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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조회 2525l 5
이 글은 2년 전 (2022/4/05) 게시물이에요
관심 그만 받기를 설정한 글입니다

유난히 이성에 관심 없었던 내가 덜컥 좋아하는 사람이 생겨버려서 겁이 났던 열 여섯 살. 

내가 여자를 좋아하는 것도 아니라 남자를 좋아한다는게 너무 겁이났지. 

태양은 하늘 끝에 걸려 운동장을 푹푹 찌우던 그 해의 중간고사 기간. 

국사 책 한 페이지를 못 넘기고 내가 만약 남자를 좋아하는걸 받아들이면 우리 부모님은 어떻게 되고 

내 결혼은 어떻게 되고 내 자녀.. 심지어 내 손주들은 못보는건가 하는 한 세기 적인 고민까지 했던 모든게 푸르던 그 여름. 

내 만개한 고민들을 별안간 지게 할 만큼 너는 참 근사한 애였지. 


 

그 해 여름 중간고사 때문에 학원까지 늦게 있다가 돌아가는 길에 

너는 항상 학원 버스를 타고 귀가를 했잖아. 어느 날은 머리가 너무 아프다고. 

머리 좀 식힐겸 나랑 가는 길이 같다며 같이 가자고 했지. 

같은 반도 아닌 애가 덜컥 말을 걸어버리니, 너무 좋다. 네가 가는 길이 삼천리라도 나는 좋다는 내 마음의 말은 커녕 

어리버리하게 아무런 대답을 못했지. 그런 내 발을 맞춰 너는 걷기 시작했고, 우리는 왜 서로 문과를 지향했고 이과를 갔는지 

말만 하고 각자 과목의 푸념을 늘어놓았는데. 지금 생각해보면 그게 우리의 공통 관심사였잖아. 학업 


 

중간고사가 끝나고, 너는 나에게 영화 한 편을 보러 가자고 했지. 

나는 내가 진학해야할 명문고를 가려면 지금부터 꿈뻑 죽었다 노력해도 모자랄 판국인데 

한가로이 영화나 볼 시간이 없어서 학업의 이유로 거절을 했는데, 너는 그 학업의 이유를 빌미로 

여름방학 동안 같이 독서실을 다니자고 했어. 나는 한참을 고민하다가 나는 혼자 공부하는게 좋다고. 

누군가와 함께 한다고 생각하면 시간을 맞춰야 할거 같고 나는 내 근처의 독서실이 편하다고 했어. 

너랑 같이 독서실을 가게 되면, 쉬는 시간만 기다려질거 같고. 생각보다 빨리 독서실을 나와 너랑 더 많은 

이야기를 하고 싶을거 같다는 내 속 말을 숨기려고 다소 매몰차게 말을 했는데 


 

그런 너는 우리, 좌석은 떨어져 앉자고. 네 집 근처면 너도 좋다고 그랬지. 

그렇게 우린 함께 여름방학을 보냈고, 네 덕분에 독서실 가는 길이 즐거워 성적도 말도 안되게 좋아졌지. 

그 해, 크리스마스 이브에, 너는 나랑 하고 싶었지만 결코 못했던 것 중 하나인 영화. 영화 한 편을 함께 보자 그랬지. 

아니 우리가 무슨 연인도 아니고. 나는 조금 이상하게 느꼈지만 이런 내 마음이 너한테 닿기 전에 

너는 누나에게 부탁해서 그 당시 예매하기도 어렵던 영화 아바타를 이미 두좌석 예매를했잖아 

너는 영화를 보여줬고. 나는 그 때 밥도 사고. 너는 카라멜 마끼아또를. 나는 핫초코도 아이스가 된다는걸. 그 날 처음 알았지. 

그리고 너는 다음 날인 내일도 놀자고 하는거야. 크리스마스에. 


 

나도 좋다고 하고. 약속을 하고 너네 집에 갔는데. 가족들이 아무도 없었잖아. 너는 우스갯소리로 크리스마스여서 

산타할아버지가 일손이 부족해 다 데려갔다는. 아직도 생각해보면 어이없고 너무 귀여운 말을 했어. 

가족들은 크리스마스에 친척들과 예배도 드릴 겸 밤 늦게 오신다고. 

나를 지금도 너무 예뻐해주시는 네 어머니께서 주신 용돈으로 우리는 짜장면도 먹고 

집 근처에가서 스파게티도 먹고. 아이스 핫초코도 같이 나눠 먹었지. 집으로 돌아와 

너는 나한테 "토탈 이클립스" 라는 영화를 보여줬어. 딱 봐도 네가 따분해 할 영화인데 

나를 위해 그 영화를 알아본거고, 나는 아직까지도 그 영화가 내 인생 영화로 손꼽잖아. 

그 영화 내용은 어쩐지 처음 봤을 때, 성인이 됐을때, 그리고 방금 봤을 때. 모두 다르게 느껴지네. 

그 때는 그 영화가 왜인지 되게 센서티브하면서도 야한 영화 같았지. 


 

그리고 그 날 밤 눈이 펑펑 와서 우리는 밖으로 나가 벤치에 앉아 눈이 내리는걸 하염없이 바라만 봤지 

그 때 난 처음 알았어. 보고 싶어도 보고 싶다는 그 마음이 무엇인지를. 

그리고 내 옆에 네가 있다는게 너무 소중해서 고맙단 말을 했잖아 그런 나를 보며 너는 왜냐고 물었고 

나는 항상 네게 내 마음 반대로 말했어서 그 날 만큼은 솔직하고 싶더라고. 그런 용기가 났어. 

그래서 그냥 나는 있는 그대로 말했지. 차마 네 눈은 못 바라보고. 

너는 너무 소중해서 가끔은 너랑 싸우고 우리가 연락을 안하게 되면 어떡하지 그런 고민까지 한다고 했어 

너는 환하게 미소 지으며 나에게 너는 네가 그렇게 좋냐 물었지. 나는 말없이 고개만 끄덕였지. 

그리고 너는 주변을 돌아보다가 갑자기 내 볼에 뽀뽀를 했어 

너무 놀란 나는 내가 응시한 정면을 쭉 바라볼 수 밖에 없었는데 너는 두번이고 세번이고 내 볼에 뽀뽀를 했지 

내리는 눈처럼 얼어붙어 있었는데, 너는 날 툭툭 치면서 '야, 야...' 나는 뭔가 싶어 너를 바라봤는데 

또 두리번 거리더니 이번엔 입술에 뽀뽀를 했지. 나는 믿기지 않아 눈을 말똥말똥 뜨고 있었는데 

너는 입술을 꾸물꾸물 움직이는게 당혹스러워 내 입술을 꾹 닫으니, 감았던 네 눈과 내 눈이 가까이서 마주쳤고 

너는 뽀뽀를 하면 눈을 감고 있어야 한다며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지. 


 

그래. 우리 첫 입맞춤. 

사귀자는 말도 없이. 애인하자는 말도 없이. 그냥 나는 니가 좋아. 나도 니가 좋아. 이 말로 우리는 

특별한 사이가 되었고, 고등학교에 진학하고, 수능을보고, 대학교를 가고, 군대를 가고, 전역을 하고, 취준생에 

취업난을 겪고 취직을 하고, 자리를 잡고 차를 뽑고. 제일 먼저 너를 데리고 한강에 데려가고. 

내 10대는 너로 시작했고, 20대는 네가 없으면 설명이 안되는 부분이 꽤 많다. 

너는 내 가장 오래된 친구이자 연인이고, 내가 살아온 역사이며 너는 그 반증이고 

내가 내일이 없을 것처럼 무너지고 다시 하늘을 우러러 재건하는 모든 과정이 네 눈에 기록되어 있어. 

우리 참 많은 일이 있었다 그치. 우리 동갑내기이지만 세월이 흐르면서 삶이 주는 격차는 한 없이 견고하기만 하고. 

한 명이 도와주려해도 허물 수 없는, 서로의 암묵적인 배려. 서로 너무 잘 알아서 배려가 짐이 되는 사이. 


 

나는 있잖아. 모든게 푸르던 그 날 열 여섯살 때. 

네가 나한테 해줬던 것들. 먼저 말을 건네고, 함께 걷고, 독서실을 다니고, 영화를 보고, 밥을 먹던 

다 네가 나를 위해 맞춰줬던 것들을. 오늘 그 날 그 때가 아직도 푸릇푸릇하게 살아있다는 걸 알았고, 그리워. 

그 때가 그립다는 것은. 철 없던 우리의 시절이 그립다는 것은.. 

그리고 지금 우리의 관계가. 

어쩌면 10년차 커플이 느끼는 권태로움인지. 

우리 둘다 열심이고 아둥바둥이었지만, 나에게 잘 따라주던 기회와 운의 격차가 

너와 나를 사람 대 사람으로서 거리를 두게 만들었지. 

그제도, 어제도, 오늘도. 한 없이 바쁘고 지쳐가고 쇠해져만 가는 너를. 

내가 굳건히 일으켜 세우고, 먹이고, 입히고, 웃겨주고 싶지만 

그 조차 피곤한 너를. 우리 꼭 오래된 친구 같아. 


 

아직도 내 눈엔 멋지고 근사한 네가 있고. 

네 눈엔 아직도 근사하고 멋진 내가 있지. 

그런데 우리가 느끼는 지금의 권태로움은 여태 겪은 모든 것들과는 확실히 다르다는 것을. 

너는 우스갯소리로 나랑 연동이 되어있는 것 같다고 그랬잖아. 

내가 느끼는 지금이 마음을. 너도 느끼는 이 마음을. 


 

벌써 4월이야. 

시간 참 빠르다. 너무 빨라. 


 

내 오랜 벗. 

내 오랜 연인. 

내 오랜 사람아. 


 

나는 네가 힘들지만 않았으면 좋겠어. 

 

우리 열일곱살 되던 1월 1일등산 갔을 때 

빨갛게 피어오른 네 양 볼. 

지친 표정을 하는 네 눈썹. 

말똥말똥한 네 눈동자. 

내가 제일 사랑하는 그 얼굴을 

내가 잘 보낼 수 있을까.
추천  5


 
우동1
글을 읽는데 초반에 몽글몽글할 땐 입이 귀에 걸릴만큼 웃고 있었는데 뒤로 갈 수록 숨이 턱 막힌다..
그 어마어마한 세월을 함께 지내고 사랑한 사람을 떠나보내야 한다니 네 마음이 어떨지 감히 상상도 가질 않아
이런 글 보면 참 권태란 게 도대체 왜 있는건가 싶고 그냥.. 그냥 다시 서로 지겨워지지 않는 사이가 됐으면 좋겠다.. 누구든

2년 전
우동2
너무 슬프네 내 첫사랑이 생각나서. 서로 미워할지언정 사랑하지 않을 수 없었던 그 애가 나도 보고 싶다. 그래서 네가 그 사람을 보내지 않았으면 좋겠다...
2년 전
우동3
그렇게 애틋하게 사랑하면서 어찌 보내려고 하니..
함께했던 시간만큼 많이 힘들거야..그래도 너의 마음이 그렇다면 어쩔수 없지만 후회는 하지 않길바랄게

2년 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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