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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개가 자욱한 날. 나를 옥죄어 오는 것 같은 습한 공기를 떨쳐내려 남색 우산 하나를 들고는 문밖을 나선다. 아직 젖지 않은 아스팔트 바닥을 봤다. 그제야 내가 어제 산 하얀 운동화를 신고 있다는 것을 알았다. 다시 집으로 돌아갈까 생각도 했었지만, 내 운동화가 나를 거리로 이끌었다. 무거운 발걸음으로 더 무거운 공기를 헤쳐나갔다. 그 어느 것 하나 무겁지 않은 것이 없었다. 장우산도, 나의 마음도. 세상은 온통 무거운 것투성이였다. 거리에 떨어진 노란 꽃잎 한 장도, 나에게는 무거웠다.
아무도 걷지 않는 거리, 나는 주위를 살피며 꽃잎을 주워들었다.
멀리서 볼 때는 예뻐 보였는데 습기를 머금어 축 늘어진 잎이 막상 집어 드니 초라해 보였다.
.
"안녕, 닝이라고 했나?"
"으응,"
처음엔 떨떠름한 시작이었다. 내가 알기론 너는 오래도록 다른 사람들과 비슷한 관계를 맺어온 사람이었다. 비슷한 관계에 질려 자신의 욕구를 충족시킬 다른 사람을 찾으러 온 걸까, 하는 생각이 들어 경계심이 앞섰다. 나는 네가 찾는 사람이 아닌데. 어색한 분위기. 내 쪽에서 더 이어갈 말은 없었다.
"내 이름 알고 있어? 내 이름은-"
"알아."
그래? 알고 있구나. 그는 나를 보며 웃어주었다. 다른 관계를 위해 나를 찾아왔다기엔 너의 미소는 너무나도 평소와 같았다. 하루에도 백 번쯤 볼 수 있는, 가치 없는 웃음이었다. 그래서 나한테 말을 건 이유를 도무지 종잡을 수가 없었다.
"네가 나한테 말을 건 이유를 모르겠어. 무슨 일이야?"
솔직해지기로 했다. 이런 상황에서 말을 빙빙 돌려봤자 어떤 말이 더 오가겠는가. 본론으로 빨리 들어가는 편이, 그도 편할 것이다. 아니 사실은 내가 편했다. 이런 사람과 있어봤자 나오는 건 뒷말밖에 없을 터였다. 벌써부터 나에게 꽂히는 수많은 사람의 시선. 불편했다. 나와 이 사람은 이렇게 다른데.
"그냥 닝이랑 얘기해본 적이 없는 것 같아서. 무슨 일이 없어도 말하는 사이가 되고 싶었어."
내 앞의 의자에 앉아 내 책상에 팔을 괴곤 나를 쳐다보는 너. 불안감이 엄습했다. 나는 이런 다정에 약했다. 그걸 이 아이도 알고 있을지도 모른다. 나를 이용하려는 걸까? 초조함에 손바닥에 땀이 났다. 나는 애써 입꼬리를 올렸다. 모르는 척 쳐내는 게 나의 정신 건강에 좋았다. 아, 그렇구나. 그렇구나 라는 말은 그런 부분에서 제격인 말이었다.
나의 대응에도 불구하고 그는 자리를 떠나지 않았다. 나를 빤히 쳐다볼 뿐이었다. 그의 시선이 나에게 머무는 시간이 길어질수록, 주먹을 꾹 쥔 나의 손에 손톱이 더 깊게 파고들었다. 다른 거라도 하면 그냥 가겠지? 나는 읽고 있던 책의 책장을 넘겼다. 그는 그런 내 행동에도 아랑곳하지 않았다.
"무슨 책 읽어?"
"이거 그냥 소설책."
"장르는?"
"추리 소설이야."
"재밌어? 그러면 나도 나중에 빌려 봐야겠다. 학교 도서관에 있어?"
부러 말을 끊는 내 마음을 아는 건지 모르는 건지 그는 아주 자연스럽게 말을 이어갔다. 나는 종이 치길 간절히 바랐다. 쉬는 시간은 이럴 때만 길었다. 종은 내 마음을 모르는 게 분명했다.
나는 이것이 그와 대화한 처음이자 마지막 날이길 기도했다.
내 기도는 한 번도 이뤄진 적이 없었다.
.
"...그래, 그랬다니까?"
"진짜 눈치 없다..."
학교는 작은 사회였다. 치졸하고 더러운 사회. 그의 시선을 받았다는 이유로 학교의 대부분의 여학생을 적으로 두게 되었다. 그는 그걸 아는지, 모르는지 나에게로 와 말을 걸었다. 하교 시간도 마찬가지였다.
"닝, 나랑 같이 집에 가자."
"너 혼자 가도 되잖아. 네 친구도 있고."
"오늘은 나랑 안 간다고 해서..."
그래, 둘만 있으면 나도 더 직설적으로 말하기 편할 것이다. 그러니까 이건 기회였다. 그를 완전히 끊어버릴 기회.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밖에는 비가 내리고 있었다.
"비 때문에?"
"꼭 그런 것만은 아닌데. 닝은 우산 있어?"
"응."
"그러면 같이 쓰자."
오늘은 아침부터 종일 비가 왔다. 나는 아침에 그의 손에 들려있던 남색 우산을 기억하고 있었다. 그것이 그의 가방 어딘가에 들어있을 거라는 것도 알고 있었다. 하지만 왜 사실대로 말할 수 없을까. 왜 네 우산을 가져왔으면서 쓰지 않냐고 할 수 없는 걸까. 분명 주변의 시선 때문에 그러는 걸 거야. 나는 우산을 폈다. 둘이 쓰기엔 조금 작은 우산이었다.
"어디로 가?"
"너희 집은 어디인데?"
"그건 알아서 뭐 하게. 네 집에 먼저 가야지."
"...그렇네."
너는 머쓱한 듯 약간의 공백 후 답을 했다. 그렇지만 궁금한걸. 나도 네가 왜 이렇게 나한테 다가오는 건지 궁금한걸... 이라는 말은 속으로 삼키고 집 주소를 말했다. 너는 아까의 떨떠름한 미소를 없애고 환한 미소를 보였다. 나도 그 부근인데. 네 집까지만 데려다줘도 돼. 그의 말에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비가 와서 그런지 그에게서 나는 향기가 더 진하게 느껴졌다.
"너 무슨 향수 써?"
"오늘은 향수 안 쓰고 왔는데. 왜, 나한테서 무슨 냄새 나?"
"아니, 꽃향기가 나길래."
"...아, 그래? 봄이라서 그런가 보다."
길가에 꽃 한 송이 제대로 보이지 않는데 그는 그렇게 말했다. 이번에도 한 박자 느린 대답이었다.
나는 바닥만 보며 계속해서 앞으로 나아갔다. 어디선가 노란 꽃 한 송이가 날아와 내 발에 떨어졌다. 나는 그것을 주워들었다.
국화는 가을에 피는 거 아니었나?
응, 국화는 가을에 피지.
고개를 들어 그를 보자 내가 지금껏 보지 못했던 씁쓸한 표정을 하고 있어서, 다시 앞을 볼 수밖에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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