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요 며칠 인적 드문 날들 계속되었습니다 골목은 고요하고 한없이 맑고 찬 갈림길이 이리저리 파여 있습니다 나는 오랫동안 걷다가 지치면 문득 서서 당신의 침묵을 듣습니다 그것은 당신이 내게 남긴 유일한 흔적입니다 병을 앓고 난 뒤의 무한한 시야, 이마가 마르는 소리를 들으며 깊이 깊이 파인 두 눈을 들면 허공으로 한줄기 비행운(飛行雲)이 그어져갑니다 사방으로 바람이 걸어옵니다 아아 당신, 길들이 저마다 아득한 얼음 냄새를 풍기기 시작합니다
- 서대경, 벽장 속의 연서

저 노예상에게서 꽃냄새가 난다
허리를 구부려 그 독한 냄새를 맡는다
아, 기억난다 내 몸에서 노예의 냄새가 난다
꽃 속에 갇혀 사자가 울부짖고 있다 그때,
우리는, 사자가 활짝 피었구나, 라고 말한다
꽃은 활짝 핀 폐허,
우리는 그 속에서 잃어버린 왕관을 찾는다
이 꽃은 누구의 붉은 머리일까, 한 줄기 의혹처럼
불쑥 고개를 치켜드는 붉은 말들
그렇게 붉게 물들었다, 말까지도
빨갱이로,
물들여 말을 처형하기 위하여
동물원 창살 너머 꽃 한 송이
꽃에 먹이를 던진다
꽃에서
사자로 덥석, 비약하는 말
말은 얼마나 먹고 싶은 욕망인가
동물원 창살 너머 꽃 한 마리
- 송찬호, 동물원 창살 너머 꽃 한 마리

몸이 아프면 슬쩍 달라붙어 당신 손을 잡고 그 어깨에 기대 밥 한술 받아먹고 싶다 사랑한다고 사랑받고 싶다고 말을 못해 무슨 병에라도 옮아서는 곧 떨어져버릴 듯이 매달려 있고 싶다
- 이향, 사과

저 꽃들은 회음부로 앉아서
스치는 잿빛 새의 그림자에도
어두워진다
살아가는 징역의 슬픔으로
가득한 것들
나는 꽃나무 앞으로 조용히 걸어 나간다
소금밭을 종종걸음 치는 갈매기 발이
이렇게 따가울 것이다
아, 입이 없는 것들
- 이성복, 아 입이 없는 것들

없는 네가 가장 아름답다
일생에 단 한번 붉은빛 새순을 틔우고 비틀비틀 떠나는 자여, 어디에서 비척이며 연명하던 행려병자이기에 부끄러움 모르고 알몸으로 섰는가 가시 박힌 수레바퀴를 굴리며 네가 다가온다 오늘 세계는 물그릇처럼 아프다 밤의 태양은 두꺼운 이불을 뒤집어쓰고 두려워 울고 있다 홀로의 좌표들을 풀어놓고 너의 입술을 만지는 일은 세로로 여닫힌 괄호를 더듬는 일 같았다 네 생에 조금 관여해보고 싶었을 뿐인데, 얼음을 꽉 쥐면 슬픔에서 뜨뜻미지근한 물이 흘러나온다 너는 천천히 젖어간다 왜 돌아가는가, 물어볼 적마다 꿈의 언저리에서 자꾸만 두 발이 굳어갔다 수은이 흐르는 강을 건너며, 오늘은 등(燈)을 켜들지 말자 벼랑 근처에서 머뭇거리는 너의 눈가에 별들이 가득 고였으니 한 밤을 버리고 굳어버린 매듭을 얻어 불행의 화관을 쓰게 될지라도
휘발하는 것만이 우리의 경전이다
네가 선물해준 거울은 아름다웠으나
아무리 닦아도 얼굴이 떠오르지 않았다
- 이혜미, 제3통증

그러고 보니 나는 어느덧 덜그럭거리는 철물점이 돼가고 있었다 그렇다고 내 가게가 크기를 늘려왔던 것은 아니다 그저 흘러들어온 것들과 때로 애써 모은 것들, 더러는 쓴웃음으로 떠안아야 했던 것들이 누런 고철들이 되어서 빈 곳을 남기지 않았던 것뿐이었다 잘못 벽에서 튕겨져 나온 굵은 못처럼 그때 네가 내 심장으로 날아 들어온 것은 어쩌면 우연만이 아니었을지 모른다 그리고 너는 너를 쫓는 숙명의 쇠망치까지 불러들였다 못과 쇠망치가 쩡쩡 철물점의 덜그럭거리는 일상을 들어엎는 소리에 나의 얇다란 심장은 곧 멎어버릴 듯 빨라지고
그래, 나를 부수며 계속 너를 던져다오
내 네게 꼭 맞는 무덤이 되어주마
너와 내가 서로 몸을 으스러지게 끌어안고 한무더기 고철로 변해간들 어떠랴
- 이선영, 사랑 그것

언젠가
얇은 담요 사이로 그녀의 맨발을 본 적 있다
기어이 가는 봄날의 꽃잎처럼
살에 감기는 바람결에도 색을 잃을까, 야위어갈까
애를 태우던 그녀의 살빛
살이라는 말처럼 연한 발음이 있을까
또 발이라는 시린 말은 어떻고
이국의 풍속사에 모란꽃 아래서의 죽음이야말로 도도한 풍류라는 기록이 있다
그날의 풍류는 가는 발목에 혀의 문장을 새겨넣은 일
꽃의 씨방처럼 부풀어오른 건 그녀였을까
그녀라는 방향으로 흐르던 바람이었을까
지나간 걸음걸이를 추억한다
또옥 똑, 봄의 운율로 걷던
그녀는 살아서 나비의 후생이기도 했을 것
종종 바람에 체한 나비처럼, 헛딛는 때가 있어
그 모란 줄기 같은 발목을 삐끗하기도 했던 그녀
호ㅡ 하고 빚어낸 숨결을 불어넣어
부기(浮氣)를 다독여주곤 했었다
마침의 말에까지 탐미를 반성하지 않은 그녀
비단 습신에 모란 무늬를 수놓아 신겨달라
비단에 핀 모란이 얼마나 색스럽다 한들 그녀의 시린 발은 어쩔 수 없겠다
모란 향이 눈에 밟혀 발을 헛디디면 어쩌나 애면글면하는 날들의 이력
발음되지 못한 문장들은 바람의 습기가 될 것
습신의 끈이 봄꿈처럼 스르르 풀린다 해도
고쳐 매줄 수 없는 길에 서 있을 그녀
돌아오는 길을 지우며 걷는 걸음의 배후는
피는 법을 잊은 꽃의 배후처럼, 허공이 알맞을 것
- 이은규, 모란을 헛딛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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