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전 글 : https://www.instiz.net/name/32328418?category=3
20XX.XX.XX
살다보니 이런 날도 다 오게 되네ㅋㅋㅋ
…아, 잠깐만ㅋㅋㅋㅋ 근데 이거 진짜 막상 쓰려니까 오글거려ㅋㅋㅋㅋ.
이런 걸 써본 적이 있어야 말이지. 말이 안 맞아도 대충 그렇다하고 넘겨.
그나저나 진짜 시간 한 번 엄청 빠르네. 이걸 쓰고 있는 며칠 뒤는 네가 그렇게 바라던 소원이 이뤄지는 날이니까.
네 입이 그렇게 마르도록 말하고, 내 귀가 그렇게 닳도록 들었던 그 일, 네가 새하얀 드레스 입고 새하얀 버진로드를 걷는 일 말이야.
너는 무슨 노인,네처럼 전통 결혼식 올리고 싶다고 했었는데 결국 서양식으로 식을 올린다고 엄청 투덜거렸지. 야, 그래도 다행이라고 생각해. 시로무쿠 입었으면 너 오리처럼 뒤뚱뒤뚱 걸었을거 아냐.
분명 넌 아니라고 잡아떼겠지만, 예전에 같이 마츠리 갔을 때 어색하다면서 유카타를 입고도 뒤뚱뒤뚱 걸어서 결국 내가 업고 다닌 거 다 기억나거든? 발뺌하지 마라.
…뭐, 그 유카타도 잘 어울렸던 너라면 나름대로 시로무쿠든 드레스든 다 어울리긴 어울릴테지만.
아-, 청첩장 받을 때까지만 해도 실감 안났는데, 이제서야 와닿는거 같다. 네가 결혼 한다는게.
진짜 신기하다. 예전만 해도 요 쥐방울 만한 걸 누가 데려가나 싶었는데 그런 취향을 가진 사람이 또 있다니. 결혼하면 제일 먼저 네 남편 꼭 안과 데려가라.
와, 근데 쥐방울하니까 생각나네ㅋㅋㅋㅋ 고등학교 때. 너는 기억나냐. 아마 다 잊어버렸겠지.
토목과에 닝이라는 어떤 키작은 여자애가 자기 키만한 목재 들고 실습실로 걸어다닌다면서 말 많았었는데. 인형같이 작고 귀엽댔나 뭐랬나…
하도 인형 인형 거리길래 궁금해서 슬쩍 내다 본 실습실 밖 복도에는 나메츠랑 얘기를 하며 목재를 옮기는 네가 있었어.
쥐방울 만한 게 땀 뻘뻘 흘리면서 뽈뽈 걸어다니는 게 뭐가 귀엽다고 토목과 인형 같은 별명이 붙은건지……
아, 그래, 장난이야 장난. 그냥 다 아는 거 솔직하게 말한다.
솔직히 키도 작은 게 열심히 한답시고 이리저리 돌아다니는게 조금 귀엽긴 했다. 그래. 그때부터 자꾸 알게 모르게 시선 끝으로 너를 은 것도 사실이고.
그랬다고는 하지만 그래봤자 반이 같았냐, 과가 같았냐.
마주칠 일도 더럽게 적어서 일부러 마주치려 노력하지 않는 이상은 만나기 힘들었었지. 이게 뭔 말이냐면, 너 진짜 둔했었다고. 이 바보야.
나메츠가 왜 너를 어중간하게 2학년 때부터라도 배구부 매니저를 같이 해달라고 했을 것 같냐.
주장도 아니던 내가 왜 굳이 쉬는 시간마다 꼬박꼬박 나메츠를 찾아가서 그 녀석을 귀찮게 했을 것 같아?
그래. 그 부자연스러운 행동들이 다 너 때문이었다고.
어쨌든 3년 내내 같은 반은 못될 게 뻔한 거 부활동이라도 같으면 어떻게든 얘기는 할 수 있겠지 싶어서 나메츠 녀석한테 부탁했었어. 나 그거 때문에 한달 용돈을 나메츠한테 쏟아부은 거 아냐.
거기다가 나메츠 녀석. 치사하게 부원들한테 말해버린 탓에 한동안 얼마나 놀림 받았는지 몰라. (특히 카마사키 상이 엄청 웃어대서 얼마나 열받았는지 아냐.)
(아, 그래도 나중엔 그때까지만 해도 나메츠랑 내가 오해를 받았었다니 차라리 말한게 낫다는 생각하긴 했다.)
쨌든 그런 노력 끝에 결국 네가 매니저로 입부했지.
그날 만큼은 다른 사람들이 뭐라고 놀리든 딱히 대꾸하지 않았어. 뭐, 사실이었으니까. 기분이 좋았던건. (아, 근데 다들 그렇게 대놓고 놀리는데도 넌 아무것도 모르더라. 얼마나 눈치가 없던 건지.)
그 뒤론 알다시피 뭐. 나름 2년 동안 잘지내지 않았나 싶은데?
나는 재미있었거든. 꽤. 경기든, 합숙이든, 뭐든간에. 너랑 함께한 시간이 많았으니까.
아-, 야. 닝. 새삼스레 이런 생각을 하니까 말하는 건데 내가 너를 좋아하는 마음이 내 생각보다 더 컸던 것 같다. 그래. 그랬었지…….
그렇게 너를 생각하는 마음 밖에 없었는데, 그런데,
왜 우린 지금 이렇게 되어버린 걸까.
나중에, 정말 나중에 알게 되었어. 졸업한 부원들끼리 술판을 벌이던 날. 네가 그 소식을 우리에게 전한 그 날. 청첩장을 받게 된 그 날. 나메츠 녀석이 취해서 몸을 못가누는 걸 데려줄 때, 말하더라. 너 또한 나와 별반 다르지 않았다는 것을. 너 또한 어렴풋이 눈치채고 있었다는 것을. 순간 머리가 멍해지고, 정신이 들었을 땐 허탈감이 나를 덮쳐 오더라. 그 말을 들은 이후로 너를 볼 자신이 없었어. 금방이라도 나는 일을 쳐버릴 것 같았으니까.
…닝, 만약에 말이야. 우리가 그 날 그렇게 싸우지 않았더라면, 그렇게 서로를 등지고 각자 갈 길을 가지 않았더라면, 최소한 내가 먼저 사과했더라면 우리 사이는 달라지지 않았을까.
어, 솔직히 그런 생각도 했어. 그깟 자존심이 뭐라고. 한번쯤은 버려줄걸.
매번 너는 나를 위해 쉽게 버려주던 그 자존심. 하지만 쉽지 않았을 그 일. 그거 한번쯤은 해줄걸.
아이, 씨. 야. 그냥 위에 써놓은 건 신경쓰지마. 그냥 헛,소리 했을뿐이니까. 어, 그냥. 이루어질리 없는 일 뿐이야.
아 괜히 나 혼자 감성팔이해버렸네. 이게 뭐냐 진짜. 좋은 말만 해도 모자랄 판에 구질구질하게 전하지도 못할 편지나 쓰고 있고.
와, 야. 근데 생각해보니까 너 나보다 성격 나쁜 거 아냐? 너 다 알면서도 청첩장 주는 건 무슨 심보인데. 거기다 거드는 말은 가관이더라.
…됐어. 말을 말자. 말해봤자 너는 그 어린 날처럼 얄미워보이는 표정을 지으며 도망가겠지. 나는 또 그때처럼 아무 말도 못할테고. 지가 예쁜 건 알아서는.
뭐, 청첩장도 받았으니 기쁜 마음으로 축하해 주는게 맞는 거겠지. 그때는 워낙 정신 없어서 말 못했었는데 결혼, 축하해.
…진심으로 축하할 마음을 가질 때까진 꽤 오랜 시간이 걸리겠지만. 마지막 이 말만은 진심이야.
…행복해라, 사소한 일로 널 울리지 않는 그 사람과 함께, 그리고 아이와 함께.
추천 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