눈을 뜬 것은 잔디밭 위에서였다. 갑작스레 가해진 충격으로 쿵쿵 울리는 머리를 부여잡고 고개를 들었을 때, 가장 처음 눈에 들어온 것은 익숙하게 생긴 꼬마 애였다. 어디서 봤길래 이렇게 익숙한 걸까, 하고 생각해보니 타쿠야의 책장 위에 놓여진 액자 속에 이렇게 생긴 아이가 있었던 것도 같았다. 천천히 이목구비를 살펴보니 알고 있는 사람의 그것이었다. 시간의 경과와 상관없이 그 애는 한결같이 예뻤구나. 그런 생각에 아ㅡ, 하는 탄성과 함께 입가에 미소가 지어졌다.
나는 지금 내가 사랑하는 사람의 유년기에 있다.
17년 전의 유년기
처음으로 시간을 돌려야겠다는 생각을 했던 것은 타쿠야의 49제를 지냈을 때였다. 버텨내려고, 그 애 없이 잘 살아보려고 나름대로 노력을 했으나 이제는 타쿠야의 영혼조차 이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이 나를 걷잡을 수 없이 무너지게 만들었다. 사실 타쿠야가 차에 치이는 걸 봤을 때는 그게 너무 꿈같아서 실감조차 나지 않았다. 그냥 말도 안되는 일이라고만 생각했다. 몇 분 전까지 눈 앞에서 웃으며 사소한 얘기를 꺼내고, 또 품에 안겨 따스한 체온을 전해주던 사람이 한 순간에 사라지는 건 불가능한 일이니까.
그런데, 그 애는 사라졌다. 한 줌 가루가 되어 깊은 바다 속 어딘가에 흩뿌려지고 가라앉았다. 무덤조차 존재하지 않아서 나는 그 애를 찾아갈 수도 없었다. 그저 꿈을 꾸고 간절히 그리워할 뿐, 그 애의 죽음 앞에서 나는 아무것도 할 수가 없었다는 얘기다. 그래서 나는 시간을 돌려 그 애를 다시 찾아가기로 했다. 생생하게 살아 숨쉬고 부드러운 피부에 따듯한 체온과 솜털을 가진 타쿠야를 다시 만나야겠다고 결심을 했다.
그래서 나는 지금 1998년의 서울, 그 애의 앞에 서있다. 부모님이 다섯살 때 돌아가시고 그 때부터 서울에 계신 이모의 집에서 살았다고 했던가. 여섯살의 소년은 또래보다 키가 조금 크고 마른 편이었다. 와, 얘는 꼬맹이주제에 비율도 좋네, 하고 감탄을 조금 했다. 뜬금없이 나타나서 저에게 마냥 웃어주는 아저씨에게 조금 이상한 생각을 가질 수도 있겠다, 하는 생각에 그 애의 얼굴을 살피니 역시나 어리둥절한 기색이 있었다.
아저씨는 누구에요? 아이가 그런 질문을 던져왔다. 너를 살리기 위해 17년 후의 미래에서 온 사람이야, 라고 말할 수가 없어 그 대답으로 이름만을 알려주었다. 내 이름은 장위안이야, 라는 대답에 아이가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을 해주었다. 제 이름은 테라다 타쿠야에요. 뻔히 알고 있는 사실이지만 입술을 움직이고 고개를 끄덕이며 나는 테라다 타쿠아에요, 라고 대답하는 아이가 예뻐서 웃을 수 밖에 없었다. 타쿠야는 이렇게 내 앞에서 생생히도 살아있다, 정말 감사하게도.
이런 저런 얘기를 하면서 거리를 잠시 걷다가 아이는 동네 슈퍼 앞에 멈춰섰다. 무언가 먹고 싶은 것이 있는지 그 앞에 서서 멈칫거렸다. 먹고 싶은 거 있으면 사줄게, 라고 말하니 잠시 망설이다 손을 뻗어 딸기우유를 집었다. 아, 귀여워. 정말 사랑스러워서 미칠 것만 같다. 두 손가락으로 딸기우유를 꼭 움켜쥐고 빨대를 쪽쪽 빠는 게 사랑스러워서 이마에 뽀뽀라도 해주고 싶었찌만 타쿠야는 아직 여섯살이니까 조금 참기로 했다. 몇년 후의 미래에서 다시 만난다면 그 때는 각오하는 게 좋을 거다.
"그거 맛있어?"
"별로…."
"근데 왜 그렇게 열심히 먹어."
"이모가 우유 많이 마시면 키 큰다고 해서요."
"야, 그런 이유로 마시는 거면 넌 그거 안 마셔도 돼."
"싫어요, 나중에 아저씨보다 더 커질 거야."
그러니까 그런 이유면 그거 안 마셔도 된다고…. 그런 거 안 마셔도 충분히 클 거니까…. 그렇게 말하려다가 내가 너무 비참해질 것 같아서 그만두었다. 너는 어쩜 꼬맹이 주제에도 키가 이렇게 크냐. 아이가 그걸 듣고 까르르 웃었다.
"꼬맹이, 초등학생되면 뭐 하고 싶냐."
"음…. 여자친구 사귀고 싶은데."
"으이그, 공부할 생각은 안하고."
말을 끝맺음과 함께 아이의 머리를 살짝 쥐어 박으니 인상을 찡그리며 칭얼거렸다. 아파요. 그 말에 다시 머리를 쓰다듬어 주었더니 아이가 금방 인상을 펴고 사르르 웃었다. 여자친구 사귀고 싶어? 라는 물음에 아이가 고개를 힘껏 끄덕였다. 어쩌냐, 스물세살까지 여자친구는 못 만났던 걸로 알고 있는데, 남자친구면 몰라…. 그런 말을 하려다가 겨우 여섯 살 짜리의 환상을 깨뜨리는 것은 너무 잔인한 일인 것 같아서 그만두었다. 공부나 열심히 하라는 의미에서 연필 몇 자루를 사다가 손에 쥐여줬더니 아이가 입을 삐죽거렸다. 공부하기 싫은데, 그런 말을 하면서.
다시 거리를 걷다 보니 인형뽑기 기계가 나왔다. 아저씨, 나 저거 뽑아주면 안 되요? 아이가 가리킨 건 자그마한 공룡 인형이었다. 여섯살이면 한창 그럴 나이기는 하겠다는 생각에 고개를 끄덕이고 동전을 넣었다…가 망했다. 30분 동안 기계 앞에 서 있었건만 얻은 것은 곰돌이 인형이 달려있는 열쇠고리 하나 뿐이었다. 미안한 마음에 멋쩍은 웃음을 지으니 아이는 그것도 좋다며 고맙다는 말을 건넸다. 노을이 지기 전, 마지막으로 붉게 타고 있는 햇살이 아이의 얼굴에 스몄다. 붉게 물들어 미소짓고 있는 소년. 아이가 어두워지는 하늘을 바라보더니 이모가 기다리시겠다며 재빨리 집 쪽으로 뛰어갔다. 아저씨, 내일 또 만나요! 하고 소리 지르는 아이에게 손을 흔들어주었다.
너를 내가 다시 만날 수 있을까.
원래 자신이 존재하던 시간에서 벗어나 다른 시간에서 머물 때에는 '한계'라는 것이 있다. 어길 수도 없고, 반드시 따라야하는 것. 그 한계는 몇 초가 될 수도 있고, 몇 년이 될 수도 있었다. 불행하게도 이번의 경우에는 다섯 시간인 것 같았다. 손목에 찬 시계에서 붉게 빛이 났다. 이 시간에서 떠나야 한다는 표시였다. 여섯살 소년의 뒷모습에 작별인사를 하고 나는 눈을 감았다. 제발 그 아이를 다시 만날 수 있게 해주세요. 그렇게 간절히, 또 간절히… 빌며.
6년 전의 청소년기
이미 한번 경험해 봤지만 시간을 돌릴 때마다 생기는 두통과 이명은 도저히 익숙해지지가 않았다. 여기는 또 어디일까, 하고 주위를 둘러보니 학교였다. 대충 학교 이름을 보니 고등학교인 모양이었고, 하교 시간인지 초저녁의 고등학교는 시끌벅적했다. 교문 앞에서 재잘재잘 떠드는 학생들을 보며 나는 살며시 미소를 지었다. 좋을 때네. 부러운 마음에 멍하니 허공을 쳐다보다가 나는 익숙한 목소리에 현실로 돌아왔다.
"아저씨?"
아, 이건 꿈인가. 여섯 살의 아이보다는 훨씬 크고 스물셋의 소년보다는 조금 작은 소년이 내 앞에 서 있었다. 아저씨 맞아요? 와, 진짜 신기하다. 하나도 안 늙었네. 그렇게 말하며 나를 물끄러미 쳐다보는 아이에게 고개를 끄덕이자 그 애가 눈을 비비고 볼을 꼬집었다.
"나 지금 꿈꾸는 거 아니죠."
"어, 아닌 것 같은데."
"말도 안돼. 진짜 사람이 어떻게 하나도 안 늙을 수가 있어. 11년이나 지났는데. 와, 그것보다 내 앞에 다시 나타난 게 더 신기해요. 말도 없이 사라지고 그 동안 어디에 있었어요?"
"그건 말해주기 조금 곤란하고…."
"내가 진짜, 그 날 이후로 아저씨를 얼마나 기다렸는데 이제서야 나타나요?"
눈을 크게 뜨고 빠르게 말하던 아이가 내 손목을 잡아 끌더니 교문 앞을 벗어났다. 우와, 진짜 신기해. 말도 안돼. 그러는 와중에도 아이는 계속 그렇게 중얼거렸다. 뭐라고 하는 지 제대로 알아들을 수도 없을 만큼 빠르고 불명확하게 말하는 모습에 웃음 섞인 어조로 천천히 말하라고 했더니 아이가 잠시 말을 멈추었다. 그러더니 고개를 숙여 눈을 맞춰왔다. 와, 몇 년 새에 많이 컸네. 그런 생각을 하는 도중에 코 끝과 코 끝이 맞닿았다. 숨결이 느껴질 만큼 짧은 거리였다. 그 애가 손을 들어 내 뺨을 쓸더니 살풋 웃었다. 현실이네, 그런 말을 하면서.
"갑자기 이런 짓은 왜 하고 난리야. 간지럽게."
"그냥… 안 믿겨져서요."
그렇게 말하고 저 만치 앞으로 성큼성큼 걸어가던 아이가 휙하고 갑작스레 뒤로 돌았다. 아저씨! 하고 큰 소리로 부르며 빨리 오라고 난리다. 난 너보다 다리가 짧아서 빨리 걷기 힘들어, 라고 말하니 그 애가 까르르 웃었다. 자꾸만 내 앞으로 앞서 나가려 하는 아이의 손을 잡고 천천히 걸었다. 좋았다. 살아있는 너와 함께 여름의 햇살 속을 걷는 것이. 계속 걷다가 아이가 번화가의 끝에 멈춰섰다. 아저씨랑 같이 가보고 싶었던 곳 있었다는 말에 어디냐고 묻자 아이가 손을 들어 빨간색 간판을 가리켰다.
"나랑 같이 가보고 싶었던 곳이 고작 동네 분식집이야?"
"왜요, 여기가 얼마나 맛있는데."
"그래, 그래. 맛있게 먹어라."
2년 뒤면 여기도 없어지니까. 가게 주인의 개인적인 사정으로였나, 갑작스럽게 가게가 닫히고 그 자리에 자그마한 카페 하나가 생겼었다. 창가 자리에 앉으면 거리가 보였고, 나는 그 자리에 앉아 매일같이 너를 기다렸다. 창가에 앉아 커피를 마시다가 멀리서 네가 보이면 카페라떼 한 잔을 테이크 아웃해 너에게 가져다주는 것이 일상이었으니까 이 거리는 나에게도 익숙한 곳이다, 지금의 너는 모르겠지만.
"아저씨는 그 동안 어디에 있었어요?"
"비밀이라니까 그러네."
"치사하게 진짜. 알려주면 안 돼요?"
"안된다니까 왜 그렇게 끈질기게 물어봐."
"보고 싶었으니까 그렇죠."
"얼마나?"
"그냥 가끔 생각나고 그랬죠."
나는 네가 순간순간 간절히도 보고 싶었어. 목 끝까지 차오른 말을 삼키고 고개를 끄덕이며 웃어주었다. 기특하네, 하루 만난 사람을 그렇게 그리워해주고. 그 말도 나는 그냥 삼키기로 했다. 지금의 테라다 타쿠야에게 내가 고작 하루를 만난 존재라는 것을 인정하기 싫어서였다. 3년을 매일 매일 함께 했었는데…. 그 잃어버린 시간을 절대 잊지는 않으리라고 나는 속으로 다짐했다.
천천히 주위를 둘러보다 검은색 책가방이 눈에 들어왔다. 곰돌이 인형이 달려있는 열쇠고리가 지퍼에 달려있었다. 푸흡, 하고 터지는 웃음을 간신히 참았더니 아이가 왜 그렇게 웃냐며 물어왔다. 열쇠고리를 손가락으로 가리키니 아이가 얼굴을 붉히더니 고개를 푹 숙였다. 아, 귀여워.
"남고생이 그런 거 달고 다니면 놀림 안 받아?"
"시끄러워요."
떡볶이를 입안에 가득 머금은 채 고개를 숙이고 웅얼웅얼 하는 말이 고작 시끄러워요, 였다. 얼마나 작게 말하는지 거의 못 들을 뻔했다. 아, 진짜, 진짜 귀여워…. 부끄러운지 아이가 남은 음식을 먹는 둥 마는 둥 하더니 가방을 휙 집어 들고 밖으로 나갔다. 그 뒤를 쫓아 발걸음을 빨리하면서도 나는 웃음을 멈추지 않았다.
밤이 되었고, 아이가 나를 저의 집으로 이끌었다. 이모와 떨어져 사냐고 물었더니 얼마 전부터 그렇게 되었다고 대답을 하며 아이가 문을 열었다. 남고생 혼자 사는 집 치고는 깔끔한 편인 것 같다고 나는 생각했다. 오랜만에 만난 것이니 자고 가라는 말에 나는 조금 못된 생각을 잠시 품었다가, 이내 지워버렸다. 미성년자는 건드리면 안 된다는 털끝만큼의 양심 때문이었다. 그러한 이유로 그 애는 침대에 누웠고 나는 바닥에 누웠다. 침대로 올라오라는 말도 나는 그냥 무시하기로 했다.
가만히 누워 잠이 오기를 기다리는 와중에, 아이가 자그마한 목소리로 물어왔다. 아저씨는 애인 있어요? 있었지, 하는 대답에 아이가 질문을 계속했다. 조금 빠른 속도로 였다. 그게 그렇게 궁금할까, 하는 생각을 하며 나는 대답을 천천히 이어나갔다. 예뻤어요? 예뻤지. 진짜요? 얼마나? 세상에서 제일. 그런 오글거리는 대답을 하다가 나는 한 질문에 잠시 말을 멈추었다.
"어떻게 생겼었는데요?"
"너 닮았어."
"거짓말."
"진짠데. 코도 그렇고 눈도 그렇고 다 똑같이 생겼는데. 키만 너보다 조금 더 크고."
"키가 저보다 크다고요?"
아이가 침대에서 몸을 일으켜 다시 물어왔다. 아저씨, 남자랑 사겼어요? 나는 그 질문에 어떻게 대답할까 생각하다가 그냥 눈을 감아버렸다. 그 이후에도 질문이 하나 더 존재했다. 그럼 아저씨는 저도 예뻐요? …나는 역시 대답하지 않는 편이 더 좋을 거라고 생각을 했다. 깊은 침묵이 이어졌다.
한참을 뒤척이던 소년이 막 잠이 들었을 때, 나는 그 곳을 떠나야만 했다. 제발, 제발, 타쿠야가 죽기 전의 시간에 도착할 수 있게 해주세요. 이번에도 나는 그렇게 빌었다.
23살의 사흘
나는 아주 익숙한 장소에서 눈을 떴다. 푹신하고, 포근하고, 아늑한 느낌. 그 느낌에 나는 조금 더 편안하게 일어나 주위를 둘러볼 수 있었다. 어지러이 널려있는 책 몇 권, 책상 위에 노트북 하나, 나름대로 깔끔하게 정리된 옷장이 있었다. 아, 나는 그제서야 내가 내 방의 침대 위에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렇다면 핸드폰도 있을 거라는 생각에 방 안을 잠시동안 뒤져보니 역시나 배터리가 거의 다 닳아있는 핸드폰이 나왔다. 9월의 마지막날. 그렇다면 타쿠야가 죽기 3일 전의 날이었다.
타쿠야가 죽기 전의 시간으로만 갈 수 있다면 소원이 없을 거라고 생각했지만 시간적 여유가 이렇게도 적을 거라고는 생각하지 못했다. 늘 반나절을 제대로 버텨주지 못했던 시계를 살살 어루만지며 나는 빌었다. 제발 사흘 동안이라도 버텨달라고, 간절하게.
시간이 사흘밖에 존재하지 않는다는 말은 그 아이를 만날 시간이 얼마남지 않았다는 것과 같았다. 나는 서둘러 옷장을 열어 손에 잡히는 옷을 닥치는 대로 걸치고 밖으로 나왔다. 막 입기는 했다지만 그런 것 치고는 꽤 괜찮은 편이었다. 그렇게 빠른 시간 안에 외출 준비를 마치고 거리로 나온 나는 익숙한 카페로 들어갔다. 그 애가 카페라떼를 가장 좋아한다는 사실은 내가 제일 잘 알고 있었다. 또 이 곳의 커피를 가장 좋아한다는 사실도 나는 알고 있었다.
그 다음으로 나는 거리의 한가운데에 있는 시계탑으로 나갔다. 약속을 잡을 때마다 늘 만났던 곳이다. 약속을 잡은 것은 아니었다만 너라면 분명히 이 곳을 지나갈 거라고, 나는 생각했다. 그러한 생각으로 두 시간 정도를 버텼을 즈음이었나, 네가 내 앞에 나타났다. 스물세살, 내가 기억하는 그 모습과 완전하게 똑같은, 푸르른 모습으로, 살아 숨쉬며 내 앞으로 걸어왔다. 한 발짝, 한 발짝, 그 애가 나에게 가까워지는 동안 나는 어떤 말을 해야할까 엄청난 고민을 했다. 네가 더 빨리 말을 꺼냄으로써 별 소용이 없어졌기는 하지만.
"또 만났네요."
"어…,"
"내가 아는 아저씨 맞아요?"
"그런 것 같네."
오랜만이야, 타쿠야. 서로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상대의 눈만을 바라보고 있는 와중에, 나는 눈짓으로 인사를 했다. 소년은 별로 말을 하고 싶어하지 않아하는 것 같았다. 무슨 말을 해야할 지 몰라서 그랬는 지도 모른다. 한참을 걷다가 소년이 처음으로 했던 말은 이제 사라지지 마세요, 였다.
만나기 전에 미리 준비했던 커피를 건네주자 소년이 제가 카페라떼 좋아하는 건 어떻게 알았어요, 라고 물었다. 나는 그저 미소 지으며 그냥 그럴 것 같았다고 말을 했다. 이미 식어버린 커피를 소년은 잘도 들이마셨다. 한참동안 사소한 얘기를 나누며 걷다가 소년이 문득 그런 말을 했다. 아저씨는 저에 대해 아는 게 많은 것 같아요. 나는 아저씨에 대해 아는 게 없는데. 꽤 쓸쓸한 어투로 말을 하는 소년을 보고 나는 더 이상 내가 아는 것을 함부로 말하지 말아야겠다고 생각을 했다. 이따금 소년이 보이는 아주 익숙하고 사소한 습관들을 보며 나는 그런 것들을 의식하지 않으려 노력해야만 했다.
소년은 얘기를 하며 손가락을 움직이는 습관이 있다. 그 예쁘고 긴 손을 빙빙 돌리며 얘기를 한다. 의식하지 않으려 노력은 하지만 그런 것들을 보면 예뻐서 눈을 뗄 수가 없다. 아이의 눈도 좋고, 머리칼도 좋고… 좋지 않은 구석은 단 하나도 없지만 나는 그 애의 손가락을 많이 좋아했다. 굳은 살이 적은, 예쁘고 부드러운 손을 잡을 때마다 느껴지는 촉감도 좋아했고. 잠시동안 그런 생각을 하다가 나는 그 애도 나의 손을 쳐다보고 있다는 것을 알았다. 한참동안이나 나의 손을 쳐다보던 아이가 입을 뗐다.
"시계도 그대로네요."
"어?"
"17년 전부터 맨날 차고 다니던 거 아니에요? 그것도 대단하다, 진짜."
나도 모르는 새에 아, 하고 소리가 터졌다. 그 애가 시계를 이상하게 생각하는 것도 무리는 아닐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아이는 이제는 거의 대놓고 시계를 만지기 시작했다. 되게 오래된 건데 아직도 새 거 같다. 관리를 엄청 잘 했나봐요, 소중한 거에요? 눈을 빛내며 묻는 아이에게 별 의미가 없다는 대답을 하려다가 그냥 멈춰버렸다. 시간을 돌리기 전에 받은, 별 것도 아닌 것이긴 그 의미 없는 것에 사소한 의미라도 부여하고 싶어졌기 때문이다. 손목에서 시계를 푸른 나는 그것을 소년의 손목에 채웠다. 손목이 가늘어서 그런가, 내가 한 것보다 예쁘네. 그런 생각을 하며 나는 아이에게 선물이라는 말을 했다. 진짜 이런 걸 선물하는 거냐며 신나서 묻는 아이에게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선물을 주고 싶었으니까. 시계가 아닌, 시간을. 자동차 사고로 세상을 떠나기 전, 딱 이틀 전의 모습을 하고 있는 너에게 아주 조금의 시간이라도 더 선물해주고 싶었다. 나에게 남은 시간을 모두 떼어다가 너에게 준다고 해도 아깝지 않을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조금이라도 더 살아서, 더 예쁜 것을 조금이라도 더 많이 보고, 좋은 감정을 조금이라도 더 느끼게 해주고 싶었다.
손목을 쓸며 그저 신나게 웃는 아이에게, 나는 꼭 너에게 시간을, 미래를, 선물해줄 것이라고, 그런 다짐을 했다.
시간이 빨리도 지나갔다. 이틀이 순식간에 지나가고 어느덧 타쿠야의 기일이었다. 꿈에서도 잊을 수가 없는 날짜를 나는 내 기억에서 지워버리기로 했다. 이렇게 화창한 날에 달력에 동그라미를 치고 소년의 이름과 함께 기일, 이라는 두 글자를 새겨넣기 싫었다는 뜻이고 아무 생각없이 길을 걷다가도 문득 떠오르는 그 장면과 날짜를 기억하고 싶지 않았다는 뜻이다. 그저 오늘이 햇볕이 뜨거웠던 평범한 하루로 기억되기를 간절하게 바랄 뿐이었다.
약속 장소는 그 날, 그러니까 얼마 전의 오늘과 같았다. 꼭 나오라는 소년의 문자에 나는 비척거리며 침대에서 일어섰다. 그리고 옷을 입고, 집의 문을 나서서, 익숙한 거리에 도착했다. 소년이 웃으며 나를 반겨주었다. 그리고 어느 식당에 들어가서 밥을 먹었고, 잠시 산책을 하자는 핑계로 손을 잡고 공원을 걸었다. 딱, 여기까지, 그날의 기억과 같았다.
그 애는 오후 2시 26분에 죽었다. 화창한 햇살 아래서, 아스팔트 도로 위에서, 나의 손을 잡고 숨을 멈추었다ㅡ는 말이다. 그 시간에 그 장소에 존재하지 않으면 소년은 살 수 있을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2시 25분이었고, 소년이 손을 이끌며 신호등을 건너자는 말을 했다. 그리고 나는 잠시 쉬어가자는 말을 하며 횡단보도 앞의 벤치에 잠시 앉았다. 25분 55초, 26분 21초, 그리고… 57초. 이제 되었다는 생각을 하고 있을 즈음이었다.
건너편에서 트럭 하나가 도로를 가로질러 인도 쪽으로 들어오고 있었다. 주변의 그 자리에서 재빨리 흩어지고 달렸다. 빠르게 움직이는 사람들 속에, 나는 그 자리에서 한 발자국조차 쉽게 뗄 수가 없었다. 얼어붙은 소년의 얼굴이 보였다. 이런 것은 예상 시나리오에 없었는데. 그런 쓸 데 없는 생각과 함께 소년을 살려야겠다는 생각을 했다. 시간을 돌린다고 해서 무조건 운명을 바꿀 수 있는 것은 아니라고 했던가. 그 말을 절절하게 실감하며 아주 적은 확률에 모든 것을 걸어보기로 결심을 했다. 나는 너를 위해서, 운명을 바꿀 거야. 아주 찰나의 시간… 이 지나가고 그 다음부터는 아주 느리게 시간이 흘러갔다. 세상이 너무나도 흐릿하게 보여서, 모든 것이 움직이지 않는 것처럼 보여서, 그냥 그렇게 느껴졌던 것일 수도 있겠다.
죽기 직전에는 파노라마처럼 지난 인생이 스쳐 지나간다고 하더니, 나는 인생을 헛살았던 건가. 내가 아는 소년의 모습이 눈 앞에서 차례차례 지나갔다. 여섯살, 열일곱살, 그리고, 다시, 스물세살, 내 앞에서 울고 있는 모습까지. 울지 말라고 말을 해주고 싶었는데 입이 쉽게 떨어지지가 않았다. 눈꺼풀또한 서서히 무거워지는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눈을 감으니 오래 전의 기억이 떠올랐다. 언젠가, 2년 전이었나. 너는 꿈이 가수라고 말하면서 싱긋 웃어왔다. 나에게도 꿈을 물어오는 너에게 나는 그저 고개를 저을 뿐이었다. 꿈이 없다는 뜻에서 했던 행동이었다. 평범한 직장인에게 꿈이라는 것은 사치니까, 그런 생각을 하면서. 그리고 나는 네가 죽고 나서야 꿈이 생겼다. 너에게 꼭 말해주고 싶었는데, 절대 말해줄 수가 없었던 꿈. 나의 꿈은 너의 서른 살이야.
나는 다시 눈을 떠 너의 시계를 바라 보았고, 꿈이 하나 더 생겼다. 내가 너에게 준 시간을 살아가면서 그 시계를 볼 때마다 네가 나를 떠올릴 수 있기를. 그리고, 또, 아, 꿈이 자꾸 자꾸 더 생긴다. 사람이 죽으려니까 갑자기 욕심이 막 생기는 건가. 너와 함께 10년 후의 미래를 함께하고 싶고, 20년 후의 미래도, 30년 후의 미래도 함께하고 싶어졌다. 잔주름이 생긴 너의 손을 잡고 한적한 시골의 거리를 산책하는 것이 간절해졌다. 참 웃긴 일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스물세살의 살아있는 테라다 타쿠야를 보고 싶어 시간을 돌렸는데 몇십 년 후의 테라다 타쿠야를 보는 게 소원이 되어 버렸으니까. 그 때까지도 네가 변함없이 예쁠까하는 사소한 의문이 생겼다. 예쁘겠지, 너니까.
천천히 눈이 감겼다. 입을 벌릴 힘조차 사라져가는 것이 느껴져 나는 그저 너에게 웃어주기로 결심했다. 감기는 눈 사이로 우는 네 모습이 비쳐졌다. 왜 울어, 나는 웃는데. 그런 말을 해주고 싶었는데 말이 나오지가 않았다. 또 그거 말고도 해주고 싶은 말이 참 많았는데. 한 번만 너를 다시 볼 수 있다면 이런 말을 해줘야지, 하고 생각했던 것들이 수도 없이 많은데 다 말해주지 못하게 되었어, 아쉽게도 말이야.
그러니까, 그 중에 제일 해주고 싶었던 말은, 이거였다.
다시 만나자.
그게 몇 년 후가 되었든, 어떤 모습으로든, 꼭, 꼭…, 다시 만나자. 그래서, 그 때는 조금 더 오래 함께 하자.
27, 소년은 살아가고 있다
8월의 서울은 뜨겁고 또 푸르렀다. 너무나도 더웠던 탓에 주위를 둘러보며 더위를 피할 곳을 찾던 타쿠야는 자그마한 카페에 들어갔다. 한쪽 벽면이 유리로 되어 있어 햇빛이 잘 들어오는 밝은 분위기의 카페였다. 언제나처럼 카페라떼를 한 잔 달라고 하던 타쿠야는 제가 이 곳에 들어온 목적을 뒤늦게 깨닫고 황급히 말을 추가했다. 아이스로 주세요.
얼음이 찰랑거리는 아이스 카페라떼를 흔들며 가게의 문을 나가려던 타쿠야가 문득 창가 맨 구석에 놓여있는 의자에 시선을 고정시켰다. 어쩐지 이상한 기분이 들어서였다. 저 자리에 누군가가 항상 앉아있었던 것도 같은데, 하는 느낌에 타쿠야는 종업원을 불렀고 그녀가 웃으며 대답을 했다.
"저기, 혹시 저 자리에 항상 앉아있는 사람이 있나요?"
"창가 맨 끝 자리요? 아뇨, 그 자리는 항상 비어있는데요."
말 대신에 고개를 끄덕이는 것으로 대답을 대신한 타쿠야가 아주 찰나의 시간동안 멈칫하며 그 자리에 멈춰섰다. 역시 누군가가 앉아있었던 것 같다는 느낌이 들어서였다. 그러나 그러한 생각을 계속해서 하는 것이 별로 생산적이지 않을 것 같다는 생각에 그는 곧 그 생각을 떨쳐버리기로 하였다. 아, 모르겠다. 내가 꿈을 꿨나…. 그렇게 생각하며 카페의 문을 나가는 그의 뒤에서 딸랑, 하고 종소리가 울렸고,
시계가, 햇빛에 반짝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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