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보/소식] 정덕현 평론가가 다지니 수지 연기 호평 칼럼 썼네 | 인스티즈](http://file3.instiz.net/data/cached_img/upload/2025/10/17/12/eebc41899b8ed1660d25b47cc2072c64.jpg)
한때는 바위였을 테지만 수천 년간 바람과 물에 부서져 이제는 손가락 틈새로 흘러내리는 모래는 사람의 손길과 발길이 닿는 대로 형태를 바꾼다. 잘 빚어 성을 만들기도 하고, 때론 인어를 만들기도 하며, 떠난 이의 발길에 하릴없이 짓밟히기도 한다. 모래알이 바람에 흩날리는 사막 한가운데서 세 가지 소원을 들어주는 램프의 요정 지니 이야기가 탄생한 건 우연이 아닐 게다. 그 인간의 욕망이 가득한 소원이란 저 모래알로 성을 짓는 일처럼 하릴없는 것일 수 있어서다. 제 아무리 모든 걸 다 가진다 해도 결국 우리는 모든 걸 내주고 저 모래알로 돌아가는 운명을 갖고 태어난 인간들이 아닌가.
넷플릭스 드라마 ‘다 이루어질지니’는 바로 그 램프의 요정 지니가 주인공인 드라마로, 그 소원의 허망함과, 그 허망함에도 집착해 결국은 파멸에 이르는 어리석은 인간을 이야기하는 작품이다.
흔히 지니는 램프 주인의 소원을 들어주는 존재로만 기억되지만, 사실 그건 일종의 시험대다. 악한 마음(욕심)을 가진 이들은 결국 그 시험대 속에서 스스로 파멸해버리기 때문이다. ‘다 이루어질지니’의 지니 이블리스(김우빈)는 그런 인간들을 혐오하고 하찮게 여긴다. 그래서 신이 만든 인간이 얼마나 하찮은가를 증명해 보이기라도 하겠다는 듯이 소원을 들어주는 것으로 그들을 파멸시킨다.
그런데 그에게 특별한 주인 기가영(수지)이 생긴다. 반사회적 인격장애를 가진 사이코패스지만 할머니와 마을사람들의 사랑과 교육으로 사람들과 함께 살아가는 법을 배운 인물이다. 그래서 이블리스의 시험이 통하지 않는다. 자신의 욕망을 위해 소원을 쓰지 않고 할머니가 교육시켰던 신념 “세상에서 나쁜 건 나 하나”라는 걸 증명하는 데 쓰거나, 할머니를 젊게 만드는 데 쓴다. 인간을 혐오하는 지니와 감정을 느끼지 못하는 사이코패스 기가영은 그러나 수백 년 전부터 연결된 운명으로 서로를 변화시킨다.
지니는 기가영을 통해 인간의 위대함을 알게 되고, 기가영은 지니를 통해 인간적 감정을 소원하게 된다. 이 수천 년에 걸친 대서사시를 통해 ‘다 이루어질지니’는 거대한 욕망보다 위대한 것이 사람들의 마음과 소망, 감정 같은 것들이라는 걸 전해준다.
이 작품에서 주목되는 건 기가영이라는 사이코패스지만 다정함을 가진 인물이다. 아마도 흔히들 ‘헤이 지니!’라고 불렀던 인공지능(AI)에서 아이디어를 가져온 듯한 이 인물은(그래서 ‘기가’가 들어간 이름일 게다) 실제 AI가 그러하듯이 친절하면서도 무정하다. 사이코패스로 태어났기에 무정하고 할머니와 마을 사람들이 사랑으로 키웠기 때문에 친절한 인물. 이 독특한 캐릭터가 설득력을 갖고 끝내 감동을 주는 건 이를 성공적으로 연기해낸 수지의 공이 아닐 수 없다. 텅 빈 내면을 갖고 있지만 다정함을 연기하도록 훈련받은 인물을 연기해내야 했던 것이니 말이다.
초창기 수지의 연기를 떠올려보면 ‘다 이루어질지니’의 기가영이라는 인물 연기는 상상하기 어려울 정도의 성장을 실감할 수 있다. 2010년 JYP엔터테인먼트 소속 미스에이의 원년 멤버로 데뷔해 걸그룹 활동을 했던 그녀는 이듬해 ‘드림하이’라는 드라마로 첫 연기를 시작했지만 돌아온 건 ‘연기력 논란’이었다. 하지만 2012년 영화 ‘건축학개론’으로 이른바 ‘국민 첫사랑’이라 불릴 정도의 큰 성공을 거뒀다.
그렇지만 이것 역시 수지에게는 족쇄나 다름없었다. 워낙 강력한 그 이미지가 다른 연기 도전에 걸림돌이 됐기 때문이다. ‘함부로 애틋하게’ 같은 정통 멜로드라마는 그 이미지와 부딪쳐 수지의 연기에 이질감을 만들었고, ‘도리화가’ 같은 영화는 예인의 삶을 담으며 연기 변신을 시도했지만 여전히 대중의 마음에 닿지는 못했다. ‘배가본드’ 같은 액션에 뛰어들기도 하고, ‘스타트업’ 같은 로맨스로 돌아오기도 했지만 수지의 배우로서의 이미지는 여전히 저 ‘건축학개론’ 틀에서 완전히 벗어나지 못했다.
도저히 깰 수 없을 것 같은 공고한 이미지로부터 탈피하기 위해 끝없이 부딪치고 깨지며 노력해온 소망이 전해진 걸까. 드디어 기회가 찾아왔다. ‘안나’와 ‘이두나!’라는 서로 다른 정반대 캐릭터를 가진 작품이 동시에 그녀 앞에 놓여진 것이다. 리플리 증후군으로 끝없이 거짓말을 하다 끝내 파국에 이르는 안나라는 강력한 파토스적 인물과 한때 잘나가던 아이돌이었지만 은퇴 후 평범한 대학생을 만나 사랑에 빠지는 이두나라는 블링블링한 인물을 자유자재로 오가며 수지는 연기했다. 거기에 ‘국민 첫사랑’의 이미지는 없었다.
‘다 이루어질지니’는 제목처럼 수지의 연기가 자신의 소망대로 다 이뤄졌다는 걸 보여주는 작품이다. 작품 안에서 기가영이라는 인물을 통해 수지는 텅 빈 눈빛으로 때론 섬뜩해 보이지만 때론 엉뚱한 짓으로 웃음을 주기도 하고, 때론 자신의 무표정한 얼굴로 우리를 울리기도 하는 연기를 보여준다. 특히 끝내 소원대로 감정을 갖게 된 기가영이 눈물을 흘리며 “나는 할머니의 사랑 속에 컸구나. 나는 그렇게 할머니를 갉아먹으면서 컸구나. 나는 할머니의 힘이 아니었구나. 그건 할머니의 진실이었구나. 나는 할머니의 짐이 맞았구나”라고 말하는 대목에서는 안으로 꾹꾹 눌러뒀던 감정을 폭발시키는 수지의 연기가 압권이다.
이제 수지가 그려 나갈 연기의 필모는 저 앞서 말했던 모래알처럼 무한해 보인다. 텅 빈 듯 허망한 것처럼 보이지만 그렇기 때문에 빛을 받아 더욱 반짝거리고, 언제든 부서져 손가락 사이로 잡힐 듯 잡히지 않은 채 흘러내리기 때문에 무엇이든 빚는 대로 형태가 만들어지는 모래알이 그것이다.
첫 경험의 미숙함에서 어느 순간 벼락스타로 국민적 이미지를 족쇄처럼 짊어져야 했던 연기자는 이제 램프의 요정 지니가 원하는 대로 다 이뤄내는 것처럼 원하는 연기를 끄집어낼 수 있는 진정한 배우로의 길로 들어섰다. 그게 가능했던 건 그 자리에 머물러 있기보다는 오히려 그곳을 떠나 정해진 길이 아닌 아무도 걷지 않은 길을 터벅터벅 걸어가며 스스로 만들어낸 발자국들이 차곡차곡 쌓여서다. 수지는 그 발자국들을 통해 우리에게 말해주는 듯하다. 우리 모두에게도 모래알처럼 무한한 가능성의 길들이 놓여져 있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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