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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GM 필수 / pastoral - raujika

남자가 나를 이끈 곳은 바다 였다. 끝날 것 같지 않던 기찻길 끝에는, 또 끝날 것같지 않은 바다가 펼쳐져 있었다. 참 복잡하고도 이해하기 힘든 이상한 곳이였다.

“바다는 정말 오랜만이에요.”

“눈에 담아 둬, 기억할 수 있게.”

“왜요? 여기서 이렇게 계속 볼 수 있잖아요.”

유한 미소를 지으며 바다를 보는 나에게 남자는 웃음 하나 없는 얼굴로 단호하게 얘기한다.

“아직은 아니야, 넌 돌아가야 해.”

여기는 아직 네 세상이 아니야…. 남자의 말이 끝나자마자 어디론가 빨려가는 듯한 기분이 들면서 눈이 감겼다. 그것이 그 남자와 나의 첫만남이였다.

[변백현] 환상통 2 | 인스티즈

Nor hath love's mind of any judgment taste. Wings and no eyes figure unheedy haste.

사랑 신의 마음은 판단력도 전혀 없어. 날개가 있고 눈이 없으니 무턱대고 서두르지.

셰익스피어의 ‘한 여름 밤의 꿈’ 중에서.

거친 숨을 몰아쉬며 눈을 뜨면 새카만 내 방 천장이 보였다. 숨이 막혀오고, 기침을 쿨럭쿨럭 해대며 떨리는 손으로 탁상 위에 있던 흡입기를 입에 갖다대었다. 고르게 숨을 쉬려고 하는데도 맘대로 가삐 쉬어지는 숨통에 정말 미칠 지경이였다. 가까스로 진정시키곤 흡입기를 다시 탁상 위에 올려 두었다.

나는 두 발을 침대 밑으로 내렸다. 보일러라도 돌린건지 미지근한 바닥이 발 끝으로 느껴졌다. 방금 전까지 느껴졌던 그 차가운 기찻길과는 너무나도 달랐다. 아니 그 전에… 내가 정말 그 곳에 있었던게 맞을까? 단순히 꿈이라기에는 너무 생생했다.

“머리 아파…. 짜증나.”

무심결에 손에 쥔 스마트폰의 화면을 켰다. 너무 밝은 화면에 눈을 찌푸렸다. 시간은 다섯 시를 넘겨 여섯 시로 향하고 있었다. 역시 그건 꿈… 이였던건가. 꿈이라기엔 너무 생생해서 기분이 썩 좋지는 않았다. 지끈지끈 아파오는 머리를 잡고, 탁상 위에 있는 텀블러를 집어 들어 물을 한모금 마셨다. 알람 하나 뜨지 않은 쓸모없는 스마트폰을 침대 구석에 던지듯이 두고는 다시 누웠다. 잠이 오질 않았다. 이대로 다시 잠에 빠져들면 다시 그 남자가 있는 곳으로 갈 수 있는 걸까? 아니면 정말 책의 제목처럼….

그저 한 여름 밤의 꿈인가….

“여주야, 아침 먹어. 도라지 즙 챙겨 먹구.”

“지금 몇시야?”

“9시, 엄마 먼저 출근할테니까 이따 봐. 오늘은 다섯 시 전에 꼭 들어오구. 엄마 갈게.”

잠결에 내 머리를 몇번이고 쓰다듬어주던 엄마가 방문을 닫고 나가는 소리가 들린다. 감고 있던 눈을 힘겹게 떴다. 결국 다시 그 꿈을 꾸지는 못했구나…. 무거운 몸을 일으켜 침대에서 일어나 앉았다. 어제 빌린 책, 다 읽지 못했는데… 그래도 도서관에 가고 싶었다. 내 유일한 친구이자, 내 유일한….

[변백현] 환상통 2 | 인스티즈

‘낫고 싶어?’

‘네 천식 말이야.’

‘이 곳은 가능해, 그 지긋지긋한 천식을 낫게 하는 것도…. 친구가 생기는 것도….’

친구가 생기는 것…. 내 머리 속을 스쳐지나가는 그 날 밤의 대화는 나를 어지럽게 만들기에 충분했다.

그저 꿈 따위에 불과한데, 왜이리 어제 일어난 일 처럼 생생한지 모르겠다. 거실로 나와 하얀 컵에 담긴 아직은 따듯한 도라지 즙을 천천히 마셨다.

급하게 먹다가 또 약 찾지 말고! 하는 엄마의 잔소리가 생각났기 때문일까. 도라지 즙을 먹는 내 귀에는 새소리가 나는 것 같은 착각이 든다. 얼른 밥 먹고, 도서관에 가야지. 라는 생각만이 내 머리를 정리해주었다.

오늘은 어제보다 더 쌀쌀했다. 이어폰을 끼고, 점퍼 주머니 속에 손을 푹 찔러넣고는 집을 나섰다. 아, 물론 가방 안에 사료를 챙기는 것도… 물을 챙기는 것도 잊지 않고 말이다.

도서관까지는 집에서 걸어서 10분이 걸린다.

그리 멀지 않은 길임에도 불구하고 나는 금새 숨이 가빠진다. 주머니 속에서 언제든지 꺼내 들 수 있게 흡입기를 만지작 대고 있었다. 나도 모르게 하는 버릇과도 같은 행동이였다.

도서관 문을 열고 들어서자마자 보이는 사서 언니가 보이질 않는다.

책 정리를 하고 있나…. 바쁘려나…? 도서관 이곳저곳을 살피다가 자리를 잡고 앉았다. 가방을 의자에 걸고는 금방 자리에서 일어났다. 어서 책을 골라야하니까.

나는 이 시간이 제일 설레고, 기분 좋은 시간이었다. 무슨 책을 읽을지, 오늘은 또 어떤 새로운 세상의 문을 열지. 나는 항상 이 곳에서 재미를 본다.

‘저거… 읽고 싶은데.’

쩝…. 닿지 않는 손이 원망스러웠다. 애처롭게 까치발까지 들고는 손바닥을 있는 힘껏 펴 책에 닿으려고 노력하면 할 수록 책은 ‘어디 한번 잡아보시지.’ 라며 나를 놀리듯 더 책장 안으로 들어가는 기분이 들었다.

조금만 더…! 조금만 더 닿으면 잡을 수 있을 것 같아! 하지만 잡히지 않는 책을 노려보았다. 그런 내 손 위로 얇고, 길고… 조금은 하얀 예쁜 손 하나가 더 높이 올라왔다.

[변백현] 환상통 2 | 인스티즈

“이 책 맞죠?”

“.....”

“이야…. 이 책, 아까 찾다가 우연히 봤는데 아직 한 분도 안 빌려간 책, 그러니까 한마디로 노잼인 책이더라고요.”

“네, 네…? 아, 저도 오늘 처음….”

“아아~ 처음 볼 책이라구요? 읽다가 재밌으면 저한테도 추천 좀… 알겠죠?”

나의 품 안에 두꺼운 책 하나를 안겨준 남자는 다름 아닌 어제 꿈 속에서 본 남자였다.

장난스러운 미소를 지으며 그 남자가 걸어간 곳은 데스크였다. 설마 사서가 바뀐건가…? 언니는 그만둔다는 말이 없었는데.

그러고보니 딱히 언니와 연락처를 주고 받은 적이 없네.

간신히 책을 잡고 있는 손 끝이 떨려왔다. 꿈에서 본 사람이… 현실에 있는게 가능한 일인건가.

묘한 기분에 나도 모르게 아랫 입술을 잘근잘근 씹어댔다. 자리에 앉았지만 자꾸만 그 남자에게 눈길이 갔다. 목소리도 비슷한 것 같아서 더 신경 쓰였다.

물어보고 싶었다. 한참 동안이나 고민했다. 결론은 난 궁금한건 참을 수 없었다. 어디서 생긴 용기인지… 다시금 떠오르는 어젯밤 그 남자의 목소리에 읽는둥 마는둥 했던 책을 덮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바코드를 찍기 바빠보이는 남자에게 쭈뼛대며 다가갔다.

“거봐요, 그 책 재미없죠? 사람들이 안 빌려가는데는 다~ 이유가 있어요.”

“그게 아니라….”

“설마 재밌어요? 대박…. 제목은 완전 딱딱하던데….”

나를 보며 입을 가리면서 놀란다. 나는 여전히 놀란 표정을 짓는 남자에게 조심스럽게 물었다. 아니, 조금은 당돌해보일 수도….

“혹시… 저 어디서 본 적 있어요?”

“예…?”

“절 어디서 보신 적이 있냐구요.”

“오늘은 웬일이야? 엄마 퇴근 전에 집에 다 있고.”

“그냥… 재밌는 책이 안보여서.”

“언제는 재밌는 책이 너~무 많아서 뭘 고를지 고민 된다고 하지 않았나?”

“밥 줘! 나 배고파.”

네, 네~ 우리 공주님이 달라는데 드려야죠. 대답을 한 엄마가 짧게 웃는다. 나는 엄마가 방으로 들어가고 나서야 한숨을 푹 쉬었다.

[변백현] 환상통 2 | 인스티즈

‘이런 말씀 드리기 뭐하지만… 미안해요. 제가 아직 여친은 만들 생각이 없어서.’

사람 좋게 웃는 그 얼굴이 잊혀지지 않는다.

날 뭐라고 생각했겠어… 분명 자기를 꼬시려고 한 말이라고 생각했겠지. 그러니까 나에게 그런 대답을 한게 분명해.

절로 붉어지는 얼굴을 손바닥으로 몇번이고 쓸어내렸다. 끓어오르는 창피함과 부끄러움이 얼굴로 퍼져 붉게 달아오른다.

어제 빌린 책을 한참동안이나 읽었다. 책의 세계에 빠져있는 동안에는 잡스러운 생각이 들지 않으니까 마음이 평화로웠다.

시계를 보니 어느덧 열두시를 훌쩍 넘기고 있었다. 또 늦잠 자겠어, 얼른 자야겠다. 읽고 있던 책 사이에 노오란 책갈피를 끼워넣고 책을 덮었다. 의자를 뒤로 빼니 조용한 내 방에 드르륵 소리가 들린다.

깊숙한 잠에 빠져들었다. 저 멀리 아득한 곳에서부터 새소리가 들려오는 듯한 기분이 든다.

마치 저 새소리가 이리 오라고 날 부르는 것 같았다. 근데 그렇다고 감긴 눈이 떠지지는 않았다.

딱히 눈을 뜨고 싶다는 생각이 들지도 않았으니까. 손가락 끝에서 갑자기 느껴지는 차가운 느낌에 온 몸에 소름이 돋았다. 누군가 걸어오는 소리도 들렸다.

“또 왔네.”

오고 싶어서 온게 아니야…. 누가 자꾸 나를 부르는 것 같았어. 이리 오라고, 같이 놀자고. 새로운 세상이 자꾸만 나를 끌어 당기는 기분이 들었어.

“여기가 마음에 드는구나, 넌.”

자꾸만 들려오는 낯익은 목소리에 감긴 눈을 떴다. 기찻길에 누운 내 눈에 하얀 운동화가 보인다. 그래, 또 이 곳이였다.

[변백현] 환상통 2 | 인스티즈

어서 와, 기다렸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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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첫글] [변백현] 환상통 1  6개월 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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