브금: 불꽃심장 - 여린마음
<미국 역사 시리즈 21편 : 어느 한 흑인의 눈물>
에 들어오신 것을 환영합니다 ^^
지난 20편에서는,
쇼미더머니 파워를 장착하여 풍요로움으로 가득 찬 1950년대의 미국에 대한 썰을 풀어보았는데요.
하지만 풍요로움과는 동떨어져 힘겹게 삶을 살아갔던 미국인들이 있었습니다. 이들은 바로 '소수 인종'들이었어요.
1863년, 링컨은 노예 해방을 선언했지만, 약 100년이 흐른 1950 ~ 60년대까지도 여전히 흑인들은 차별과 멸시 속에 살아야 했습니다.
과연 이들은 어떤 삶을 살았으며, 어떻게 인종차별이 만연했던 미국사회를 변모시켰을까요?
오늘도 흥미로운 스토리 속으로 함께 가보시죠~!
Let's Go!
종교의 자유를 찾아 미대륙으로 건너온 필그림 파더스.
성공적으로 정착한 그의 후손들은 1776년, 미국을 건국했습니다.
그 후, 미국이 세계 최고의 강대국으로 성장하기까지는 불과 300년이 채 걸리지 않았죠. 다시 말해, 이토록 기적적인 성장을 한 나라는 인류 역사를 통틀어 미국 외에는 거의 없습니다.
1950년대가 되자, 미국인들은 전 세계의 어떤 국민들도 누리지 못하는 ‘풍요로움’을 누렸습니다. 당시 발전된 대도시의 사진들을 보면 오늘날이라고 해도 믿을 정도죠.
하지만 사실, 미국인 모두가 소위 잘 먹고 잘산 것이 아니었습니다. 엄밀히 말하면 중산층 이상의 ‘백인’들만 번영의 혜택을 마음껏 누릴 수 있었죠.
이들 이외에 흑인, 히스패닉 등과 같은 소수 인종과 원주민들은 이러한 풍요로움에서 철저히 배제되었죠. 특히, 아메리칸 원주민들은 미국에서 가장 가난한 집단이었습니다.
소수 인종의 대부분를 차지했던 흑인들은 산업이 발전한 대도시로 이주해왔습니다. 흑인들은 잘살아보겠다는 가슴 벅찬 꿈을 이루고자 노력했지만, 사실 이들이 성공할 확률은 극히 낮았습니다.
그 이유는, 1950년대의 미국은 ‘인종차별’이 만연해 있던 사회였기 때문이죠. 인종차별은 소수 인종에게 성공할 수 있는 ‘기회’조차 가로막았습니다.
흑인들이 대도시로 몰려오자, 다수의 백인은 교외로 이사를 했습니다. 왜냐하면, 백인들은 기본적으로 흑인들과 같은 공간에서 살고 싶어 하지 않았고,
교외로 이사하면 똑같은 돈으로 더 큰 집에서 풍족하게 살 수가 있었죠. 상황이 이렇게 흘러가자, 대도시에는 백인들이 다 떠나가고 가난한 흑인들만 남게 되는 웃지 못할 상황이 펼쳐집니다.
이러한 흑인 빈곤층이 밀집해 있는 대도시 주거지는 ‘게토(Ghettoes)’라 불렸습니다. 반면, 백인들이 주로 사는 대부분의 교외는 ‘흑인들 주거 금지’였습니다.
그렇다면, 1950 ~ 60년대 미국의 인종차별은 얼마나 심했을까요?
사람으로 늘 북적대는 출퇴근 버스.
오늘날의 버스 내부에는 ‘양보석’이 있습니다. 바로 임산부와 노약자들을 배려하는 좌석이죠.
1950년대 미국 남부 지방의 버스에도 물론 양보석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 양보는 노약자를 위한 것이 아니라 ‘백인’들을 위한 것이었어요.
당시 버스는 조금 특이했습니다. 백인은 앞쪽에 앉고, 흑인은 뒤쪽에 앉아야 했죠. 중간에 있는 자리는 아무나 앉을 수 있었지만, 백인이 서 있으면 흑인은 무조건 양보해야 했습니다.
또한, 이 사진은 1950년대 미국의 한 식수대입니다. 왼편에 ‘White(백인)’ 전용 식수대는 냉동기가 작동해 시원한 물이 나오지만, 오른편의 ‘Colored(유색 인종)’ 식수대는 가공되지도 않은 물이었죠.
이처럼 대부분의 남부 지역에서는 학교, 식당, 식수대, 호텔을 비롯한 많은 시설이 흑인과 백인이 따로 사용하도록 분리되어 있었습니다.
하지만 분리만 되었으면 나았을까요? 흑인이 이용할 수 있는 시설은 백인 전용 시설과 비교하면 모든 면에서 매우 열악했습니다.
이러한 ‘흑백 분리 정책’은 1896년에 “모든 시설에 백인과 흑인을 분리하지만 평등하다(Separate but Equal).”라는 원칙으로 제정된 ‘플레시 대 퍼거슨’ 판결을 기초로 하고 있었죠.
그러나 결과는 폭망이었습니다. 분리는 되었지만, 전혀 평등하지 않았으니까요. 이러한 인종차별에 대해 흑인들은 점점 저항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러던 중, 결정적인 사건이 일어났죠. 1955년 12월 1일, 알라바마 주에 사는 흑인 여성인 로자 파크스는 버스에 올랐습니다.
일을 마치고 피곤했던 터라, 파크스는 중간석에 앉았지만 백인에게 자리를 양보하지 않았죠. 그러자 운전사가 백인에게 자리를 양보하라며 파크스에게 경고합니다.
그러나 파크스는 자리를 양보하지 않고 계속 앉아 있었습니다. 그러자 잠시 후, 경찰들이 와 파크스를 체포했습니다.
이 사건은 알라바마 흑인 사회에 커다란 영향을 미쳤습니다. 흑인들은 시내버스 보이콧 운동을 벌이며, 다른 교통수단만을 이용했죠.
흑인들은 1년이 넘는 기간 동안, 어떤 상황에서도 버스를 이용하지 않고 카풀을 하거나 걸어서 학교와 직장을 다니며 투쟁을 계속했습니다.
그리고 이 투쟁을 이끈 것은 당시 26세의 ‘마틴 루터 킹 주니어’였습니다. 그는 저명한 목사의 아들이었고, 타고난 리더십을 가지고 있었죠.
마틴 루터는 대학교에 다니며 간디의 ‘비폭력주의’를 공부합니다. 그리고 비폭력주의와 기독교의 기본 정신(사랑, 믿음 등)을 결합해 인종 차별에 저항하는 무기로 삼죠.
그 후 13년 동안 마틴 루터는 활발한 민권 운동을 주도하며 미국에서 가장 영향력 있고 존경받는 흑인 지도자가 됩니다.
그는 생전에 수많은 연설을 했는데, 그중에서 가장 유명한 연설은 바로 1963년 8월 28일 워싱턴의 링컨 기념관 앞에서 한 연설입니다.
1963년 8월 28일,
워싱턴 링컨 기념관 연설 - 마틴 루터 킹 주니어
"나에게는 꿈이 있습니다. 그것은 언젠가 나의 네 아이들이 피부색이 아니라, 인격을 기준으로 사람을 평가하는 나라에서 살게 되리라는 꿈입니다"
이 명연설을 한 지 1년 후, 그는 노벨 평화상을 받습니다. 그리고 4년이 지난 1968년 4월 4일, 그는 멤피스의 한 모텔 2층에서 백인 우월주의자에게 암살을 당합니다.
1950 ~ 60년대에 흑인 저항 운동이 일어난 것은 여러 가지 이유가 있습니다. 먼저, 2차 세계대전 기간에 수백만의 흑인 남성들이 군에 복무하거나 군수공장에서 일했는데,
이러한 경험들은 이전까지 고립되고 억압받던 생활 방식과는 차이가 있었습니다. 그래서 흑인들도 스스로 운명과 처지를 개선해야겠다는 생각을 하게 된 것이죠.
2차 세계대전 참전 흑인 왈
: "우리 흑인도 너네(백인)과 똑같이 목숨 걸고 미국을 위해 싸웠는데.. 돌아와 보니 이게 뭐야.."
또한, 20세기에 들어 흑인들도 고등 교육을 받을 수 있었기 때문에 지식인, 전문인 등이 속출했죠. 이들은 흑인사회를 대표하는 지도자로 성장했고 곧 민권 운동을 주도합니다.
어찌 되었든, 1950년대부터 벌어진 흑인 민권 운동은 더욱 가속화되어 60년대에는 미국에서 무시할 수 없는 강력한 세력으로까지 확장하게 됩니다.
한편, 민권 운동이 한창이던 1960년대 초.
존 F. 케네디가 43세의 나이로 미국의 35대 대통령에 선출됩니다.
결과론적으로 존 F. 케네디는 암살로 인해 겨우 2년 동안 대통령직을 수행했지만, 흑인 민권에 적지 않은 영향을 미친 대통령이었습니다.
그는 대통령직을 수행하는 초기부터
미국 내에서 점점 가속화되어 가고 있는 민권 운동 문제를 반드시 해결해야만 했죠.
케네디 집권 초기,
인종차별이 심한 알라바마 주와 미시시피 주 등에서는 흑인들의 거센 저항 운동이 지속적으로 발생했습니다.
결국 케네디는 상점, 식당, 극장, 학교와 같은 시설에서 흑백 분리를 금지하고 고용차별을 금한다는 입법안을 새로 제안합니다.
하지만 케네디가 제안한 공민권 법은 하원을 통과하였지만, 상원에서 보류된 상태였죠. 그러던 중 케네디가 암살당합니다.
그의 죽음은 생전에 그가 추진했던 공민권 법에 영향을 미쳤고, 결국 1964년에 20세기 미국법 사상 가장 중요한 공민권 법이 통과됩니다.
< 21편 예고 >
미국은 1950년대를 거치며
엄청난 성장 속에 풍요로운 사회로 변모했습니다.
그러나 경제성장은 미국인 전체에 해당하지 않았어요.
백인을 제외한 유색인종은 성장의 혜택에서 철저히 배제되었고, 이로 인해 1950년대 중반부터 미국에는 거센 민권 운동이 발생하게 되었죠.
민권 운동은 20세기 미국에서 벌어진 가장 길고도 험난한 사회 투쟁이었습니다.
세상의 이치가 그렇듯,
모든 성장은 희생을 수반합니다. 우리나라의 민주화 운동이나 미국의 민권 운동도 바로 이러한 희생을 줄이고자 국민들이 나섰던 투쟁이었지요.
따라서 역사의 장엄한 흐름 속에 희생되셨던 분들을 기억하는 것이야말로, 후대를 사는 우리가 마땅히 해야 할 일이 아닌가 생각해 봅니다.
다음 편에서는, 1960년대의 미국 이야기를 이어가도록 할게요.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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