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보/소식] 대한민국 양념치킨의 아버지 멕시칸치킨 창립 윤종계씨 향년 74세로 별세 뒤늦게 알려져.. | 인스티즈](http://file3.instiz.net/data/cached_img/upload/2026/01/08/4/666c0fdca2f6864ddb98cefc74fc2d5d.png)
양념치킨의 창시자로 불리는 윤종계 회장이 12월 30일 별세했다. 향년 74세. 사망 원인은 지병이던 당뇨와 심근경색으로, 자택에서 숨을 거둔 것으로 알려졌다.
윤 회장은 프라이드치킨이 주류였던 한국 치킨 문화에 ‘양념치킨’이라는 새로운 장르를 탄생시킨 인물이다. 지금은 국민간식이 된 양념치킨과 치킨무 역시 그의 손에서 시작됐다. 업계에서는 그를 ‘한국 치킨의 아버지’, ‘한국의 할랜드 샌더스’로 부른다.
윤 회장이 치킨 사업에 뛰어든 것은 순탄치 않은 인생사에서 비롯됐다. 그는 인쇄업을 하다 부도로 모든 것을 잃었고, 생계를 위해 선택한 것이 치킨이었다. 당시에는 자동화 기계조차 없어 가마솥에 치킨을 튀기던 시절이었다. 맛의 편차가 크고, 식은 치킨을 손님들이 남기는 모습을 보며 그는 문제의 원인을 집요하게 파고들었다.
“왜 치킨을 남길까 고민해보니, 식으면 비릿해지고 딱딱해져 입을 다친다는 걸 알게 됐습니다.”
해결책은 ‘염지 방식’과 ‘튀김기 개발’이었다. 일정한 맛을 유지하기 위해 염지 방식을 고안했고, 식어도 식감을 유지할 수 있도록 튀김기를 직접 개발했다. 이 기계는 이후 불티나게 팔리며 업계 표준이 됐다. 실제로 처갓집양념치킨 회장 역시 그의 회사 공장장 출신으로 알려져 있다.
양념치킨 개발 과정은 실패의 연속이었다. 수개월간 수없이 레시피를 바꾸던 중, 한 할머니의 조언이 결정적 전환점이 됐다. “물엿을 넣어보라”는 말에 따라 양념에 물엿을 더하자 맛이 완성됐다. 윤 회장은 “그때 특별한 노하우가 생겼다”며 “대구 치킨의 원조라 불리는 이유도 나와 함께 일했던 사람들이 전국으로 퍼져나갔기 때문”이라고 회고한 바 있다.
초기 반응은 폭발적이었다. 대구 효목동의 산면도로에 있던 가게 앞에는 소문을 듣고 몰려든 사람들이 돗자리를 깔고 기다릴 정도였다. 손님들로 인한 소음과 혼잡으로 신고를 당하고, 물세례를 맞는 일도 있었다.
그는 양념치킨뿐 아니라 ‘치킨무’의 창시자이기도 하다. 치킨을 먹으면 목이 답답하다는 점에 착안해 무와 오이에 식초와 사이다를 넣어 곁들인 것이 지금의 치킨무로 발전했다. 처음에는 동치미 형태였지만, 치킨과의 궁합을 거치며 지금의 맛으로 정착됐다.
윤 회장은 치킨을 ‘간식’이 아닌 ‘식사’로 만들고자 했다. 제2의 식량을 만들겠다는 목표로 5천 평 규모의 식품 공장을 설립했고, 이 과정에서 하림과 인연을 맺으며 한국 축산업 성장의 기반을 다졌다. 그는 “지금 기준으로 보면 노벨상감 업적”이라면서도 “상 하나 받지 못한 건 아쉽다”고 담담히 말했다.
성공의 이면에는 고독도 있었다. 한때 1,780개 체인점을 운영했지만, 건강이 악화된 뒤에는 믿고 맡길 사람이 없었다. 그는 “내가 어려울 때 나 몰라라 하더라”고 털어놓기도 했다. 그럼에도 윤 회장은 스스로를 실패자라 부르지 않았다. 미국 정부 초청을 받아 15개 주를 돌며 한국 치킨을 알렸고, 선진국 여러 나라에서 초청을 받았다. 대구치맥페스티벌 역시 그의 아이디어와 활동에서 출발했다.
말년에도 그는 치킨을 사랑했다. 치킨을 사 먹기보다는 집에서 직접 만들어 먹었고, “이미 좋은 기계와 레시피를 다 개발해 놨다. 다만 누구에게 넘겨줄지 못 찾았다”고 아쉬움을 남겼다. 이번 인터뷰 역시 “내가 만든 것들이 제대로 쓰이는 모습을 보고 싶어서”였다고 한다.
윤 회장은 새로운 길을 걷는 이들에게 늘 같은 말을 남겼다.
“쉽게 생각하지 말고, 이미 성공한 전문가에게 배우기 위해 투자하라. 돌다리도 두드리고 건너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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