블로그 <산하의 썸데이서울>
1989년 5월 24일 노동자 조정식의 죽음
순진한 민간인(?)으로 학창 시절을 보냈고 지금도 선량한(?) 시민으로 살고 있는 제가 과거의 이 ‘대공’ 형사들을 경향 각지로 찾아다니며 면접할 일이 있었습니다. 인천에서 근무하고 있던, 정년퇴직을 1년 앞둔 형사 한 분이 계셨습니다.
그분과 하루 종일 서울과 인천을 쏘다니면서 이런저런 이야기를 많이 나누게 됐었지요. 고 박종철씨의 죽음을 덮으려 했던 박모 치안감이 얼마나 유능한(?) 간첩 잡이 전문가였는지에 대해서, 그리고 그 고문에 가담했던 조 아무개라는 사람은 대구에서 날고 기는 대공형사였는데 서울로 스카우트(?)된 지 몇 달만에 신세를 조져 버려서 인생만사 새옹지마의 실례가 되었다는 이야기, 그리고 운동권 총동원령이 내려졌던 86년 5월 3일의 인천의 생생한 기억들..... 끌러도 풀어도 다하지 않을 것 같은 베테랑 대공 형사의 이야기 보따리 끝에 제가 툭 질문을 던져 봤습니다.
“간첩 잡아 보셨어요?”
“....... 심문은 해 봤죠.”
“아니 수십 년 동안 많이 잡으셨을 거 같은데.”
“학생들이나 위장 취업자들은 잡아 봤지만.... 걔들은 간첩은 아니고.....”
“그 중에 젤 기억에 남는 사람이 누가 있나요?”
과연 그 입에서 어떤 이름이 나올지 저는 궁금했습니다. 왕년에 박노해를 길렀노라 기염을 토했고 요즘은 본인 이름을 묻는 게 취미인 듯 보이는 경기도 지사님이나 인천에서 오래 생활했을 노회찬 의원이나 그 외 지금은 쟁쟁한 기라성이 되어 버린 사람들의 옛날 이야기가 흘러나오지 않을까 적지않이 기대를 하기도 했지요.
“하나 있네요. 그런데 이름은 잘 기억이 안 나네. 조.... 뭐였는데 서울대 79인가 80인가, 아니 훨씬 더 아래일 수도 있고.....”
수사관의 회고에 따르면 서울대 법학과 출신의 조 아무개 학생은 학교를 마치지도 않은 채 인천의 어느 공단 노동자로 위장 취업하여 암약(!)하다가 공장주의 신고로 결국 이 형사님한테 덜미가 잡혔답니다. 조금 맥이 풀렸습니다.
“그런데 왜 기억 나시죠?”
“밥을 주니까, 왜 그 천주교인들이 성호를 긋잖아요? 그런데 걔는 구호 외칠 때 팔 뻗는 거, 그걸 세 번 힘 있게 내지른 뒤에 밥을 먹더라고. 내가 데리고 있었던 내내 그랬어. 구호를 외치는 것도 아니야. 그냥 척 척 척 세 번 딱 하고 밥을 먹어.”
“그리구요?”
“말도 없는 놈이었어요. 샌님도 그런 샌님이 없었어. 주변 조사해 보니까 뭐 의식화같은 걸 시도하지도 못했더구만. 그렇게 수줍어했대. 사람들 앞에서는 말도 제대로 못했다더라고. 위장 취업이라는 것도 좀 붙임성이 있고, 사람들하고 사와리가 좋아야 뭐 하는 거 아니우. 그런데 녀석은 영 아니더라고. 잡혀 온 놈들 중에 말 잘하는 놈 참 많았거든. 그런데 걔는 진짜 말 한 마디 안 했어. 취조할 때도 고개를 젓거나 끄덕이거나 그게 다였어. 하지만 그런 느낌 있잖아. 아 이놈은 진짜구나. 겁도 안 먹을 것 같고, 눈치도 안 볼 거 같은 놈. 밥 먹으면서 걔가 무슨 생각을 하면서 팔을 뻗었는지 모르겠지만 나중에는 그 샌님이 무섭더라고. 좀 말을 시켜도 한 마디도 안해. 마치 벙어리처럼.”
서울 법대를 나왔다니 그래도 고시라도 봤을 것이고 어느 동네에선가 인권 변호사 쯤으로 살고 있지 않을까 싶어 지금은 뭘 하는지 아시냐면서 심드렁하게 물었을 때 형사님은 창밖으로 시선을 돌렸습니다.
“죽었어요.”
“네?”
“집행 유예로 나왔거든. 그런데 다른 공장에 또 갔다는 건 들었어요. 어느 날 부평역 앞에서 녀석을 우연히 만났지. 그래 역 앞에서 한 1시간 동안 붙잡고 훈계, 아니 하소연을 했어. 너 제발 이렇게 살지 말아라. 녀석은 강원도 태백인가가 고향이었어. 아버지는 광부였고. 그 아버지가 얘가 서울 법대 갈 때 얼마나 좋아했겠어. 모르긴 해도 동네 잔치를 3박 4일 했을 거야. 막장 인생에서 용 난 거 아냐. 그런데 그런 자식을 내 손으로 잡아 넣었고, 또 그런 일을 한다고 하니까 내 가슴이 다 아프더라고요. 빌었다니까. 걔한테..... 나중에 너 잘 된 뒤에 네가 하고 싶은 일 하면 되는 거니까, 제발 학교로 돌아가라구요. ”
그 만남이 있은 지 달포가 지났을 때 형사님은 동료가 전하는 조 모 학생의 비보를 들었습니다. 위장 취업 중이던 공장에서 산업재해를 당하고 말았다는 것이지요. “지금 살았더라면 그래도 좋은 세월 보내고 있을지도 모르는데......”하고 제가 한 마디를 덧붙이자 그분은 단호하게 고개를 저었습니다. “걔는 그런 깜냥도 없었을 거예요. 그럴 놈이면 그 추운 날 길거리에서 자기 잡아넣은 형사 얘기를 1시간 동안이나 듣고 있겠어? 뿌리치거나 그냥 가버리면 되지....... 지금도 궁금해. 걔가 내 얘기를 듣고 있었던 이유가....... 겁나서 그랬던 건 분명히 아니고......”
조 모 학생은 그 1 시간 동안 단 한 마디도 하지 않았답니다. 그렇다고 형사에게 대들거나 무시하지도 않은 채 묵묵히 형사의 훈계성 하소연을 듣고만 있었다지요. “차라리 이 독재자의 야 뭐 이런 욕이나 하고 가 버렸으면”(형사님의 말) 그렇게 맘에 아리지도 않았을 텐데 며칠을 라면으로만 때운 걸 증명이라도 하듯 얼굴은 붓고 손목은 말라버린 채 그는 한 형사의 넋두리를 묵묵히 들어 준 뒤 안녕히 가시라고 인사를 한 뒤 헤어졌다지요. 그게 다냐는 질문에 형사는 답했습니다.
“그렇죠. 안녕히 가시라는 인사하고...... 유치장에서 걔가 부른 노래가 있었는데.... 시끄러운 투쟁가 뭐 그런 건 아니었고...... 내가 살아가는 동안에...였나?”
“해바라기의 ‘사랑으로’요?”
“그 노래는 걔가 죽은 뒤에 나왔지. 하여간 뭐 그런 노래였어.”
몇 년 전 이 글을 세들어 살던 선배의 홈피에 올렸을 때 이 문제의 조모 학생이 누구였는지 금방 드러나서 놀랐습니다. 이름은 조정식. 형사 아저씨의 기억력에 문제가 있었던지 그는 법대생이 아니고 물리학과 학생이었고 고향은 강원도 태백이 아닌 경북이었습니다. (경주 사대부고를 나왔다는군요) 아버지는 광부가 아니라 미국에서 불법체류하는 점원으로 일하셨고 아들의 행적을 까맣게 모르시다가 사망 소식을 듣고서야 귀국하셨다고 합니다. 그 외 사연은 형사의 기억이 다 맞다고 합니다. 형사에게 부담감을 줄만큼 과묵했었고 공간을 옮긴 뒤 얼마 안되어 사망한 것 등등. 위장취업했던 공장에서 아무도 학생 출신인 줄 몰랐을 만큼, 진짜 노동자가 되기를 원했고 또 그 뜻을 이뤄가던 한 청년이 1989년 5월 24일 세상을 떠났습니다. 그가 형사 앞에서 불렀던 노래는 “이 세상 사는 동안”인 것 같습니다. 고인의 명복을 빕니다.
이 세상 사는 동안 내 흘릴 눈물들
이 생명 다한 후에 다 씻어지리니
이 길을 가는 동안 지쳐 쓰러져도
그보다 더욱 귀한 건 생명을 봄이라
곤한 내 혼아 눈을 들어 저 빛을 향하여
아무도 뺏지 못할 생의 자유를 되찾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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