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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쪽에서 기러기가 날아왔다.
운남은 종래에 기러기가 없었는데, 홀연히 줄을 이루어 동북쪽에서 날아왔다.
어리석은 사람들이 무엇인지 알지 못했는데,
식견이 있는 사람이 이것이 기러기라고 했다.
이때 이후로 겨울이 되면 100여 마리가 무리를 이루어 하루에도 여러 줄이 지나갔다.
-1660년 중국 운남성의 기록
영화 "Tomorrow" 를 보신 분들은 저런 일이 진짜 생길까? 영화니까 과장이겠지?
라고 궁금해 하시는 분들도 많으셨을 겁니다
하지만 사실 저런 영화와 같은 경험을 인류가 겪어보지 못한 것은 아닙니다
사실 비슷한 경험을 해봤음이 최근 연구로 밝혀지고 있죠
다만 몇년~혹은 수백년에 걸쳐 일어났기 때문에 바로 체감하지 못하거나
역사시대 전의 사건이라 기록이 없을 뿐입니다
이 이야기에서 할 내용은 바로 빙하기 입니다.
그 중에서도 단기간에 걸친 소규모의 빙하기, 즉 소빙기의 이야기이죠
가장 최근에 있었던 소빙기는 13~19세기까지 지속되었습니다.
그리고 그 시기 중에서도 소빙기가 절정에 달했던 시기
즉 과학자들의 연구결과에 의하면 지난 1만년중 가장 추웠던 시기인 17세기에
인류의 역사는 커다란 격변을 겪게 됩니다.
1644년 6월 몽블랑이 올려다 보이는 샤모니에서는 특이한 의식이 행해졌다.
주민들의 요청으로 이곳을 찾은 주교는 300여 명의 주민을 이끌고
마을을 덮쳐오는 거대하고 무시무시한 빙하로 행진했다.
빙하 앞에서 예배를 올리면서 주교는 빙하가 더 내려오지 않도록 신의 가호를 빌었다.
1630년이 되었을 때 샤모니는 밀려오는 빙하로 이미 토지의 3분의 1을 잃었다.
1640년에 접어들면서 빙하의 확장은 더욱 빨라져 마을을 위협하기에 이르렀다.
주민들에게 이것은 공포였다.
신의 징벌이라고 생각한 그들은 마지막으로 주교에게 탄원한 것이었다
유럽에서는 대흉작으로 인해 프랑스에서만 1692-93년 두해에 걸쳐
기아와 전으로 280만명이 사망하는 대참사가 벌어졌으며
민심은 흉흉해지고 종교에 기대기 시작하면서
결국 종교문제에서 촉발된 30년전쟁이 벌어져 독일인구의 1/3이 사망했고
또한 유럽 곳곳에서 마녀사냥이 시작됩니다

에이브러햄 혼디우스의 그림 '템스 강의 빙상시장'(1684년 1월 31일)
그외에도 영국 청교도 혁명 및 명예 혁명, 프랑스 프롱드의 난, 러시아 스텐카 라진의 난등이 이어지면서
유럽은 거대한 혼돈의 소용돌이에 휩쌓이게 됩니다.
이 시기 템즈강의 결빙이 시작됬음이 당시의 회화들에서 확인되어
당시 유럽이 소빙기의 영향을 받고 있었음을 확인할 수 있게 하고 있죠

한편 아시아에서는 이 시기 절정에 이른 소빙기로 인해
만주와 몽골에서의 농경과 목축을 이용한 식량수급이 절단나면서
극심한 식량난으로 경제파탄상태에 빠진 만주의 여진족은 누르하치의 기치아래 뭉쳐
"살아남기 위해" >명나라와 조선을 침공했고
일본 역시 간메이 대기근과 시마바라의 난이 발생했습니다
명나라 역시 소빙기의 영향으로
강남의 황포와 현재의 홍콩일대의 바다까지 얼어붙고
남부 광동성,복건성의 열대과일은 물론 가축과 물고기마저 얼어 죽었습니다
그렇게 추위와 가뭄으로 인해 계속된 흉년으로
각지에서 농민반란이 일어났고
결국 명은 이자성의 난과 여진족의 침입으로 멸망하게 됩니다.
"숭정 15년(1642)에서 16년, 연이어 크게 가물었다.
나무껍질과 풀뿌리는 벗겨지고 파헤쳐져 남아 있는 것이 없었다.
굶주린 사람들은 서쪽 성 안에서 인육을 발라내어 끼니를 채웠다.
시장의 장사치는 몰래 인육을 밀가루 빵으로 싸서 팔았다.
어떤 이는 인육을 절여서 노새나 말고기라고 속였다.
여러 사람이 성 밖에서 살아 있는 사람을 묶어서 죽이고 그것을 먹는 경우가 있었다.
또 어떤 아낙은 매일 저자거리에서 버려진 아이를 거두어
기른다는 핑계로 유괴하여 죽여서 먹었다.
이때 산동 일대에는 민간에서 공공연히 가게를 열어 사람을 도살하여 인육을 팔았는데,
매 근에 8푼으로 쌀고기(米肉)라고 하는데도 조금도 괴이하게 여기지 않았다."
...(중략).....
백성들이 기근 때문에 도적이 되었는데
지금은 부유한 사람마저 모두 굶주리니
마을들은 폐허가 되고 사람의 흔적이 사라져서
도적들이 곡물을 약탈할 곳이 없게 되었다.
결국 도적들이 도적들을 잡아먹고 도적이 되어도 도망치다 죽었다.
지금 전쟁이 일어나면 수 천 명의 머리를 베는데 병사들이 그 고기를 모두 저며 먹었다.
그러하니 다른 사람을 잡아먹는 사람 또한 다른 사람에게 먹혔던 것이다."
명나라 절강 가흥부 출신의 "왕포"가 남긴 기록
사족으로 이러한 17세기를 겪으며 유럽에 마녀사냥의 광풍이 몰아쳤듯
이 시기 아시아 역시 여성에 대한 유교적 억압이 더욱 강화되었지요
조선역시 이 시기 다를것이 없었습니다
흔히 "경신대기근(1670-71)" 이라 불리우는 기상재앙이 소빙기를 대표하고 있지요
17세기 들어 한반도에도 계속된 이상기후와 그로 인한 기근이 있어왔지만
경신대기근에 비할만한 복합적 요인의 대재앙을 겪어본적은 없었습니다.
현종실록 18권, 현종 11년 8월 21일 을사 1번째기사
좌의정 허적(許積)이 아뢰기를,
"기근의 참혹함이 팔도가 똑같아 백성들의 일이 망극하고 국가의 존망이 결판났습니다.
신이 밤중에 생각해 보니, 성상의 어질고 후덕하심이 결코 망국의 임금이 아니며,
신들도 볼품없으나 어찌 망국의 신하이겠습니까."
라고 고하며 울먹이면서 말을 제대로 하지 못하였다
이 기상재앙으로 인해 조선에서 최소 30만 최대 100만이 사망 했는데
이 시기 조선의 호적상 인구가 500만 이었다는 것을 감안할때 얼마나 큰 사건이었는지 느껴지시나요?
우리나라 현재 인구를 5천만이라 잡고 지금으로 환산하면
2년사이 최소 300만 최대 1천만의 국민이 사망했다고 설명하면 더 와닿을까요?
기근이라니까 단순한 흉년으로 생각하기 쉬운데
"기근"이라는 표현은 당시 조선인들이 겪었던 재앙중 하나에 불과했고
이 시기의 모습은 마치 "요한계시록"에서 묘사하는 세상의 종말과 같은 모습을 보였습니다
기록덕후였던 조상님들은 그 참상에 대해 매우 자세한 이야기를 남겨 놨지요
현종개수실록 22권, 현종 11년 5월 2일 정사 2번째기사
가엾은 우리 백성들이 무슨 죄가 있단 말인가?
아, 허물은 나에게 있는데 어째서 재앙은 백성들에게 내린단 말인가.
이런 생각을 하니 미칠 것같고 가만히 생각하면 몸둘 바를 모르겠으니
넓은 대궐이 무엇이 편안하겠으며 먹는 것이 무엇이 맛있겠는가?
가뭄, 홍수, 초대형태풍, 냉우, 한파, 쓰나미
지진, 운석낙하, 동물전(구제역으로 추측), 인간전(콜레라로 추측)
수천만~수억단위의 메뚜기,참새때의 습격, 맹수들의 습격 창궐
이게 단 2년동안 있었던 일입니다
전국 8도에서 흉년아닌 지역을 찾을수 없는 조선 역사상 유일한 사례이기도 했구요
현종개수실록 22권, 현종 11년 5월 2일 정사 2번째기사
팔도에 기아와 여역과 마마로 죽은 백성을 이루다 기록할 수 없는 정도였는데,
삼남(三南)이 더욱 심하였다.
그리고 물에 빠지고 불에 타서 죽고 범에게 물려 죽은 자도 많았다.
늙은이들의 말로는 이런 상황은 태어난 뒤로 보거나 들어본 적이 없는 것으로서
참혹한 죽음이 임진년의 병화보다도 더하다고 하였다.
그러나 수령이 보고한 것은 죽을 쑤어 먹이는 곳(구호소)에서 죽은 자만 거론하였을 뿐이고
촌락에서 굶어 죽고 도로에서 굶어 죽은 자는 대부분 기록하지 않았다.
심한 자는 진구를 잘하였다는 이름을 얻으려고 서로가 경쟁하여 덮어 두고 사실대로 보고하지 않았으므로
계문한 숫자는 겨우 열에 한둘이었다.
한파와 가뭄,그리고 그에 이은 홍수가 극심하여
농업을 포기한 상태가 되었으며(7월에 눈이 내림)
바다역시 계속된 폭풍으로 어업, 해상교통이 마비됩니다
그뿐 아니라 꼴에 여름이라고 태풍이 오긴 왔는데
기온이 너무 낮으니까 태풍이 흩뿌리는게 비가 보통 비가 아니라
영하에 가까운 냉우라서 맞고있으면 저체온증으로 사망할 지경이었습니다
그뿐아니라 위력역시 초강력 태풍급이라 사람이 바람에 공중으로 몇십미터 날려갔다가
떨어져 죽었다는 기록도 있죠
동물전(아마도 구제역)으로 황해도에서만 소 10만마리가 몰살되었고
사슴등의 야생동물 역시 동물전으로 씨가 마르면서
먹이감을 잃은 호랑이, 표범등의 맹수들이 사람을 덥치는 사례가 급증합니다
(이 시기 소의 개체수가 격감하여 이후 몽골에서의 소 수입이 크게 늘게 됩니다)
현종개수실록 24권, 현종 12년 6월 4일 계미 5번째기사
대사헌 장선징 등이 상차하였다. 대략에 이르기를,
서울 내외에 굶어 죽은 시체가 도로에 이어지고 있습니다.
혹은 부모 처자가 서로 베고 깔고 함께 죽은 경우도 있고,
혹은 어미는 이미 죽고 아이가 그 곁에서 엎드려 그 젖을 만지며 빨다가 곧이어 따라 죽기도 합니다.
울고 불고 신음하는 소리에 지나가는 자도 흐느낍니다.
더욱이 전은 날로 치솟아 열풍이 불꽃을 일으키는 듯한 기세입니다.
병에 걸리지 않은 사람이 드문데, 걸렸다 하면 곧 성 밖에서 죽습니다.
사방이 이라 온통 움막을 지어 끝없이 펼쳐지니, 참혹한 광경과 놀라운 심정을 이루 말할 수 있겠습니까.
서울 밖의 죽어가는 참상은 이미 전쟁에 비길 바가 아닙니다.
현종실록 19권, 현종 12년 2월 15일 정유 2번째기사
집의 이단석(李端錫)이 나아가 아뢰기를,
"진휼하는 곳에 있던 굶주린 백성의 주검을 수레로 실어내는 일이 잇따라 보기에 참혹한데,
그 가운데에는 혹 목숨이 아직 끊어지지 않았는데도 싸잡아 (매장하려) 실어내는 일이 있습니다.
홍중보가 아뢰기를,
"신이 접때 목숨이 아직 끊어지지 않은 사람의 발에 줄을 묶어 논 것을 거리에서 보았습니다.
이것은 동네 사람이 끌어내기 위해 미리 만든 도구인데 매우 불쌍합니다."
하니, 상이 슬퍼하였다
기근으로 사람들의 면역력이 약해진데다
이어진 전국적인 홍수로인해 창궐한 염병(콜레라)으로 엄청난 사람들이 죽었습니다
전은 귀천을 따지지않아 재상급만 10여명이 사망할 정도였죠
이런 상황이다보니 서울의 경우 확인도 제대로 못한체 한번에 수백명씩 시외곽에 집단매장했고
그로인해 훗날 영조대에 성벽개축공사도중 이름모를 수백구의 백골이 발굴되었다는 기록이 남아있습니다
물론 그것도 행정력이 살아있을때의 이야기였고
나중에는 묻을 인력도 없어서 시신을 방치하게 되고
비가 내리면 청계천등 하천들을 통해 수많은 시신들이 떠내려가는 참상이 보여집니다
또한 파발꾼이 전으로 대량사망하면서 국가 기간통신망이 마비되어
제대로된 지방상황파악이 안되는 사태에 직면합니다
예를 들어 제주에서 한양까지 연락은 7일~15일 가량 걸리는게 일반적이었으나
이 당시는 제주-한양까지 연락에 3개월이상 소모되게 되어 구호적기를 놓치는 요인이 되기도 합니다
모든 국가재정을 백성구호에 투입하다보니
관리들 녹봉이 모두 체불되어 관리들도 영양실조상태에 빠져 행정망도 마비되었으며
왕조차 나물반찬 3가지로 밥을 먹습니다
기근 첫해에는 몇몇 부대를 해체하는등 국방비를 줄이고 내탕금까지 모두 털어 구호에 나섯으나
2년째 역시 전해 못지않은 상황이 재현되자
결국 2년째엔 국가재정이 모두 고갈되어 중앙정부차원의 구호를 포기하게 됩니다
현종실록 19권, 현종 12년 2월 15일 정유 2번째기사
제주 목사 노정(盧錠)이 치계하기를,
"지금 섬이 온통 굶주리고 있는 백성이며,
얼거나 굶주리거나 여역으로 죽은 자가 이미 4백 37인에 이르렀습니다.
그런데 이제부터는 공사간의 곡식이 다 비어서 구제하여 살릴 방책이 없으니
구호 미곡이 빨리 들어오지 않으면
수만의 죽어가는 목숨이 장차 눈앞에서 끊어지게 되었습니다.
매우 근심되고 몹시 답답하여 어찌할 바를 모르겠습니다."
하였다.
현종실록 19권, 현종 12년 6월 15일 갑오 2번째기사
전라 감사 오시수(吳始壽)가 치계하기를,
"민간에 밥짓는 연기가 끊어진 참상이 봄보다 훨씬 더합니다.
쓰러진 주검이 길에 즐비하고 낯빛이 누렇게 뜬 백성이 수없이 떼를 지어 문을 메우고
거리를 메워 살려 달라고 울부짖고 있으며
맨발에다 얼굴을 가리고 살려 달라고 애걸하는 사족(士族)의 부녀가 날마다 관아 뜰에 가득합니다.
곡물이 떨어지고 나면 이어서 소금과 간장을 주었고
소금과 간장이 떨어지고 나면 또 해초류를 주는 등
관아에 저축된 것으로서 입에 풀칠할 만한 것이면 모두 긁어 썼지만
마침내 속수무책인 채 죽는 것을 보고 있을수밖에 없는 상황이 되었습니다.
그러다보니 사람들끼리 잡아먹는 사태가 코앞에 닥쳤다고
중앙 정부에서 제발 도와달라고 지방관들이 눈물로 호소하는 보고서가
조선왕조실록에도 엄청 많이 남아있죠
경신대기근의 초중반 중국에서 식량을 수입하거나 구호받자는 소수의견도 있었으나
대부분의 관료들은 청나라에게 우리의 약점을 잡히는 것을 두려워하고
중국측에서 식량을 수집, 운송하는데 걸리는 시간이면
이미 우리나라는 보리농사가 끝나서 기근이 종식될거라는 낙관론으로
일단 버텨보자는 의견이었으나
다음해도 계속된 기근으로 조선은 치명타를 입게 됩니다
그 교훈덕에 20년후 닥친 을병대기근때는 발빠르게 식량수입을 개시했으나
경신대기근을 거치며 허약해진 국가재정과 국민영양수준 때문에
경신대기근 이상의 피해를 입게 되기도 하죠
또한 경신대기근은 단지 단발성 재해로 끝난것이 아니라
이 일을 겪은후 온돌이 전국적으로 보급되고 난방이 힘든 다층한옥이 사라지게되었으며
장옷과 같은 방한용 의류가 전국적으로 퍼지게 되는등
이후 우리 문화에도 큰 영향을 미치게 된 사건이라고 할 수 있으나
의외로 자세히 알려지지 않은 사건이기도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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