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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라마 ‘21세기 대군부인’(MBC)에서 즉위식 장면이 결국 삭제됐다. 다시보기 서비스와 웨이브·디즈니플러스 등 OTT에서 11화 방송의 엔딩 장면이 통째로 잘려나갔다. 대군에서 왕으로의 자리바꿈 전개가 급작스럽고 어색해졌다. 300억원(추정) 제작비를 투입한 대작의 완성도로 보긴 힘들게 됐다. 동시대 정서를 놓친 허술한 설정이 역사 왜곡 논란으로 번지며 시청자들의 분노를 산 결과다. 
중 제후국 연상시키는 설정에 
국가적 자존감, 정체성에 상처 
OTT에서 즉위식 장면 들어내 
고증보다 동시대 감각이 중요 
[정보/소식] '21세기 대군부인'에 왜 분노하는가 [이지영의 문화난장] | 인스티즈원본보기
역사 왜곡 논란을 불러온 드라마 '21세기 대군부인'. [연합뉴스]

‘조선구마사’는 2회 만에 폐지 
21세기 대군부인’의 파행은 5년 전 2회 방송 후 종영한 ‘조선구마사’(2021, SBS)를 떠올리게 한다. 당초 16부작으로 예정됐던 ‘조선구마사’는 조선 태종과 충녕·양녕 등 실존 인물을 등장시키면서 월병·피단(새알을 삭힌 요리) 같은 중국 음식과 소품을 사용해 시청자들의 거센 반발을 불러왔다. 드라마가 조선을 중국 문화권의 일부처럼 보이게 만든다는 비판이었다. 중국의 동북공정 공세에 가뜩이나 예민해져있던 시청자들은 청와대에 프로그램 폐지 국민청원을 하고 광고주 압박까지 나섰다. 결국 광고주들이 대거 이탈하면서 방송은 조기 종영됐다. 계유정란을 다룬 드라마 ‘파천무’(KBS)가 1980년 신군부의 압력으로 돌연 막을 내린 사례는 있었지만, 시청자들의 집단 항의가 드라마 폐지로 이어진 것은 한국 방송사상 초유의 일이었다. 

당시 첫 방송에서 프로그램 폐지 결정까지 걸린 시간은 단 나흘이었다. 그만큼 여론의 흐름이 일방적·폭발적이었던 것이다. 이후 한국PD연합회 등이 마련한 토론회에선 “동북공정에 부역하는 매국드라마라는 프레임에 갇히는 순간 백약이 무효”라는 창작자들의 자조 섞인 한탄이 나오기도 했다. 

[정보/소식] '21세기 대군부인'에 왜 분노하는가 [이지영의 문화난장] | 인스티즈원본보기
역사 왜곡 논란을 불러온 드라마 '조선구마사'. [중앙포토]
21세기 대군부인’의 논란은 주인공 이안대군(변우석)이 황제가 쓰는 줄 12개짜리 ‘십이면류관’ 대신 9줄의 ‘구류면류관’을 쓴 채 즉위식에 등장하고 신하들이 ‘만세’ 대신 ‘천세’를 외치는 장면에서 불거졌다. 드라마 배경인 ‘21세기 입헌군주국 대한민국’을 황제국이 아닌 제후국으로 묘사했다는 데 시청자들이 발끈한 것이다. 드라마 설정에 따르면 조선 왕조는 일제강점기 없이 현대까지 쭉 이어져왔다. 고종이 황제로 등극한 대한제국의 역사도 없다. 그래서 제작진이 조선 왕실의 예법대로 중국 중심의 위계질서를 따라 ‘구류면류관’과 ‘천세’를 사용한 모양인데, 시청자 감성과는 동떨어진 고증이었다. 

21세기 대군부인’이 12화로 종영한 뒤에도 파장은 가라앉지 않고 있다. 국회 국민동의청원에 접수된 ‘역사 왜곡 드라마 방영 중단 및 콘텐트 폐기 조치 요청에 관한 청원’은 나흘 만에 5만 명 이상의 동의를 얻어 국회 과학기술정보방송통신위원회에 회부된 상태다. 

[정보/소식] '21세기 대군부인'에 왜 분노하는가 [이지영의 문화난장] | 인스티즈원본보기
사실 여부에 상관없이 스코틀랜드 민족주의의 상징이 된 영화 ‘브레이브하트’. [중앙포토]
대중문화 콘텐트가 역사 인식 논란의 중심에 때때로 서게 되는 것은 비단 우리만의 일이 아니다. 영국에서는 넷플릭스 드라마 ‘더 크라운’(20162023)이 왕실 역사를 지나치게 극적으로 재구성했다는 비판을 받았다. 특히 찰스 왕세자와 다이애나 왕세자비의 불화를 다루는 장면 등이 논란거리가 됐다. 사실 왜곡뿐 아니라 실존 인물들을 깎아내리는 전개가 문제란 지적이었다. 

영화 ‘300’(2007)은 고대 페르시아를 야만적인 집단으로 묘사했다는 이유로 이란 사회의 반발을 불렀고, 넷플릭스 다큐멘터리 ‘퀸 클레오파트라’(2023)는 이집트 프톨레마이오스 왕조의 마지막 왕인 클레오파트라 7세를 흑인 배우로 캐스팅해 논란을 일으켰다. 당시 이집트 정부는 공식 성명을 통해 클레오파트라가 그리스계 백인이라는 고증 자료를 제시하며 넷플릭스가 이집트 역사를 왜곡한다고 비판했다. 
한편 스코틀랜드 독립영웅 윌리엄 월리스를 주인공을 내세운 영화 ‘브레이브하트’(1995)는 인물관계와 신분, 전투 방식 등 상당 부분이 실제 역사와 달랐다. 역사학자들은 혹평했지만 영화는 오히려 스코틀랜드 민족주의의 상징처럼 소비됐다. 

사회적 맥락 읽어내는 게 대중문화 숙명 
이들 사례는 역사 콘텐트를 둘러싼 갈등의 본질이 단순한 고증 논란이 아니라 결국 현재의 정체성 문제라는 걸 보여준다. 

기본적으로 역사극은 역사적 사실에 대한 대담한 해석과 상상력의 산물이다. 가상의 인물과 배경을 만들어낼 뿐 아니라, 실존 인물을 둘러싼 사건도 새롭게 창작한다. 창작의 자유가 콘텐트 생태계의 근간이다. 그렇다고 해서 역사적 책임으로부터 자유로운 것은 아니다. 그 상상력이 뿌리내릴 토양은 결국 공동체가 공유하는 기억과 정체성이다. 

21세기 대군부인’은 그런 점에서 논란을 자초했다. ‘구류면류관’과 ‘천세’를 향한 대중의 분노는 단순히 고증이 틀려서가 아니라 현재 우리의 국가적 자존감과 정체성을 훼손했기 때문이다. 스스로를 중국의 하위 제후국으로 격하시키는 설정이라니, 누구를 위한 상상력이란 말인가. 가상의 세계를 구축하더라도 그 세계를 지탱하는 뿌리에 대한 예의를 지켰어야 했다. 

이에 대해 과도한 민족주의라는 반론이 있을지 모른다. 하지만 사회적 맥락과 시대 정서를 읽어내야 하는 건 대중문화의 숙명이다. 현재 대중의 감수성과 눈높이를 맞춰야 생명력을 얻는다. 영화 ‘왕과 사는 남자’가 1689만 관객을 동원한 비결도 억울하게 희생된 이들에 대한 부채감과 애도 심리 등을 읽어낸 동시대 감각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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