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속에는 가끔 알 듯 말 듯 한 수수께끼 같은 질문이 등장한다. 곽경택 감독의 〈친구〉가 그런 예이다. 영화 속에 여러 번 등장하는 <조오련과 거북이가 수영시합하면 누가 이기겠노?>라는 질문이 그것이다. 누구나 영화를 보면서 느닷없이 등장하는 그 질문에 대해 의아하게 느꼈을 것이다.
그렇다면〈친구〉에서 조오련과 바다거북이는 어떤 상징인가? 처음에 네 친구 중 누가 던진 질문인지는 밝히지 않았지만, 이 물음에 유독 강하게 집착하는 것은 한동수 쪽이다. 이는 바로 자신의 운명에 대한 회의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친구들 중에서도 늘 소외감을 강하게 느끼면서 "내는 니 시다바리가?"라고 반발하는 동수는 준석으로부터 벗어나고자 끊임없이 몸부림하면서도 그것이 불가능할 것이라는 숙명적 불안감에 괴로워한다. 동수의 시다바리 신드롬은 피지배 구조에 억눌려 "시키는 대로 하고" 살아 온 이 시대 모든 사람들이 스스로 그렇게 인정하기 어려운 자화상으로 비쳐져 사회적으로 깊은 알레고리를 형성하기도 했다.
준석을 극복하고자 하는 동수의 몸부림은 잠재적인 살해욕구로 발전하면서 영화의 많은 부분에서 표출되고 있다. 준석의 조직원이 자신을 해치려고 했을 때, 복수의 칼을 앞세워 준석의 아지트를 찾아간 동수의 표정에는 분노와 함께 의기가 서려 있었다. 이 장면은 어린 시절 가게에서 훔친 장난감 칼로 준석을 찌르는 시늉을 해 보이던 그의 모습과 상기되면서 오랜 세월 쌓였던 억눌림의 분노와 복수심을 말해 준다. 고등학교 시절, 동수는 자신이 좋아하는 여학생 진숙을 상택에게 붙여준 준석에게 처음으로 대든다. 그러나 그의 반항이란, "죽고 싶나"라는 준석의 위협을 흉내내보는 정도였다. 그의 복수심은 거울 속에 있는 자신을 향하여 묻는 푸념에 불과한 독백이며, 거울 속의 자신이 현실적 자아에게 되묻는 심각한 위기를 의미할 수도 있다. 이 독백은 자신의 죽음에 대한 비극적 운명으로 수렴된다. 동수를 살해한 것은 자신의 운명이라는 것이 영화의 설정이다.
결국 동수가 생각하는 조오련은 자기 자신이다. 1970년대에 대한해협을 헤엄쳐 건넌 조오련은 사람의 한계를 극복하기 위하여 바다에 뛰어든 도전적인 인간의 상징이다. 과연 그가 바다에서 가장 느린 거북이와 수영시합을 한다면 이길 수 있을 것인가 하는 물음은, 억눌림의 한계상황에 처한 동수의 관점에서는 피할 수 없는 삶의 회의과정이다. 동수는 바다거북이가 물 속에서 헤엄치기 때문에 상대가 안 되는 시합이라고 생각했다. 그 의미는, 깡패가 되고 싶은 동수의 현실에서는 죽은 사람을 위한 시다바리인 장의사의 아들로 자란 자신이 폭력과 죽임의 주체인 건달의 아들인 준석을 극복할 수 있을 것인가 하는 절박한 물음으로 전이된다. 이는 혈통과 문화의 세습에 대한 개인의 한계인식을 의미한다.
깡패의 피를 물려받은 준석의 보조관념인 바다거북은 동수의 관념적인 적이다. 동수에게 그 적을 극복하는 것은 자기존재의 선험적인 본능이나 의무이다. 그 본능은 환경의 억압에 의하여 형성되었으며, 반드시 해소되지 않으면 실존적 스트레스로부터 견뎌낼 수 없다. 그래서 그는 준석의 조직을 와해시키기 위해 경찰에게 밀고한다. 바다거북이에 대한 정면 도전이 시작된 것이다. 준석의 조직이 검거된 직후, 방파제에 앉아 깊은 고민에 빠진 동수는 부하에게도 조오련과 바다거북이에 관한 질문을 던진다. 초조함과 비장함이 묻어나는 동수의 질문은 회의적인 독백으로 비치고 있다.
인간의 유한성과 숙명에 대한 동수의 갈등과 목숨을 건 도전은 마침내 자신의 죽음을 초래함으로써 숙명에 대한 패배로 마무리된다. 곽경택 감독은 동수라는 캐릭터를 통해 운명결정론(運命決定論)의 한 단면으로서 비극을 맞은 인생의 비애를 상징화하여 보여주고자 했던 것이다. 모든 현상은 필연적 인과관계를 가진다는 결정론은 R.데카르트의 기계론과 K.마르크스 등의 유물론, G.W.라이프니츠의 단자론, C.다윈의 진화론 등 폭넓은 이론적 배경을 가진 뿌리깊은 철학이다.
이러한 해석에 의하면, 결과적으로 이 수수께끼의 정답은 <바다거북이>가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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