길쭉한 손가락이 연필을 쥐는 모습, 생각에 잠겨 스케치북을 내려다보는 모습, 남자애들이 쭈뼛대며 말을 걸면 환하게 웃으며 올려다보는 모습 하나하나를 눈에 담아두었다. 성격이 털털하고 빼는 것이 없어 윤아는 금방 언니들에게도 이쁨받으며 지냈지만 유일하게 친해지지 못한것이 순규였다. 장난기 많고 잘웃는 순규였지만 이상하게 윤아 앞에만 서면 꼼짝할수도 없었다. 순규는 이런 자신이 너무나 어색해서 윤아를 피해다니며 교실에서 주구장창 그림만 그렸다. 대학에서 상을 받은지라 이미 붙은거나 다름없었지만 그렇게 하지 않으면 제 마음을 들킬거 같았다. 좋아하는 남자애가 생기면 온갖 애교와 눈웃음으로 넘어오게 만들었는데...이상한 일이었다. 그리고 여름방학. 순규는 요근래 그랬던 것처럼 연필로 눈에 보이는 것 족족 그리기 시작했다. 윤아가 진지한 표정으로 붓질을 하는 것이 눈에 띄었다. 순규는 망설이다가 조심스럽게 윤아의 얼굴을 종이에 옮겨담았다. 다른 어떤 것보다도 정성스럽게 그려서인지 손이 금방 뻐근해졌다. 잠시 음료수나 마시고올까. 순규는 기지개를 펴며 밖으로 나갔다 "아, 언니. 이거 저 그린 거에요?" 순규는 놀라 마시던 음료를 뿜을 뻔했다. 아이들은 다 나갔는지 교실엔 윤아밖에 없었다. "너...저, 점심은?" "그냥 대충 과자로 때웠어요. 근데 언니 진짜 잘그렸다." 윤아는 기분이 좋은듯 방긋 웃었다. 순규는 윤아 손에 들린 스케치북을 빼앗아들고 얼굴만 붉혔다. "그냥 한 번 그려본거야." "아, 기분 상했어요? 그냥 너무 맘에 들어가지고 좀 본거였어요." 윤아는 스케치북 앞면에 크게 적힌 글씨를 보고 다시 웃었다. 근데 이름이 이순규에요? 되게 귀엽다. 언니랑은 말을 제대로 못해봐서 이름도 모르고있었어요. 그리고 정신을 차리고보니 윤아와 엄청 친해져있었고, 대학을 간 후에도 계속 연락하며 지냈고, 어쩌다보니 윤아도 같은 대학에 와버려서 순규의 짝사랑은 끝날줄모르고 지금까지 이어져버리게 됐다. 가끔 너무 윤아가 사랑스러울 땐 은근슬쩍 몸을 만지고 깨물며 장난이라는 이름아래 스킨쉽을 시도하는 것만으로 좋았다. 그런데, 나도 떨려서 못만지는 윤아를....순규는 입술을 앙다물었다. 한 남자선배가 윤아에게 치근덕대고 있었던 것이다. 순규는 뚫어져라 둘을 바라보다가 졸리다는 핑계로 윤아를 끌고 방으로 향했다. "많이 졸려요?" "응. 나 무릎베게해줘." 순규는 기왕 데려온거 뽕도 뽑을겸 윤아의 무릎에 누웠다. 얘는 밑에서 봐도 예쁘구나. 시시껄렁한 소리를 늘어놓다가 순규는 꾸벅꾸벅 졸기 시작했다. 진짜 졸리기 시작했다. "너 가면안돼." "언니 재우고 저도 잘꺼라니깐요." 순규는 안심한듯 고개를 끄덕였고 윤아는 말없이 순규의 머리카락을 손가락으로 꼬며 내려다보았다. "아까 그 선배 소문 안좋아. 같이 있지마, 알았지?" 순규는 잠들기 직전 웅얼거리는 목소리로 약속해, 약속해 조르기에 윤아는 웃음을 참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순규는 곧 색색거리며 잠들었고, 윤아는 그런 순규를 말없이 내려다보았다.
방문 밖으론 왁자지껄 떠드는 소리가 들리고 순규언니에게선 약하게 술냄새가 났다. 윤아는 팔을 뻗어 방문을 완전히 닫았다. 순규는 도톰한 입술을 벌리며 깊게 잠들어있었다. 윤아는 순규의 입술을 아주 조심스레 매만졌다. "언니, 자요?" 순규는 미동도 하지 않았다. 진짜 피곤했나봐. 윤아는 잠들기직전 순규가 했던 말을 떠올리곤 작게 쿡쿡 웃었다. 순규언니는 내가 모를거라 믿고있는걸까, 믿고싶은걸까. 윤아는 눈치가 빨랐다. 아니, 눈치가 없는 사람이라도 순규가 보는 눈빛을 보면 얼마 안가 알아챌 것이다. 순규언니가 너무 부끄러워하기에 나도 가만히 있었지만...윤아는 순규의 입술을 조금 더 벌렸다. 1년 넘게 참았으니까. 이 정도는 괜찮아. 윤아는 순규의 입술 위로 고개를 숙였다. 말랑한 입술의 감촉이 기분 좋았다. 그리고 키스는 술에 걸걸하게 취한 사람들이 방으로 들어올 때까지 지속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