 것부터 시작해서 사람을 죽이고 살릴 수 있는 어둠의 마법을 터득하는 것 까지. 호그와트는 교수들에게 낙제받은 학생들이 얼마든지 더 공부를 할 수 있도록 학문의 문을 넓게 열어 두었다. 이런 귀중한 시간에 하필. 주현은 이를 아득 갈았다. 주현은 인정하고 싶지 않지만 자신이 그리핀도르인 수영과 말을 섞고 있다는 게 수치스러웠다. 자신은 슬리데린이니깐, 자신은 순수혈통이니깐.
" 어둠의 마법? 호그와트 나가면 살인 청부업자나 될려고요? "
" 시비 걸지 마. "
" 신기해서 그래요. "
" ....... "
" 언니 같은 사람들, 그러니깐 슬리데린들은 한 번 어둠의 마법을 제대로 습득하면 다시 빠져나가기 힘들잖아.
주변에 평범한 사람들도 모두 잃어버리고 평범한 삶에 다시 적응하는 것도 힘이 드니까.
사실 어둠의 마법이라는 게...간단한 마법이 아니잖아요.
그 잔인하고 어려운 마법을 습득했는데도 조용히 사는 언니를 보면 언니는 남다른 것 같기도... "
수영이 조용히 중얼거리다, 갑작스럽게 책상에 드러 누웠다.
책 여러 권 쌓아 놓고 보기도 힘든 좁은 책상에 드러눕다니. 주현이 책등으로 수영의 머리를 툭 내리치며 비키라는 의사표시를 했지만, 그녀는 몸을 옮길 생각이 없는 것 같다.
" 잠도 안 오고 책도 안 읽히는 밤인데, 이야기나 해요. "
" 싫어. "
" 왜, 나랑 이야기 하기 싫어요? "
수영이 장난스러운 얼굴로 웃더니 머리에 팔을 괘고 비스듬히 눕는다. 평소의 주현이라면 짜증스럽게 밀치며 기숙사로 돌아갔을 텐데, 어쩐지 말도 나오지 않는다. 그러니까...주현은 곁에 누워있는 수영이 싫지 않다, 이 말이다. 신기하게도. 주현은 의자에 앉아 허리만 꼿꼿이 세울 뿐 어떤 움직임도 취하지 않았다.
" 내일 신입생 입학식이예요. "
" 알아. 호그와트 학생이라면 다 아는 사실 아닌가? "
" 어떤 독특한 인간이 또 들어올지 궁금하지 않아요? "
수영은 조용히 생각하는 듯 싶더니 말을 꺼냈다. 주현을 똑바로 바라보는 눈동자는 여전히 빛난다. 그리고 예쁘다.
" 있죠. 난 사람이 태어날 때 부터 어느 정도 주어진 운명이 있다고 생각해요. 언니랑 나만 봐도 그렇지 않아요?
마법사 부모를 둔 자식은 당연히 호그와트에 입학하게 되고. 그렇게 마법사라는 인생이 정해지고 있는 과정이잖아요.
결국 자신이 태어난 배경과 천성으로 인생이 결정 돼요.
그럼 그 배경과 천성으로 주어진 인생을 살게 되는 게 옳은 삶을 사는 인간들일까요?
난 그건 절대 아니라고 보거든요. "
" 하고 싶은 말이 뭔데. "
" 누군가는 호그와트에 들어올 수 밖에 없는 운명이겠죠.
그런데 그 운명을 풍경 삼아 살다가 언니를 건드리는 사람이 있으면, 난 용서 안 할 거예요.
언니와 연결되는 게 운명이라고 할지라도. "
진짜 이대로는 안 되겠다. 이러다간, 진짜 이 그리핀도르랑 무슨 이야기를 나눌지 나도 모르겠다. 주현은 자리에서 일어나 민첩한 손놀림으로 책을 챙겼다.
" 운명이라는 걸 너무 믿지 마요. "
수영은 책상에서 몸을 벌떡 일으키고 교실의 바닥에 놓인 망토를 주워 입었다.
원한다면 어둠의 마법에 대한 책들 도서관에서 몰래 빌려 줄게요. 나라면 할 수 있잖아요? 를 덧붙이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