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LOUDY, WINDY 김시민 안녕, 하는 그 짧은 말도 사실 나에겐 커다란 과제였다. 서로 스쳐지나가듯 지나친 수 백 번의 만남이 아무런 의미도 남기지 못한 채 지나 버렸으니, 아마 오늘도 내일도 풀지 못할 과제로 남을 것이었다. 같은 길을 걸으면서도 우리는 눈짓 한번 나누지 않았다. 다만 어쩌다 마주친 눈빛이 지나치게 아름답다고 생각했을 뿐이었다. " 야 안녕. " 늘 지각을 하던 나재민이 여덟 시도 되기 전에 등교했다는 건 분명히 어떠한 까닭이 있었다. 멍하니 창 밖을 바라보던 나는 나재민에게 그 까닭을 물었다. " 웬 일로 일찍 왔냐? " " 야, 친구가 왔으면 인사를 먼저 해야지! " 그제서야 안녕, 하고 헤실 웃었던 것 같다. " 뭘 그렇게 보고 있었냐? " 딱히 뭘 보려던 건 아니었는데. 나는 그냥, 하고 말을 흐렸고 나재민은 눈을 치켜뜨며 말했다. " 뭐 짝사랑이라도 해? " 워낙 그런 장난을 좋아하는 애라는 걸 알지만, 유난히 가슴 한 켠이 따끔거렸다. 왜인지 모를 너의 얼굴이 눈가에 아른거렸다. " 어어, 뭐야. 진짜 있냐? 서운하게 왜 말을 안 해- " 나는 또 그냥 피식 웃고 말았던 것 같다. 말 해 봤자 아닐까, 그렇게 생각하기도 잠시 나는 당황했다. 마음 한 구석을 이미 내 줘 버린 것일까, 두렵기도 했다. 나는 누군가를 좋아하고 싶지 않았다. 연습생이라는 내 신분이 그랬고 경쟁이라는 상황 또한 그랬다. 물론 인간 이제노는 아니었을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연예인은 인간 이제노의 꿈이잖아, 나는 생각했다. 나는 무대에 올라가 빛나는 조명을 받으며 웃고 노래하고 춤추는 가수를 꿈꿨지, 이 비 내리는 거리를 그 애와 한 우산을 쓰고 걷기를 바라는 게 아니었다. 스스로 인정할 수 있었다. 겁먹을 필요도 없는 그냥 작은 관심인 모양이라고 나는 넘겨짚었다. 불행의 시작은 대충 그러했다. 몇 주가 지나도록 변하는 건 없었다. 이러면 이런 것, 저러면 저런 것, 맘 가는 대로 살았던 시간이었다고 생각하긴 했지만 생각보다 제한되는 것이 많았다. 아니 그 모든 것을 다 떠나서, 그 애의 존재 자체를 부정하고 거부하기도 했었다. 그만큼 격렬한 도피였고, 나름 성공적이었다. 하지만 어쩌다 복도에서 마주치는 모습만큼은 차마 피할 수가 없었다. 은은한 안개꽃도, 그렇다고 선명한 보랏빛의 제비꽃도 아니었다. 잡아당기는 작은 힘은 생각보다 강력했고 그에서 멀어지려는 내 저항은 갈수록 약해져 갔다. 이대로 끌려가도 괜찮을까, 나는 구름 낀 하늘을 멍하니 올려다 봤다. 어쩌면 환상일 지도 모르겠다. 나는 차라리 그랬으면 좋겠다고 생각했고, 그런 점에서 깊은 잠이 좋았다. 현실로부터의 도피를 위해 나는 많이 잤고 그 어떤 장치로도 제어가 되지 않았다. 마음의 제어라, 언젠가 듣고서 유치하다고 생각했던 말이었다. 전에 없이 지쳐 있었다. " 이제노, 오늘도 3교시 끝나고 조퇴? " " 아마도? " 친구의 물음에 나는 두루뭉술하게 대답했지만 어쨌거나 그 말의 뜻은 긍정이었다. 친구의 표정이 아쉽다는 듯 구겨졌다. " 에이, 오늘부터 반 대항 짝피구 하는데. 첫 경기 우리 반이랑 6반이잖아. 너도 없고 재민이도 없으면 사람 많이 줄겠네. " " 짝피구? " 자리에서 일어나던 친구가 고개를 끄덕였다. 김시민 6반 아니었나. " 야 나재민, " " 어? " " 점심 먹고 가자. " " 그래도 되냐? " " 이동혁이랑 민형이 형한텐 내가 얘기 할게. " " 뭐야, 갑자기. 그러던지. " 마음이 다급해서 손이 헛나가기 시작했다. 민형이 형, 이동혁, 나재민 그리고 내가 있는 단톡방이었다. [ ㅇㅗ늘 점시머ㄱ고 가면안되ㅓ냐 ] 아, 이게 뭐람. [ 그러니까 ] [ 오늘 ] [ 점심 먹고 가요 ] 곧바로 답장이 왔다. 이동혁이었다. [ 오냐 ] " 제노야, 그럼 너 피구 할거지? " " 어? 어. " " 그럼 너 짝은 지혜로 한다? 재민이 넌 예진이. " 생각을 해 보니 김시민이는 상대 편이었다. 아, 그럼 쓸모가 없는 짓인가. 하지만 그렇다고 짝까지 정해 진 마당에 안 하겠다고 말을 바꿀 수도 없었다. 그럼 대체 내 피구의 목적은 뭐지. 별 생각 없이 창문 밖을 바라봤다. 헐 김시민이다. 방금 비가 그쳤는데 체육을 밖에서 하나? 위로 올려 묶은 머리카락을 보자마자 잡생각이 비누거품 녹듯 사라졌다. 얼굴 한 시간 더 보는 거면 족하다는 걸로 빠른 결론이 지어졌다. " 신발 갈아신고 여자애들은 꼭 체육복 갈아 입어! " 반장은 피구에 목숨을 건 것처럼 보였다. 그리고 그 반장의 짝은 바로 나재민이었다. 반장은 아웃되면 네 인생도 같이 아웃이야, 같은 포스를 풍기며 나재민에게 씩 웃었다. 반장이 여자 애들 너덧을 데리고 교실을 나가자 나재민은 파리해진 얼굴로 내게 다가왔다. " 나 어떡하냐? 던지는 건 몰라도 막는 거나 피하는 건 진짜 못 하는데? " " 야 빨리 안 와? " 걱정이 태산인 나재민과 다르게 점점 웃음이 번졌다. 김시민 볼 수 있다. 김시민도 나를 볼 수 있다. 나는 이번 짝피구에 최선을 다할 것을 맹세했다. " 제노야 잘해! " 이동혁의 목소리였다. 편을 갈라 서 긴장감이 맴돌던 피구 경기장이 한순간 키득대는 소리로 가득찼다. 구경꾼들의 시선이 내게로 향했다. " 아 이동혁 진짜, " 그 순간 상대편에서 공이 휘익 날아왔다. 아니 메다 꽂힌 게 맞다고 해야 할까. 그것도 반장의 어깨에 말이다. 잔뜩 겁먹은 표정으로 코트 밖으로 향하는 나재민이 보였고, 이동혁은 이미 신나게 약을 올리고 있었다. 언제 왔는지 민형이 형도 보였고, 가장 중요한 김시민이 보였다. 나 진짜 잘 할 거다 라고 생각하며 공을 가진 우리 편 친구에게 손을 뻗었다. 오오- 누군가의 작은 환호성이 들렸다. " 5반이 이겼어- " 그리고 깔끔하게 두 판을 이겼다. 내 입으로 말하기는 조금 민망하지만, 내가 제일 잘 했단 건 두말할 필요도 없었다. 오죽하면 이동혁까지도 내게 엄지손가락을 펴 내보일까. 어깨가 자연스레 펴졌다. 친구들은 내 등을 두드리고 머리를 헝클었다. " 야 진작에 너 있었으면 우리가 다 1등 했겠다! " 나는 바쁘게 김시민을 찾았다. 아, 저기 있다. 나는 아닌 척, 나재민을 데리고 몰래 그 뒤로 향했다. " 아, 밥 먹는다. " " 근데 이제노 진짜 잘 한다. 안 그래 시민아? " " 그러니까, 완전 잘 해. 진짜 멋있더라. 확실히 sm은 sm이야. " 푸핫- 나도 모르게 입을 막고 웃어 버렸다. 앞서 가던 김시민이는 다행히도 못 들은 듯 싶었다. " 뭐야, 왜 그래? 너 잘 생겼다고 해서? 뭐야, 그런 얘기 한 두번 듣냐? " 등에서 날개가 돋아나는 기분이 들었지만 날아갈 것 같지는 않았다. 그 편이 좋았다. 날아서 지구를 뜨기엔 지금 이 순간 지구는 너무 아름다웠다. 비록 날이 흐릴지언정. " 야 나재민. " " 왜? " " 우리 축구 6반이랑 하는 날 언제지? " 낸들 알겠냐, 하는 나재민의 표정에도 나는 굴하지 않았다. 비록 김시민에겐 별 뜻 아닐지라도, 내게는 특별한 날이 될 오늘이었다. 내일은 인사를 건네 볼까, 그렇게 생각하며 층계를 오르기 시작했다. 복도에 찍힌 검은 발자국이 눈에 띄었지만 나는 흐린 오늘이 좋았다. 안녕하세요, AROSA 입니다! 부족한 글이지만 재밌게 읽어 주셨으면 좋겠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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