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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형아, 전화왔는데?"
들고 있던 종이를 옆에 내려놓고 매니저형이 건네는 핸드폰을 받아들었다. 아, 한참 집중하고 있었는데. 이 시간에 나한테 전화할 사람은 딱히 없다는 생각과 동시에 반짝거리는 화면이 눈에 들어왔다.
'전정국'
얜 또 뭔 일이지. 손가락으로 가볍게 화면을 밀어 전화를 받았다. 핸드폰을 얼굴에 가까이 하자 익숙한 음성이 귓가에 내려앉는다.
「여보세요? 태형이형」
"왜"
「...전화받자마자 왜라니, 좀 너무한 거 아녜요?」
"나 바쁘니까 용건만 말해라"
「와- 형만 바빠요? 나도 바쁘거든요」
"아 됐고. 그래서 왜 전화했는데"
「있잖아요, 형 요즘....지민이형이랑 연락해요?」
"....."
박지민.
바쁜 스케줄덕에 잠시나마 잊고 지낼 수 있던 이름 세 자가 다시금 머릿속을 잠식해간다. 멍하니 허공 어딘가를 바라본 채 그대로 행동을 멈춰버렸다. 입을 열어 무어라 대답해야 하는데 말이 나오지 않았다. 사고회로가 제멋대로였다.
「형! 형? 왜 말이 없어요」
"정국아, 내가 다음에 다시 걸게! 미안."
혼란스러워 아무 말이나 내뱉곤 떨리는 손으로 통화종료 버튼을 터치했다. 배경화면이 빛나더니 일정시간이 지나자 칠흑같은 어둠으로 바뀌었다. 핸드폰을 꽉 쥐고 그저 가만히 있었다. 이제는 머릿속이 새하얘져 아무 생각도 들지 않았다. 급격히 피곤함이 몰려와 오른팔로 눈가를 덮고는 한참 있었다.
그러다가 오늘은 이만 자야겠다 싶어 소파에서 몸을 일으켰다. 오른손에 버석거리는 무언가가 느껴졌다. 시선을 그 쪽으로 하자 아까 전까지 손에 들고 있었던 종이가 보였다.
아맞다. 대본보고 있었지.
맨 앞 장으로 넘기자 이번에 촬영하게 된 드라마 제목이 눈에 들어왔다. 7년간의 사랑. 그 여섯 자가 뭐라고 태형은 쉽사리 시선을 떼지 못했다. 종이를 한 장 더 넘기자 태형이 맡은 역의 첫 대사가 형광펜으로 죽 그어져 있었다.
'(담담한 목소리로) 우리 그만할까.'
3년 전 그 날이 생생하게 재생되자 태형은 천천히 눈을 감았다.
*
지민아, 우리 그만할까. 마치 오늘 날씨는 어떻냐고 묻는 투였다. 그래, 그러자. 우리 그만하자. 크게 다를 바 없었다. 어제 먹은 저녁메뉴를 말하는 것처럼 담담했다. 둘은 그렇게 이별했다. 만남보다 더 쉬운 이별이었다.
석진은 위로했고 윤기는 화를 냈으며 남준은 말없이 지켜봤고 호석은 상처받았나 걱정했다.
그리고 정국은 어이없어했다.
멤버들의 반응이 어쨌건 둘은 헤어졌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방탄소년단도 헤어졌다. 제각기 자신의 길을 찾아. 재계약할 수도 있었지만 하지 않았다. 태형과 지민의 관계를 언론에 들킨 건 아니었다. 멤버들의 사이가 안 좋은 건 절대 아니었다. 소속사의 대우가 안 좋은 건 더더욱 아니었다. 그냥, 재계약하지 않는 편도 괜찮을 거라고. 시간이 지나 외로우면 그 때 다시 뭉치자고 농담따먹기하듯 흘러가는 말들을 건네며. 2021년, 그렇게 우리는 헤어졌다.
첫 만남은 고등학생 때, 어느 날이었다. 장소는 아마 연습실이었나. 이성적인 사고를 하기엔 한창 혈기왕성하고 앞뒤 안 볼 시기였다. 둘은 어렸다. 어렸기에 쉽게 사랑에 빠졌다. 2013년, 십 대의 마지막을 앞두고 방탄소년단으로 데뷔했다. 시간은 빨리 흘러 스물, 성인이 되었다. 그리고 사랑은 시작되었다. 꼴에 어른이랍시고 서로에게 기대라말하고 의지하지 않으려 애썼다. 장난스러운 생일축하속에는 애정이 있었고 오래가자는 말을 하며 킥킥대기도 했다. 다같이 쓰는 계정이 둘만의 세상이 된 날도 여럿 있었다. 해외에 공연하러 가서 룸메를 하면 침대위에서 셀카를 찍다 충동적으로 입을 맞추기도 했다. 100일, 200일. 시간이 지날 수록 자연스럽게 마음뿐 아니라 몸까지 나눴다. 어리건 어른이건 둘은 진심으로 그리고 열정적으로 사랑했다. 그만큼 기억은 쌓여갔다.
7년이란 시간이 흐르고 스물일곱이 되었을 때, 둘은 헤어졌다.
인간이 늘 그러하듯, 욕심은 끝이 없고 같은 실수를 반복했다. 익숙해진 만큼 고마움은 사소해지고 미안함은 사라졌다. 내가 변한다는 것. 그리고 네가 변한다는 것. 그것들이 아무렇지 않다는 게 힘들었다. 변한 우리를 감당하기엔 우린 너무 어렸을지도 모른다. 그래서 그들은 헤어졌다.
주머니에서 핸드폰을 꺼냈다. 전화번호부 목록을 훑어도 내 이야기를 털어놓을 믿음직한 친구는 몇 되지 않았다. 있긴 있었다. 몇 안되는 그들 중 하나에게 전화를 걸었다.
「여보세요-」
"나 태형이다."
「어- 김태형! 니가 웬일이냐. 안 바쁨?」
"최근엔 딱히. 그나저나 나 할 말 있는데"
「뭔데, 말해봐라」
"...나 애인이랑 깨졌다"
「니 사귀는 사람 있었나.. 아이돌이 간도 크네. 그래서 상태는 좀 괘안나」
"근데 웃긴 게 뭔지 아나"
「왜. 뭐가」
"내 하나도 안 힘들다. 왜지"
「뭐?? 음...별로 안 좋아했는갑지」
".....그런가, 그런건가"
「그래, 어차피 깨진 거 고마 잊어라」
"....."
「어! 나 전화온다 끊는다- 나중에 함 보자. 힘내고」
"....."
전화가 끊긴 핸드폰에 대고 계속 중얼거렸다. 그런가. 근데 아닌데. 나 박지민 진짜 좋아했는데. 근데 왜 안 힘들지. 왜지. 핸드폰은 태형의 물음에도 묵묵부답이었다. 그리고 태형은 여전히 담담했다.
해체를 앞두고 각자 짐을 챙겨 숙소를 떠나는 시간이 왔다. 이사를 녹음했던 게 엊그제같은데. 이사를 여러 번 해서 지금 숙소는 그 때보다 더 컸다. 이사가자. 정들었던 이 곳과는 안녕. 이사가자. 이제는 더 높은 곳으로. 노래를 흥얼대며 방에 들어오자 침대 위 게임기가 시야에 들어왔다. 아, 지민이랑 게임 한 판만 더 할 걸. 평소에 시간날 때마다 붙어 앉아 실컷 해놓곤 괜히 미련이 남았다. 조금 시선을 돌리자 같은 디자인에 색만 다른 스냅백 두 개가 보였다. 저거 지민이한테 선물하려던 건데. 갖고 싶다 한 거라 좋아할텐데. 엄청 잘 어울릴텐데. 마지막으로 건네줄 걸 그랬나. 커플룩을 수없이 맞춰 입었으면서 고작 그거 하나 안 줬다고 아쉬움이 밀려왔다. 부질없는 생각에 빠져있던 순간, 배에서 꼬르륵 소리가 났다. 박지민이 옆에 있었으면 분명.
분명.
'태태 배고파? 매니저형한테 뭐 사오라 할까?'
그리웠다.
머리로는 안된다는데. 이미 끝났다는데. 마음이 그러질 못했다. 머리와 마음이 따로 놀았다.
문득, 열려있는 창문을 바라보니 비가 쏟아지고 있었다. 분명 비가 오고 있는 게 맞는데, 그럼 이건 뭐지.
울었다. 처음엔 빗방울이 방안까지 들어온 줄 알았다. 고개를 푹 숙이고 바닥에 하나,둘 뚝뚝 떨어지는 빗방울을 보고서야 내가 울고 있다는 걸 깨달았다. 깨닫고 나니 서러워졌다. 그래서 엉엉 울었다. 그간 입안에서만 맴돌던 이름을 쏟아냈다. 지민아. 지민아. 지민아- 그렇게 아쉬움과 그리움을 토해내고 나니 속이 좀 후련해졌다. 텅 빈 방에서 마지막 짐을 들고 나가려다가 잠시 돌아본다. 울고 웃던 시간들아.
이젠 안녕.
좀 웃겼다. 우린 친구였는데, 그리고 연인이었는데. 어쩌다 이렇게 된 거지. 덜 어색해지려고 노력하니 가까스로 친구라는 관계를 지켜냈다.
내 전부, 나 그 자체였던 방탄소년단과 헤어지고 삼십줄로 향하는 3년간 발음교정, 연기연습, 단역과 조연부터 차근차근 시작하는 등 홀로서기를 위해 무던히도 노력했다.
다른 멤버들도 마찬가지였다. 석진이형은 시도 때도 없이 잇진을 찍더니 결국 스타셰프의 꿈을 가지고 요리공부를 했다. 윤기형은 특기를 살려 음악 프로듀서가 되었다. 곡을 그렇게 잘 만든다는데 역시 민피디 그 실력 어디 안 간다. 남준이형은 래퍼로 활동했다. 자기가 곡을 쓰기도 했다. 호석이형은 안무가쪽으로 가서 아이돌들의 안무를 짜준다고 했다. 정팀장에게 딱 맞는 일이었다. 정국이는 자이언티같은 솔로가수가 되겠다더니 황금막내 아니랄까봐 노래도 하고 랩도 하고 춤도 춘다. 왠지 저 놈이라면 운동쪽으로 갔어도 잘 했을 거 같다. 지민이는...
떠났다.
부산으로.
방탄의 매력둥이, 재간둥이라던 녀석은 연예계를 떠났다. 제일 의외였던 선택이었다. 사실 가장 잘 어울리는 선택이었다. 모순적이면서도 꼭 들어맞았다. 사람들은 끼가 많다고 했다. 나는 선천적으로 타고난 건지 뭔지 잘 모르겠다. 하지만 지민이는 노력했다. 뭐든지 노력으로 성공시키곤 했다. 지민이는 타고난 나를 부러워했고 나는 노력하는 지민이를 부러워했다. 우리는 서로가 가진 것에 이끌려 더욱 매력을 느꼈다.
자신이 다녔던 댄스학원에서 학생들을 가르친다는 소식을 접했을 때, 피식 웃었다. 그래, 박지민은 역시 춤이지. 정팀장과는 비슷한 듯 다른 행보였다. 어쩌면 우리중에 제일 잘 살아남을 녀석이었는데. 좀 아까웠다. 하지만 선생님 박지민을 상상하자 웃음이 나왔다. 엄격하게 잘 가르칠 수 있을까. 정많고 여린 녀석인데. 은근히 단호한 구석이 있긴 했다. 지민이라면, 아이들을 사랑으로 포용하면서 실력을 키워주는 멋진 선생님이 될 것 같았다.
연락, 해도 되지 않을까. 좀 겁은 나지만 구실은 찾았으니까.
손에 익은 열한 자리 숫자를 눌렀다. 다 누르고도 꽤 오랜 시간을 망설였다. 전화를 걸고 천천히 귀에 갖다댔다. 다행히 신호가 간다. 번호를 바꾸지 않았다는 사실에 조금 마음이 놓였다.
「여보세요-」
"...지민아"
「..오랜만이네 김태형」
핸드폰너머로 들려오는 내 이름이 반가우면서도 섭섭했다. 이왕이면 태태라고 불러주지. 그래도 다시 친구사인데.
"어. 니 부산에서 춤 가르친다매"
「응. 어쩌다보니 그렇게 됐다」
"잘할 거 같네...니는 다 잘하잖아"
「안 어울리게 웬 칭찬?」
하나도 안 변했네. 가끔 가다 내가 칭찬을 하면 쑥스러운지 핀잔주는 녀석이었다. 다른 멤버들보다 나랑 더 티격태격하는 편이었고 나는 유독 녀석에게 인색했다. 녀석도 나보단 정국이에게 더 관대했다. 친구사이로 시작해서 더 그런 걸지도 몰랐다.
"쨌든,힘내라. 몸조심하고"
「어어. 니도 이번에 첫 주연됐다며」
"우리 찜니- 관심없는 척하면서 다 아네?"
「무슨. 멤버들 소식은 다 알아야지」
"니 자꾸 철벽친다."
「....미안. 나 곧 수업이라 끊어야 된다」
"그래..애들이 말 안 들으면 형아불러라. 다 혼내주께"
「형아는 무슨. 구오즈 리더는 나거든. 끊는다-」
친구가 된 우리는 어색한 기운이 없지않아 있었지만 그래도 가끔 연락했다.
운좋게도 수많은 단역과 조연을 거쳐 따낸 첫 주연작에서 인정받았다. 시청률은 무려 30퍼가 넘었고 대세배우로 발돋움했다. '방탄소년단 뷔가 아닌 배우 김태형으로 인정받다', '한 번의 시련을 거쳐 마침내 꽃을 피우는 아이돌출신 배우' 따위의 인터넷 기사들이 나뒹굴고 있었다. 새로 들어간 소속사의 언론플레이가 분명했다. 본인의 글이 더 자극적이라는 듯 다투는 기자들을 보자니 픽 웃음이 터져 나왔다. 카톡- 메세지가 왔다는 알림이 들렸다. 그녀였다. 난, 다시 사랑을 시작했다.
첫 주연작에서 나와 합을 맞춘 여자였다. 촬영할 때도 은근슬쩍 호감을 표시하길래 그냥 냅뒀다. 결국 마지막회가 끝나고 쫑파티에서 고백받았다. 그냥 받았다. 술에 취한 상태였지만 실수는 아니었다. 그룹으로 활동하다 혼자 하려니 여간 심심한 게 아니었다. 좀 외롭기도 했다. 그 녀석때문에 더욱 그랬다. 그래서 받았다. 사춘기 온 아이가 부모에게 반항하듯이. 보란 듯이. 결국 기사까지 났다. 그 놈의 파파라치들. 강제 연애공개는 연예계에선 꽤나 익숙한 일이었다. 좀 신경쓰였다. 소식을 접했을까. 상처는 받았을까. 받았으면...
좋겠는데.
그녀와 싸웠다. 속상해져 집에서 혼자 술을 마셨다. 술잔에 술을 가득 따르고 원샷을 해댔다. 예전에는 우리 모두 술을 잘 못 마셨고 즐기지도 않았다. 사회생활 하다 보니 그 때보단 좀 잘 마시는 것 같다. 점점 취기가 올라 마시는 걸 그만뒀다. 비어있는 술잔만 바라봤다. 뜬금없이 노래가사가 떠올랐다. 술잔을 비우니 그리움이 차는구나. 그냥 다 지고 볼 걸 왜 난 따지고 봤을까. 그녀에게 말하는 건지, 그 녀석에게 말하는 건지는 모르겠다. 너와 난 핸드폰, 떨어지면 고장 날 걸 너도 알잖아. 그 녀석은 핸드폰을 잘 떨어트렸다. 공항에 도착해 차에서 내릴 때 팬들 다 보는 데서 떨어트린 적도 있다. 그리고 잘 잃어버렸다. 콘서트 시작 전, 녀석의 핸드폰이 사라져 매니저, 코디, 스태프들까지 핸드폰은 찾았냐고 물어보기 일쑤였다. 꼼꼼한 듯 어딘가 모자란 녀석과 모자란 듯 은근히 꼼꼼한 나는 환상의 조합이었다. 너의 품, 너의 온기, 너의 마음. 다시 보고 싶다고 빌어. 고백하자면 보고 싶었다. 안 본 지 오래라 친구라는 핑계를 대서라도 만나고 싶었다. 그럴 때는 연예계를 떠난 녀석이 원망스러웠다. 너는 TV속의 나를 볼 수 있지만 나는. 나는.
괜시리 슬퍼져 나도 모르게 전화를 걸었다. 청승맞다고 욕먹어도 좋았다. 수신인은
녀석이었다.
신호음이 들리는데 1초가 1시간처럼 느껴졌다. 심장이 빠르게 뛰었다.
「...여보세요-」
"....."
자다가 깼는지 목이 잠겨있었다. 취했는지 그것마저 귀엽게 느껴졌다.
「.....야...왜 아무 말도 안 해..?」
"....."
내가 아무 말이 없자 발신인을 확인한 건지 핀잔을 준다. 역시 하나도 안 변했다.
「김태형..? 너 뭔 일 있어?」
"....."
한 마디도 하지 않자 심상치 않다는 걸 느낀 지민이의 목소리가 커졌다.
「뭐라 말 좀 해봐! 아파??」
"짐나..나..힘들다..."
「왜..드라마도 끝났잖아...」
알고 있네. 드라마 끝난 거. 녀석은 언제나 타인에게 관심이 많았다. 오지랖이 넓은 건지 뭔지 멤버들의 얘기도 잘 들어주고 위로도 걱정도 잘 했다. 어떤 타입의 사람에게든 다정한 편이었다. 그 점이 좋으면서도 싫었다. 질투나니까. 속마음과 다르게 말은 제멋대로 나갔다. 딴 사람 신경끄고 니 몸이나 챙기라.
"드라마는 끝났는데..싸워가꼬..."
「아....그 분이랑?」
그것또한, 알고 있었다. 기사봤나보네. 분명 지민이가 알고 있기를 바랬는데 씁쓸해지는 이 마음은 뭘까.
"....어.."
「...속상했겠네. 우리 태형이..」
"니는 만나는 사람..있나?"
갑작스레 튀어나온 말이었다. 물어볼 생각은 없었는데. 알고나면, 내가 원하는 진실이 아니란 걸 알고나면. 상처받을까봐.
「....내는..없다」
"그래? 닌 좋은 사람 만나야된다..아님 니가 아깝다"
마음에도 없는 소릴 했다. 그 좋은 사람이 나였으면, 하면서도 괜히 같은 실수를 또 반복할까봐. 지민이는 좋은 사람이었다. 그 녀석은 나에게 아까웠다. 나보다 더.. 더, 좋은 사람 만나야 된다. 하기 싫은 말이 입안에 맴돌았다.
「그래. 좋은 사람..만나야지」
"난 어떤데?"
「어...?」
"니가 보기에 난 어떤 사람같냐고"
「아- 넌...좋지. 너도 좋은 사람이지.」
"그럼.."
「근데, 근데. 그 분도 좋은 사람같다. 잘 어울리네.」
"....."
조금은, 기대했다. 혹시 아직도 날 좋아할까. 니가 좋다면 난 언제든 달려갈 수 있는데. 그녀와 헤어지고라도, 지금 위치를 놓고라도 그럴 수 있는데. 지금처럼 차가운 그 녀석을 느낄 때면 마음이 아파왔다. 작년, 지민이의 생일날. 드라마촬영이 잡혀있었지만 미루고 녀석을 만나려 했다. 감히 촬영스케줄을 뒤로 미룰 짬밥이 안되면서도 그러려 했다.
하지만,
'안 와도 되니까 촬영 가.'
'매니저형이 나한테 전화했어. 내가 뭐라고 스케줄을 미뤄?'
'너 나한테 오면 평생 안 볼 줄 알아.'
섭섭했다. 매니저형도, 지민이도. 매니저형을 째려보자 널 위한 일이었다며 헛기침을 했다. 조금만, 조금만 더 다정하게 말해주지. 역시 차가운 지민이는 너무나 아프다. 이별하기 전, 싸웠을 때도 그랬다. 다시금 노래가사가 떠올랐다. 차가워진 니 표정이 말 대신 모든 걸 대변해. 이별이 밀물처럼 내게 떠밀려오는 걸 대면해.
「왜 또 말이 없어..」
"....."
「우는 거야..?」
"....."
또 울었다. 창밖을 보니 지금도 비가 오고 있었다. 매일 반복되는 스케줄을 소화하다 슬퍼질 때면 녀석에게 전활 걸어 울곤 했다. 처음에는 왜 말을 안 하냐고 당황하던 녀석도 몇 번 그러자 적응한 건지 말없이 있어줬다.
야외 촬영을 하던 중, 촬영장 옆을 지나는 고등학생 커플을 본 적이 있었다. 교복을 입은 채 커플 신발을 신고 콘 아이스크림을 먹으며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순수해 보였다. 외모, 성격, 능력, 집안 다 따지는 복잡한 연애말고 순수한 연애. 나도 그런 걸 할 때가 있었는데... 복잡해지는 마음에 촬영에 집중했다. 그 날, 집에 돌아가 지금 하고 있는 연애에 대해 진지하게 생각했다. 결론은, 그녀와 헤어졌다. 그리고 나는 서른이 되었다.
*
태형아. 김태형. 얼른 일어나. 매니저형의 목소리에 잠에서 깼다. 너는 왜 침대놔두고 소파에서 자고 있어? 대본을 보다 깜빡 잠들었나 보다. 스케줄 갈 준비를 하고 집을 나섰다. 오늘 날씨 좋네- 햇빛이 밝았다. 기분이 좋아졌다.
오늘 스케줄을 다 하고 차에 몸을 실었다. 운전중인 매니저형의 모레까지는 스케줄이 없다는 말에 신나서 히죽히죽 웃었다. 손에 쥐고 있던 핸드폰에 진동이 울렸다. 아, 촬영한다고 진동으로 바꿔놨었지 참. 발신인을 확인했다.
'박지민'
녀석이 먼저 전화를 거는 일은 잘 없기에 놀랐다. 그래서 반가운 마음보단 불안한 마음이 컸다. 전화를 받자 무겁게 가라앉은 녀석의 분위기에 더욱 불안해졌다.
"어, 지민아"
「.....태태야.」
오랜만이었다. 태태. 듣고 싶었다. 10년넘게 그렇게 불러주다 헤어지고 나서는 언제 그랬냐는 듯이 김태형. 태형아. 라고 부르는 녀석에 여간 섭섭한 게 아니었다. 호칭 정도는 안 바뀌어도 좋은데-
"....응..왜 전화했냐"
「.....」
"지민아.."
「.....」
"너 지금.....울어?"
녀석이, 울고 있었다. 긴 시간을 함께 하며 우는 모습을 자주 보았지만 최근에는 없기에 낯설었다. 매니저형이 걱정되는 듯 나를 흘깃 쳐다보는 게 느껴졌다.
"지민아...왜 우노.."
「태태야 있잖아, 나....이제..결혼한다?」
쿵- 심장이 차갑게 식었다. 녀석의 말이 머릿속에서 인지가 되지 않았다. 뭐라고 했는지 다시 묻고 싶지도 않았다.
"....."
「.....」
"....."
「.....」
"....."
우린 오랫동안, 아무 말이 없었다. 벙어리가 된 것처럼. 지민아. 나 이제, 인지는 했는데. 그런데. 뭐라고 해야 할지 모르겠어.
정적을 깨는 듯 녀석이 먼저 입을 열었다.
「마지막으로...한 마디,딱 한 마디만 할게.」
"....."
「태태야,사랑해.」
"....."
전화가 끊겼다. 그대로 한참을 있었다. 집에 도착할 때까지. 매니저형이 날 보고 놀라더니 왜 우냐고 물어봐서 알 수 있었다. 나, 울고 있었구나. 박지민때문이다. 매번 박지민때문이었다. 핸드폰을 아무렇게나 떨어트리고 얼굴을 양 손에 묻은 채 흐느꼈다.
적막이 가득한 차 안, 창문에 부딪치는 빗소리만이 울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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석지니 가슴관련해서 말인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