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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냥 죽여 주시면 안 돼요?

 은호가 거친 목소리를 긁으며 남자에게 짧게 묻는다. 달그락 달그락. 미닫이문 너머의 작은 주방에서 주전자가 끓는 소리가 어렴풋이 들린다. 은호는 그 소란스러움이 진심으로 고통스러운 듯 매트리스에 귀를 비빈다. 은호의 눈가가 습기에 발갛게 짓무르고 부르터있었다. 5평짜리 작은 공간은 오로지 그의 통제 안에서 모든 게 결정되었다. 창문 하나 없이 어두컴컴한 곳에서, 남자가 불을 키면 그게 곧 태양이었고, 반대로 어둠을 허용하면 그게 또 밤이었다. 그리고 그 속에 속한 은호도 남자가 간단하게 조작할 수 있는 ‘무언가’일 뿐이었다. 

 너무 아파요. 그냥 죽여주세요. 

 아아. 은호가 앓는 소리를 내며 몸을 모로 간신히 눕힌다. 그리고 남자에게 다시 한 번 부탁한다. 남자는 협탁 위에 놓인 자그만 주사기와, 자잘한 물건들을 정리하고 있었다. 남자의 작은 움직임에 새하얀 티셔츠 너머로 견고한 등 근육들이 잘게 움직인다. 은호가 예민해진 청각에 들이닥치는 소음들을 결국엔 못 이기고 흐느끼자, 남자가 슬쩍 은호의 벌건 얼굴에 눈길을 준다. 어디가 제일 아파? 부드러운 말투가 심히 남의 일 대하듯 여상했다. 은호가 대답을 못 하고 한 타이밍 늦게 고개만 젓는다. 
협탁을 다 정리한 남자가 매트리스에 앉는다. 성인남성의 무게에 낡은 매트리스가 잠시 덜컹거린다. 은호가 작은 충격에도 죽기 직전의 하루살이처럼 바스락거린다. 그냥 다 아파? 남자가 푹 젖은 은호의 앞머리를 걷으며 은호의 아파하는 표정을 살핀다. 기진맥진한 은호가 옅게 고개를 끄덕이다 입을 뻐금거린다. 내일..내일.. 남자가 은호의 부르튼 입술에 귀를 가져다 댄다. 은호가 토해내듯 묻는다. 내일은..저 죽을 수 있어요? 대답을 기다리는 은호의 숨소리가 희미하다. 은호의 단말마의 날숨에 남자의 부드러운 옆머리가 살짝 나부낀다. 아니. 대답하는 남자의 목소리는 그 어느 때보다 단호했다. 은호가 자조하듯 웃는다. 그냥 제 처지가 우스워졌다. 은호의 웃음소리가 바람에 나부낄 듯이 가벼웠다.

 이곳에 틀어박히고 일주일 동안은 은호는 제 최선을 다해서 발악했다. 일어나서 억지로 밥을 먹고, 고문을 당하고, 다시 밥을 먹고, 남자가 짧게 씻는 시간을 주고, 다시 고문을 받고, 중간중간 용변을 보고, 다시 고문을 받고, 그 일련의 시간 동안 은호는 악을 지르고, 소리쳐 도움을 요청하고, 울부짖고, 고문을 받다가 간신히 남자에게 무릎을 꿇고 살려달라 빌고, 남자가 제 발에 이마를 묻고 흐느끼는 은호의 목덜미를 다시 그 큰 손으로 꽉 쥐면, 다시 화들짝 놀라 겁을 먹고, 또 고문을 받고.....그러다 보면 10시를 알리는 알람시계가 삐삐삐삐- 하고 울렸다. 그리고 그때쯤이면 남자가 매일매일 주사하는 약 기운도 어느 정도 가시고 있었다.

 남자는 하루 동안의 운동을 마무리하듯 짧게 기지개를 켰고, 곧이어 낡은 본체가 달달거리면 커졌다. 그리고 은호는 정신을 차려보면 어두컴컴한 공간에서 유일하게 밝게 빛나는 모니터 앞에 퀭하게 앉아있었다. 툭툭- 재촉하는 남자의 하얀 손가락이 은호의 손등을 짧게 두드리면, 은호는 전기라도 감염된 듯이 화들짝 놀라며 키보드를 두드렸다. 첫 문장은 늘 같았다. ‘안녕하세요. 이곳에 올라오는 글은 모두 허구입니다.’ 게시글이 딱 10개가 올라왔을 때 은호는 드디어 그 문장을 울지 않고 읊을 수 있었다. 블로그의 방문자 수는 여전히 0이었다. 지독한 외로움이었다. 처음으로 은호가 흐느끼지 않고 하루 일과를 빼곡히 적은 일기를 읽은 날, 남자는 은호의 새까만 뒤통수를 쓰다듬어 주었다. 칭찬을 해주는 것 같았다. 그리고 딱 한 마디를 덧붙였을 뿐이다. 

세 번째 줄 수정해야겠다.

 은호는 곧바로 ‘나는’을 ‘달리는’으로 고쳐 썼다. 



 그로부터 한 달 정도가 지났고, 남자는 은호의 애원을 간단하게 절단했고, 은호의 웃음소리는 깃털같이 가벼웠다. 왜 내일도 못 죽는 거야. 그럼 모레는? 그 이후는? 끝도 없이 이어지는 생각은 마지막엔 그 크기를 못 이기고 은호의 세찬 심장박동으로 제 존재를 드러냈다. 은호가 헛구역질이 나오는 듯 목울대를 꿀렁였다. 파도처럼 넘실대는 목이 새빨간 피멍으로 가득했다. 당분간은 목은 안 졸릴 터였다. 그 증거로 화장실엔 새롭게 큰 물대야가 놓여있었다. 달리야 토할 거 같으면 화장실 갈래? 은호가 미친 듯이 고개를 저었다. 난 달리가 아니라 이은호에요. 하지만 그 말은 구역질에 가로막혀 나오지 못했다. 달리야. 달리야. 달리야. 남자가 연신 은호에게 묻는다. 아니야 아니야...은호가 힘겹게 고개를 가로 젓는다. 아니야..나는 이은호야. 나는 달리가 아니라 이은혼데... 은호. 은호..달리..은호...달리...달리...달리... 누가 저 사람한테 알려줘요. 누구라도 좋으니까, 나 여기 있으니까! 제발!

 툭툭 누군가 은호의 어깨를 두드린다.

“달리야, 아침이야 일어나야지.”

 번쩍 눈을 뜨자, 코앞에 남자의 배우같이 멋스러운 얼굴이 가득 찬다. 눈동자가 옅은 갈색으로 맑게 빛나고 있었다. 이곳에 갇힌 지 정확히 40일째 되는 아침이었다.





“2012년 1-3월 방명록이요? 2012년? 한달 전도 아니고요? 어느 미술관이 그걸 7년 지나서까지 보관하고 있겠어요. 방명록은 절대 하나도 없고, 음.. 현장스케치 사진 같은 것도...누가 보관을 하고 있을까..?... 잠시만요, 해인씨! 잠깐 일로 와봐요!”

 네! 파티션 너머로 또랑한 목소리가 들린다. 곧이어 머리를 질끈 하나로 묶은 30대 초반의 여직원이 은호와 연참이 있는 중년 여직원 앞에 선다. 곧이어 은호의 사정을 말하는 중년 여직원의 차분한 설명에 해인이란 이름의 여직원 표정이 진지해진다. 중간 중간 은호를 슬쩍 훔쳐보는 표정에 안타까움이 베어 있다. ‘...그래서 혹시 해인씨 2012년 현장스케치 자료 가지고 있어? 2011년도 후반 것도 좋고.’ 잠시 진중하게 기억을 더듬던 해인씨가 아! 하고 단발마의 탄성을 지른다. 은호의 표정이 순간 밝아진다. 종종걸음으로 사무실 서랍 이곳저곳을 살피는 해인의 뒤를 은호가 급히 따른다. 낡은 철제 서랍의 맨 아래칸, 유치한 캐릭터 유에스비를 해인이 꺼낸다.

“대박이다. 사실 몇 달 전에 3년 이상 된 스케치 사진들은 다 정리를 했었는데, 이 USB는 당시에 포맷할 수 없는 중요한 서류가 껴있어서 유일하게 보류해 놨었거든요.”

 제 일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덩달아서 가슴을 쓸어내리는 해인이었다. 제 앞에 서서 초조한 기색만을 보이던 앳된 남자의 표정에 드디어 긍정적인 감정이 담긴다. 해인이 개구지게 웃으며 말을 덧붙인다. 

“2011년 하반기부터 2012년 상반기 까지에요. 근데 한 행사당 적어도 50장 이상인데...다 합치면 1000장 훌쩍 넘어요. 괜찮겠어요?”

 사진은 많을수록 좋았다. 연희가 담겨있을 가능성이 조금이라도 커지니까. 은호가 전혀 개의치 않는다는 듯 활짝 웃었다. 해인이 순간 멈칫하며 시선을 피했다. 옆머리에 가려진 해인의 귓볼이 빨갰다. ‘괜찮으시다면 저기 빈 컴퓨터에서 바, 바로 확인해 보셔두 돼요.’ 은호는 당연히 거절하지 않고 곧바로 빈 자리에 앉아 낡은 본체를 켰다. 달달거리면서 구식본체가 돌아가는 소리가 들렸다. 제자리로 돌아간 해인은 슬쩍 파티션 너머로 은호의 뒷모습을 훔쳐 보았다. 얼핏 봐서 몰랐는데 비율도 좋고 몸도 꽤 관리한 듯 좋아 보였다. 아차차. 23살이라고 했지. 해인은 저 혼자 깊은 반성을 하며 다시 쌓인 서류로 시선을 돌렸다. 2019년 2월은 1월보다 훨씬 행사가 많았다. 못 먹을 감을 보면서 입맛을 다실 주제가 안 되었다. 
   
 
 반달리즘미술관 개장시간에 맞춰 온 게 오전 10시였다. 하지만 어느덧 시계는 12시를 가리키고 있었다. 슬슬 직원들이 한두 명씩 점심밥을 먹으려 책상을 정리하고 있었다. 외부인인 은호가 홀로 사무실을 지킬 수는 없었으므로, 어느새 막바지에 다다르고 있는 스크롤을 내리는 은호의 손길이 다급해진다. 없다. 없어. 제발 한 장이라도 좋으니까... 은호가 어느새 아랫입술을 깨물고 얼마 안 남은 사진을 마저 클릭할 때였다. 초조하게 굴려지던 은호의 새까만 눈동자가 순식간에 무언갈 보고 멈춘다. 드르륵, 마우스 휠을 내리자 사진이 확대된다. 포커스도 나가고 크기도 작았다. 하지만 은호는 확신했다. 7년 만에 보는 연희의 모습은 어제 본 것처럼 선명했다. 가방도 신발도 옷도 익숙했다. 얼굴을 카메라로부터 돌려서 보이지 않았지만 은호는 단언했다. 연희다. 연희가 사진에 찍혀있다. 사진의 날짜를 확인하니 2012년 2월 14일, 


 밸런타인데이였다. 


 은호가 천천히 시선을 돌려 연희 옆에 찍힌 남자를 확인했다. 심장이 미친 듯이 두근거리며 고동쳤다. 남자의 얼굴이 찍혀있었다. 남자의 얼굴을 확인한 은호가 잠깐 숨을 멈춘다. 은호가 천천히 연희와 남자가 찍힌 사진을 끈다. 그리고 드르륵 거리며 마우스 휠을 위로 당긴다. 수십 장의 사진이 쫘르륵 나열된다. 은호가 숨을 멈추고 어떤 사진 한 장을 클릭한다. 달칵- 하는 소리와 함께 선명하게 찍힌 인물 사진이 떠오른다. 은호는 거기서 멈추지 않고 연달아서 다른 사진들을 클릭한다. 달칵 달칵 달칵. 무성의하게 느껴질 만큼 연속적으로 눌린 사진들이 한 타이밍 늦게 모니터에 떠오른다. 사진의 날짜는 제각각이었다. 하지만 사진 속 인물은 동일 했다. 

 연희 옆의 남자였다.

 남자가 독으로 찍힌 사진은 하나같이 포커스며 앵글이며, 구도며 신경 쓴 듯 완벽했다. 마치 영화의 스틸컷 같았다. 한번 보면 쉽게 잊을 수 없는 외모였다. 1000장 가까이 사진을 본 은호 또한 절대 잊을 수 없는 준수한 외모였다. 이 사람, 도대체 누구길래 매 행사마다 찍히는 거지? 은호는 몇 분 전까지 혼잣말로 중얼거렸던 자신을 떠올렸다. 순식간에 머릿속이 뒤죽박죽해졌다. 이 남자 누군데, 연희누나랑, 사진이 너무 많은데, 도대체.... 어떻게 상황이 돌아가는 거지? 생각을 정리하지 못해 버벅거리는 은호에게로, 이제 막 점심을 먹으려 일어났던 해인이 성큼성큼 걸어온다.

“헐 대박! 이때 엄청 앳되셨네!”

 은호가 그 소리에 화들짝 놀라면서 뒤를 돌아봤다. 해인의 입이 해맑게 벌어져 있었다. 와- 순수한 감탄이 쉼 없이 이어졌다. ‘대박- 대박! 이거 완전 영화 스틸컷 같다-.’ 은호가 다급하게 해인의 얼굴을 살폈다. 남자를 매우 잘 알고 있는 듯한 표정과 어투였다. 은호가 다급하게 해인에게 물었다.

“해인씨, 이분 누군지 아세요?”

 해인이 치솟아 오르는 자랑스러움을 숨기지 않고 여실히 드러냈다. ‘그럼요!’

“우리 미술관 관장님인걸요?”

 은호의 눈이 크게 떠졌다. 모든 일이 은호의 예상과는 다르게 흘러가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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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스티즈에 일반 BL글 올려도 되는지 모르겠지만...ㅜㅜ 조아라 연재분까지 업로드합니다. 인스티즈에서 연재할 계획이에요. 글이 조금 정신적 신체적인 고문이 있을 거 같아서.. 불마크를 하려고 했는데 수정을 못하네요...ㅜㅜ.. 여기까지 읽어주셔서 감사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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