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이 참으로 기괴하게 돌아가고 있다. 언제부터인가 대한민국 정치가 언어학 연구소라도 된 모양이다. 고작 말끝에 붙은 ‘노’ 한 글자, 혹은 아이들이 뱉은 ‘스타벅지’라는 철자 오기나 유희를 두고 온 세상이 뒤집어질 듯 난리를 피운다. 이 사소한 말꼬투리를 붙잡아 ‘너 일베지?’라며 낙인을 찍고, 사회적으로 매장하려 눈을 부릅뜨는 풍경이 일상이 됐다.
이 광경을 보며 기시감을 느끼지 않는다면 그게 더 이상한 일이다. 박정희 유신정권 시절의 그 어두운 그림자가 오늘의 대한민국 온라인과 정치권에 그대로 투영되고 있기 때문이다.
과거 독재정권은 사소한 가사 한 줄, 노래 제목 하나에서 ‘체제 전복’의 징후를 찾아내는 탁월한(?) 상상력을 가졌었다. 송창식이 “왜 불러”라고 노래하면 국가 권력에 대한 반항이라며 금지했고, “그건 너”라고 외치면 정권에 책임을 전가하는 불순한 의도가 있다며 가위를 들이댔다. ‘민중’이나 ‘동무’ 같은 단어만 나와도 ‘빨갱이’로 몰아세웠다. 술자리에서 넋두리 한 마디 던졌다가 ‘막걸리 보안법’으로 끌려가던 시절, 권력이 휘두른 검열의 잣대는 언제나 맥락 없는 ‘연상과 확증편향’이었다.
지금 우리 사회가 벌이고 있는 마녀사냥이 이와 무엇이 다른가. 경상도 사람이 일상적으로 쓰는 방언의 어미인지, 아이들의 유치한 말장난인지는 중요하지 않다. 그저 내 마음에 들지 않는 집단, 혹은 내가 ‘악(惡)’으로 규정한 집단의 표식(시그널)으로 보이기만 하면, 그 순간 복잡한 맥락은 거세된다. 오직 ‘적과 아군의 감별’만이 남을 뿐이다.
기가 막힌 것은, 정작 타인의 사소한 언어에는 현미경을 대고 매장하려 드는 이들이 자신들의 입에서 나오는 거칠고 잔인한 혐오 표현에는 한없이 관대하다는 점이다.
오늘날 더불어민주당 지지층 내부와 여권 지지 성향 커뮤니티를 보라. 그들이 일상적으로 내뱉는 언어적 폭력은 이미 한계를 넘어섰다. 당내에서 조금이라도 다른 목소리를 내면 ‘똥파리’니, 겉과 속이 다르다며 ‘수박’이니 하는 멸칭을 붙여 조롱한다. 특정 정치인을 겨냥해 ‘낙엽’이라 비하하는 것은 예사고, 상대 진영을 지지한 유권자들을 향해 ‘2찍’이라는 낙인을 찍어 아예 대화의 상대로조차 인정하지 않는다. 대법원에서 모욕죄 유죄 확정판결까지 받은 ‘똥파리’라는 멸칭을 일상적으로 사용하는 자들이 감히 배재고 학생들을 꾸짖는 풍경은 얼마나 희극적인가.
이 광경을 보며 기시감을 느끼지 않는다면 그게 더 이상한 일이다. 박정희 유신정권 시절의 그 어두운 그림자가 오늘의 대한민국 온라인과 정치권에 그대로 투영되고 있기 때문이다.
과거 독재정권은 사소한 가사 한 줄, 노래 제목 하나에서 ‘체제 전복’의 징후를 찾아내는 탁월한(?) 상상력을 가졌었다. 송창식이 “왜 불러”라고 노래하면 국가 권력에 대한 반항이라며 금지했고, “그건 너”라고 외치면 정권에 책임을 전가하는 불순한 의도가 있다며 가위를 들이댔다. ‘민중’이나 ‘동무’ 같은 단어만 나와도 ‘빨갱이’로 몰아세웠다. 술자리에서 넋두리 한 마디 던졌다가 ‘막걸리 보안법’으로 끌려가던 시절, 권력이 휘두른 검열의 잣대는 언제나 맥락 없는 ‘연상과 확증편향’이었다.
지금 우리 사회가 벌이고 있는 마녀사냥이 이와 무엇이 다른가. 경상도 사람이 일상적으로 쓰는 방언의 어미인지, 아이들의 유치한 말장난인지는 중요하지 않다. 그저 내 마음에 들지 않는 집단, 혹은 내가 ‘악(惡)’으로 규정한 집단의 표식(시그널)으로 보이기만 하면, 그 순간 복잡한 맥락은 거세된다. 오직 ‘적과 아군의 감별’만이 남을 뿐이다.
기가 막힌 것은, 정작 타인의 사소한 언어에는 현미경을 대고 매장하려 드는 이들이 자신들의 입에서 나오는 거칠고 잔인한 혐오 표현에는 한없이 관대하다는 점이다.
오늘날 더불어민주당 지지층 내부와 여권 지지 성향 커뮤니티를 보라. 그들이 일상적으로 내뱉는 언어적 폭력은 이미 한계를 넘어섰다. 당내에서 조금이라도 다른 목소리를 내면 ‘똥파리’니, 겉과 속이 다르다며 ‘수박’이니 하는 멸칭을 붙여 조롱한다. 특정 정치인을 겨냥해 ‘낙엽’이라 비하하는 것은 예사고, 상대 진영을 지지한 유권자들을 향해 ‘2찍’이라는 낙인을 찍어 아예 대화의 상대로조차 인정하지 않는다. 대법원에서 모욕죄 유죄 확정판결까지 받은 ‘똥파리’라는 멸칭을 일상적으로 사용하는 자들이 감히 배재고 학생들을 꾸짖는 풍경은 얼마나 희극적인가.
인류 역사상 가장 끔찍했던 독일 나치의 유대인 학살 역시, 시작은 고작 ‘벌레’라는 사소한 멸칭 한 마디였다. 히틀러의 선동가 괴벨스가 유대인의 가슴에 ‘벌레’라는 딱지를 붙인 순간, 그들은 이웃에서 박멸해야 할 해충으로 전락했다. 독일인들의 눈에 유대인이 더 이상 인간이 아닌 벌레로 보이기 시작했을 때, 아우슈비츠의 집단 학살이라는 인류 최악의 비극은 이미 예견된 결말이었다.
상대 진영의 전·현직 대통령과 그 가족을 향한 언어는 잔혹함을 넘어 참혹할 지경이다. 이명박 전 대통령은 ‘쥐박이’, 박근혜 전 대통령은 ‘닭그네’, 윤석열 전 대통령은 ‘윤두창’이라는 기괴한 멸칭으로 난도질당한다. 풍자와 해학은 거세된지 오래다. 여기에 윤 전 대통령의 부인 김건희 씨를 ‘줄리’로 호명하는 행위는 저질스러운 여성 혐오까지 더했다. 이 추악한 배설물들이 민주당 지지 성향 커뮤니티에서는 아무런 여과도, 부끄러움도 없이, 나아가 ‘정의로운 투쟁’인 양 당당하게 소비되고 있다.
사소한 단어 하나에 ‘일베’ 프레임을 씌우는 그 서슬퍼런 도덕적 결벽증은, 자신들이 뱉어내는 이 추악한 배설물 앞에서는 왜 그리도 침묵하는가. 내가 쓰는 혐오 표현은 ‘정의로운 투쟁’이고, 남이 쓰는 사소한 말투는 ‘체제 전복적 악’이라는 이 지독한 이중잣대야말로 지금의 정치를 썩게 만드는 주범이다.
이러한 ‘시그널 찾기’와 ‘혐오 낙인’ 광풍은 진영을 가리지 않고 한국 사회 전체를 잠식하고 있다.
미국에 매카시즘 광풍이 불던 1950년대, 헐리우드 영화에서 노동자의 권리를 말하면 ‘소련 스파이’로 몰렸고, 중국의 문화대혁명 시절엔 마오쩌둥 초상화를 닦다 실수로 흠집을 내도 ‘반혁명 분자’로 숙청됐다.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이념적 순결주의와 진영 논리에 미친 사회가 다다르는 종착지는 언제나 ‘일상의 정치 심판화’이자 ‘언어의 황폐화’, 마침내는 ‘인간성 상실과 파괴’였다.
과거의 검열이 국가 권력에 의해 위에서 아래로 내려오는 폭력이었다면, 지금의 검열은 대중이 SNS와 온라인 커뮤니티를 통해 스스로 혐오를 생산하고 서로를 감시·고발하는 ‘아래로부터의 전체주의’라는 점에서 훨씬 더 교묘하고 악질적이다. “우리 편이 아니면 모두 적”이라는 극단적인 진영 논리와 확증 편향이 결합한 괴물이다.
본질을 잃어버린 정치는 늘 사소한 것에 집착하고, 저열한 언어 뒤로 숨는 법이다. 진짜 싸워야 할 거대 담론과 정책, 민생의 영역에서 무능한 자들이 선택하는 가장 손쉬운 생존 방식이 바로 ‘말꼬투리 잡기’와 ‘상대방 악마화’이기 때문이다.
서로를 향해 입에 담을 수 없는 멸칭을 내뱉으면서 동시에 손가락 모양과 말투에서 적을 찾아내며 희열을 느끼는 사회에 미래는 없다. 그것은 정의 구현이 아니라, 단지 내 안의 증오를 배설하기 위해 타인을 파멸시키는 잔인한 가학증에 불과하다.
유신시대의 야만적 검열을 비판하며 성장한 세력이, 이제는 자신들이 만든 거대한 혐오의 요새 안에서 더 잔인한 검열관이 되어 칼을 휘두르고 있는 이 역설을, 우리는 어떻게 받아들여야 하는가. 지금 우리가 서 있는 곳이 대낮의 민주공화국인지, 아니면 서로를 물어뜯는 어둠의 유신 마당인지 참으로 비통하고 참담한 심정으로 묻지 않을 수 없다.
권순욱 부국장 겸 정치부장
상대 진영의 전·현직 대통령과 그 가족을 향한 언어는 잔혹함을 넘어 참혹할 지경이다. 이명박 전 대통령은 ‘쥐박이’, 박근혜 전 대통령은 ‘닭그네’, 윤석열 전 대통령은 ‘윤두창’이라는 기괴한 멸칭으로 난도질당한다. 풍자와 해학은 거세된지 오래다. 여기에 윤 전 대통령의 부인 김건희 씨를 ‘줄리’로 호명하는 행위는 저질스러운 여성 혐오까지 더했다. 이 추악한 배설물들이 민주당 지지 성향 커뮤니티에서는 아무런 여과도, 부끄러움도 없이, 나아가 ‘정의로운 투쟁’인 양 당당하게 소비되고 있다.
사소한 단어 하나에 ‘일베’ 프레임을 씌우는 그 서슬퍼런 도덕적 결벽증은, 자신들이 뱉어내는 이 추악한 배설물 앞에서는 왜 그리도 침묵하는가. 내가 쓰는 혐오 표현은 ‘정의로운 투쟁’이고, 남이 쓰는 사소한 말투는 ‘체제 전복적 악’이라는 이 지독한 이중잣대야말로 지금의 정치를 썩게 만드는 주범이다.
이러한 ‘시그널 찾기’와 ‘혐오 낙인’ 광풍은 진영을 가리지 않고 한국 사회 전체를 잠식하고 있다.
미국에 매카시즘 광풍이 불던 1950년대, 헐리우드 영화에서 노동자의 권리를 말하면 ‘소련 스파이’로 몰렸고, 중국의 문화대혁명 시절엔 마오쩌둥 초상화를 닦다 실수로 흠집을 내도 ‘반혁명 분자’로 숙청됐다.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이념적 순결주의와 진영 논리에 미친 사회가 다다르는 종착지는 언제나 ‘일상의 정치 심판화’이자 ‘언어의 황폐화’, 마침내는 ‘인간성 상실과 파괴’였다.
과거의 검열이 국가 권력에 의해 위에서 아래로 내려오는 폭력이었다면, 지금의 검열은 대중이 SNS와 온라인 커뮤니티를 통해 스스로 혐오를 생산하고 서로를 감시·고발하는 ‘아래로부터의 전체주의’라는 점에서 훨씬 더 교묘하고 악질적이다. “우리 편이 아니면 모두 적”이라는 극단적인 진영 논리와 확증 편향이 결합한 괴물이다.
본질을 잃어버린 정치는 늘 사소한 것에 집착하고, 저열한 언어 뒤로 숨는 법이다. 진짜 싸워야 할 거대 담론과 정책, 민생의 영역에서 무능한 자들이 선택하는 가장 손쉬운 생존 방식이 바로 ‘말꼬투리 잡기’와 ‘상대방 악마화’이기 때문이다.
서로를 향해 입에 담을 수 없는 멸칭을 내뱉으면서 동시에 손가락 모양과 말투에서 적을 찾아내며 희열을 느끼는 사회에 미래는 없다. 그것은 정의 구현이 아니라, 단지 내 안의 증오를 배설하기 위해 타인을 파멸시키는 잔인한 가학증에 불과하다.
유신시대의 야만적 검열을 비판하며 성장한 세력이, 이제는 자신들이 만든 거대한 혐오의 요새 안에서 더 잔인한 검열관이 되어 칼을 휘두르고 있는 이 역설을, 우리는 어떻게 받아들여야 하는가. 지금 우리가 서 있는 곳이 대낮의 민주공화국인지, 아니면 서로를 물어뜯는 어둠의 유신 마당인지 참으로 비통하고 참담한 심정으로 묻지 않을 수 없다.
권순욱 부국장 겸 정치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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