클러치 히터 clutch hitter
타쿠야 장위안
- 어쩐 일이냐? 잠도 안 자고 복도엘 다 나와있고.
- 그냥.
- 얼굴 보는거 간만이다? 운동은 할만 해?
- 어, 뭐,
- 그래. 열심히 하고.
- 응.
- 근데, 너 지금 누구 기다리냐?
- ......어?
내 눈 앞에서 왔다갔다하는 큼지막한 손을 보고, 그제서야 알아차렸다. 나한테 말을 걸어온 애가, 1학년 때 같은 반이었던 놈이란 걸. 마침 명찰도 안 달고 있어서 이름은 잘 모르겠지만 유독 운동부인 나한테 관심이 많았던 것 정도는 기억이 난다. 누구 기다리냐는 말에 들켜선 안될 일을 들킨마냥 낯뜨거운 기분이 된다. 누굴 기다리냐고? 나도 모른다. 그렇지만 세상 모르게 자고 싶지는 않다. 친구는 멍 때리고 다니지 말라는 말을 끝으로 나를 지나쳐 갔다.
- 타쿠야!!!!!!!!
- 으악!
- 새끼, 잘 지냈냐? 어깨는 좀 괜찮고?
- 아프니까 좀 내려오지?
- 아, 진짜 오랜만에 봤는데 섭섭하게.
- 어깨 아픈거 알면서 헤드락 거는 너만할까.
- 근데 우리 층엔 어쩐 일?
계단으로 올라오는 타쿠야를 봤다. 말을 걸어볼까, 모른 척 하면 먼저 말을 걸어올까, 상황이 닥치기도 전에 지레 집어먹은 겁때문에 이도저도 못 하고 있을 때, 어떤 1학년이 그 애에게 먼저 아는 척을 했다. 긴장이 탁 풀리는 느낌이었다. 동시에 짜증이 확 솟구쳤다. 그러면서도 자꾸 복도같은 데서 타쿠야를 마주치길 기다리는, 아니, 마주칠 상황을 미리 셋팅해놓고 기다리고 있는 내가 더 역겨웠다. 나 왜 이러지, 싶은데 쉬는 시간만 되면 뭐에 씌인 것처럼 복도에 나와 있는다. 이게 다 누구때문인데. 이게 다 누구때문인데, 너는 그렇게 아무렇지 않아? 나는 어젯밤 잠도 설쳤다. 핸드폰으로 별다른 걸 하지 않아도, 문자 한 통 와 있을까봐 버튼을 껐다 켰다하는 걸로 배터리가 닳을 지경이 됐다. 밥도 반이나 남기고, 또 엄마한테 잔소리를 듣고, 버스에서도 불안증이 있는 사람마냥 주위를 살피고, 숙소에서도 네가 언제 올까, 그러다가도 더이상 날 아는 척 하지 않는 무심한 표정과 맞딱뜨리면, 팽창하던 기대감이 실패한 빵마냥 푸쉬쉬 꺼져버리고 지금처럼 짜증만 남는다. 난 너때문에 지나가는 친구한테 제대로 아는 척할 겨를도 없었는데, 넌 아니다. 웃고 떠들기 바쁘다. 지나치게 평소같은 모습이다.
- ......
우리가 싸웠는데도.
* *
- 내가 무슨 여자애야?
- 선배가 어딜 봐서 여자예요?
- 집 앞까지 데려다주는게 여자애 취급이잖아.
내 말을 들은 타쿠야가 맥 풀린 표정을 한다. 나는 나대로 짜증이 나 있었다. 이런 사소한 일로 언성을 높인 적은 좀처럼 없었다. 제 고집을 세우다가도, 내가 선배라는 권위를 들먹이면 꼬리를 내리던 타쿠야니까. 하지만 오늘은 좀 돌발상황이다. 나는 당황한 기색을 보이지 않으려고 일부러 말을 더 삐뚤게 뱉었다. 타쿠야 쪽을 흘겼다가 시선을 떨구었다. 쳐다보기도 싫다. 사람이라도 주변에 있으면 쪽팔린 줄 알아서 이런 유치한 자존심 싸움은 안 할텐데, 그 날따라 버스 정류장엔 우리 둘뿐이었다.
- ......그런게 아니잖아요.
- 그런거든 아니든, 내 알 바 아니잖아.
내가 쳐다보지도 않고, 그렇다고 고집을 꺾을 것처럼 하지도 않으니까 결국 타쿠야가 먼저 한 풀 누그러진 목소리를 했다. 하지만 난 여자애가 아니다. 나는 단지, 그걸 확실히 해 두고 싶어서였다. 나는 고등학교 1학년의 남자애가 데려다 줄 만큼 연약하지 않았다. 타쿠야한테 가로등 하나에 의지해야만 하는 밤길이 싫다고 일러둔 것도 아니었다. 그런데 너는 왜 날 그런 것들이 다 해당되는 여자애 취급 하지? 네 눈에 투영되는 나는 혼자서 집도 못 갈만큼 나약한 모습일까? 네가 줄곧 나를 그런 식으로 보고 있어서 우리의 이 이상한 관계가 성립될 수 있었을까? 너는 야구를 못하는 내가 다른 것도 다 못한다고 생각하는 걸까? 그래서 나한테 자ㄲ......
- 같이 있고 싶어서 그런거잖아요!
......딸꾹질이 나올 뻔했다. 빽 하고 내지른 소리가 너무 커서.
- 같이 있고 싶어하면, 안 돼요?
그리고 타쿠야가 나에게 이런 적이 처음이라서.
- ......
- ......
- ......
나는 놀라서 타쿠야를 쳐다보았다. 씩씩거리며 숨을 몰아쉬고 있었다. 이번에는 타쿠야가 먼저 내 시선을 피했다. 반쯤 돌아간 고개 아래로 뻗은 목이 빨갛게 달아올라 있었다. 내가 타쿠야를 이토록 화나게 한 적은 처음이었다. 반대의 상황은 잦았어도, 타쿠야가 나에게 화낸 적은 없었다. 처음에는 당황스러웠고 그 다음에는 되려 내가 더 화가 났다. 신발주머니를 쥔 손에 힘이 꾹 들어갔다. 절박하기까지 한 타쿠야의 마지막 말이 잔상처럼 뇌를 쿵쿵 울렸지만, 나는 원래부터가 내 자존심이 더 중요한 놈이었다. 그리고 다 잘난 너는 내 앞에서만큼은 자존심 세울 필요가 없다고 생각했다. 너는 곧 후회하는 표정으로 돌아왔지만, 나는 이미 늦었다고 판단했다.
- 너랑 아무것도 같이 하지 않을 거야.
- ......
- 말도 걸지 마.
주문을 걸듯이 속으로 되뇌였다. 나는 잘못한 게 없다고.
그리고 사흘이 지났다. 아무 일도 없이. 아무 접점 없이. 남남같은 시간이.
* *
디펜스 연습을 하는 중에도 정신 차려라는 코치님의 고함만 대여섯 번은 들은 것 같다. 자세 낮추고 볼을 쫓으라는데, 음성만 귀에 턱턱 부딪칠뿐, 무슨 의미인지 하나도 알아먹지 못 했다. 결국 나 때문에 연습이 잠깐 중단 됐다. 코치님의 표정이 험악하게 굳어졌다. 옆에 있던 동기는 소위 말해 타겟이 된 내 신세가 안타까웠는지 잘 좀 해보라고 속삭였다. 코치님이 직접 배트로 볼을 몇 개 쳤다. 그리고 나는 다섯 개면 다섯 개 다 캐치하지 못 했다. 코치님이 손짓으로 나를 불렀다. 손에 있던 장갑 벗으시는걸 보고,
- 이 새끼가 오늘 진짜 ...
직감적으로 맞겠다는 걸 실감했다.
- 똑바로 안 해?
배트를 내려놓은 코치님이 내 뺨을 한 차례 갈겼다. 쩍 소리가 나더니 얼굴이 돌아갔다. 너무 세게 얻어맞으면 처음 1, 2초 동안은 통증이 없는 법이다. 그 시간이 지나고 나면 쓰라림이 밀려온다. 나는 움직이지도 않았는데 볼이 마구 떨렸다. 다른 포지션에서 연습하고 있던 애들마저도 이 쪽을 주목했다. 내가 대답이 없자 코치님은 그것을 일종의 반항이라고 생각했는지, 내 야구모를 잡아 벗겼다. 무슨무슨 새끼 거리면서 쏟아내는 육성이 거칠다. 그러나 내 귀엔 제대로 들리지 않는다. 열중쉬어 자세를 하고 있던 내 몸이 철렁 하고 흔들렸다. 머리가 웅웅거렸다. 잠깐 주춤했지만 나는 곧바로 중심을 잡고 섰다. 코치님이 내 머리통을 갈겼다. 머리를 맞아본 적은 난생 처음이다.
- 대답 안 해?!
- ......아닙니다.
- 볼 왜 캐치 못 해? 손 없어?
- 아닙니다.
- 대답은 왜 안 해? 야구 하기 싫어? 때려쳐, 그럼.
나는 죄송하다는 의미로 고개를 숙였다. 고개를 숙이기 무섭게 뒷목을 얻어맞았다. 다행히 맞는건 그걸로 끝이었다. 코치님은 똑바로 하라는 경고를 끝으로 다시 흰색 플라스틱 의자에 앉아서 휘슬을 불었다. 연습을 재개하라는 의미였다. 우리는 일사분란하게 원래 자리로 흩어졌고, 다시 디펜스 연습이 진행됐다. 동기들은 나에게 괜찮다며 엉덩이나 어깨를 두드려 주기도 했다. 후배들은 괜히 수건을 건네왔다. 누군가 혼났을 때, 운동부가 흔히들 하는 위로 내지는 격려같은 것이었다. 하지만 그런 중에도 너는 없었다. 너는 무심하게 제 할 일을 할뿐이었다. 너의 디펜스는 완벽했다. 타자가 던지는 볼을 전부 캐치한 네가 유유히 맨 뒤로 가 서 있다. 동기들과 잠깐 이야기를 하거나, 물을 마시긴 해도, 그 행위들 속에 나를 위한 것은 없었다.
아까 맞았을 땐 없던 서러움이 이제서야 폭발할 것 같다.
- 으, 어떡하냐. 볼 다 부었어.
- 입 안 터진거 아냐?
동기들은 연습에 틈이 생길 때마다 내 쪽으로 와서 볼을 이리저리 돌려보며 나를 걱정했다. 시합 기간도 아니라서 맞을 일이 없던 찰나에, 간만에 걸려든 게 나였으니. 어쨌든 오늘은 나 때문에 분위기가 깽판이 된 셈이다. 나는 동기들이 그럴 때마다 괜찮다는 말로 걔들을 돌려보냈다. 사실 속은 전혀 괜찮지 않았다. 이쯤되면 정말 헷갈린다. 그토록 코치님 눈 밖에 나지 않으려고 필사적으로 기울이던 노력이 다 물거품이 되어서 나는 지금 이렇게 울고 싶은 건지, 그게 아니라면 내가 이렇게 힘든데도 혼자서 멀쩡한 너를 보면 배알이 꼴려서 그런건지. 만약 이 가설이 둘 다 아니라면, 네가 더 이상 나에게 다정하지 않아서, 그래서 단지 그 두 가지를 빌미로 울고 싶은 건지.
- 수고하셨습니다!
어떻게 연습이 끝났는지조차 모르겠다. 볼을 부여잡고 락커룸으로 왔을뿐이다.
- 아 요즘 연습 너무 빡쎄.....
- 다음 주면 전지 훈련이다.
- 벌써 그렇게 됐냐아
- 벌써같은 소리 하네. 올해는 좀 늦은 거지.
동기들 틈에 섞여 야구화 끈을 풀고, 락커룸으로 와서 땀으로 끈적한 유니폼을 떼어내는건 평소의 생활과 다를 게 하나도 없는데도 내 주변의 모든 것이 변했다. 그건 기분 탓으로 치부해버릴게 아니라, 나의 확신이 되어있었다. 락커 앞에 서서 옷을 벗는데 나는 육지로부터 동떨어진 섬이 된 듯한 기분이었다. 전지 훈련에 대해 한 마디씩 거드는 왁자지껄함이, 나와 전혀 관련 없는 일처럼 표백되었다. 내 머릿속을 온통 들쑤셔놓는건, 그 날, 내가 타쿠야에게 처음으로 먼저 입을 맞췄던 날, 아무도 없는 여기 락커룸에서 타쿠야가 나에게 고맙다고 해주었던 장면이고, 뒤따라 이어졌던 키스이고, 그 때의 모든 것뿐이다. 좋았던 기억뿐이다.
나는 우리가 무슨 사이인지에 대해 끊임없이 생각했다. 그리고 멋대로 아무 사이도 아니라는 결론을 도출했으며, 가장 표면적인 사이라고 여겨지는 선후배 라는 선을 타쿠야가 넘어올라치면 더 선명한 선을 긋고는 나를 합리화시켰다. 우린 아무 사이도 아니니까 이 정도 거리감은 필요하다고. 하지만 정작 정말 아무것도 아닌 사이로 전락해버리자 우울함을 느끼고 있는건 내 쪽이다. 내 마음속 깊은 곳을 뜯어내버리고 싶다. 아무 사이도 아니라는 말로 눈 앞을 가리는 동안, 손 뻗으면 닿을 거리에 있었던 진짜 감정은 우리 사이를 뭐라고 말했을까?
- 위안아, 너, 울어?
나는 울고 있다.
- 아니. 안 울어.
- 야, 왜 울어? 어디 다쳤냐? 연습할때 코치님한테 혼난 것때문에 그래?
- 선배 울어요?
- 갑자기 왜 그래, 많이 힘들어?
내 위로 쏟아지는 수많은 목소리들 틈으로 하나의 소리만 명확하다. 같이 있고 싶어하면, 안 돼요? 윽박 지르는 소리가 귓전에 두고두고 되풀이 된다. 나는 이제서야 대답할 수 있다. 너랑 같이 있고 싶다고. 무슨 사이인지, 그런건 상관 없으니까 그냥 예전으로 돌아가고 싶다고. 이런 내가 추레할까. 선배 소리를 입에 달고 살면서, 고작 며칠의 침묵에도 울음을 터트리는 나한테 더 이상 여지같은건 남지 않은 걸까. 그러니까, 그러니까 나는, 정말 이러고 싶었던게 아닌데. 이러려던게 아닌데.
- 제가 달래고 올게요.
우글거리는 틈으로 타쿠야가 비집고 들어온걸 알았다. 나는 더 서럽게 울었다. 애들은 평소 다정하고 차분한 타쿠야가 나를 잘 달래줄 것이라고 판단했는지 그래라는 말 외에 다른 토를 달지 않았다. 타쿠야는 아무 말도 없이 자기 락커에서 흰색 반팔 티를 꺼내더니, 우는데 쓰인 내 유니폼을 세탁기 주변에 던져버리고 그것을 입혀주었다. 내일 써야할 팀 수건으로 내 눈물을 닦아준다. 나가요, 하며 내 손목을 끌고 나간다. 왜 안심이 되는지 모르겠다. 왜 이러길 바랐다는 듯이 끌려나가는지 모르겠다. 숙소 뒷 편까지 와서야 잡힌 손목을 놓아준다. 마른 눈물 위로 찬 바람이 스쳤다. 말을 먼저 꺼낸 것은 타쿠야였다.
- 왜 울어요.
- ......몰라.
- 연습이 힘들었어요? 아니면, 진짜 어디 다쳤어요?
- ......그런거 아닌거 알잖아.
- 알면 뭐가 달라지는데요?
- 그런 말투 하지마.
- 이런 말투가 뭔데요.
- 나 아파.
- ...많이 아파요?
- 그러니까 안아줘.
- ...네?
- 안아주고, 걱정해주고, 울어서 얼굴이 부어도 좋다고 말해주고, 오늘 코치님한테 맞은건 많이 아프냐고, 어디가 아프냐고, 나랑 같이 있고 싶다고, 그렇다고 말해.
- ......
- 나만 힘든게 아니라, 너도 힘들었다고 말해.
타쿠야가 나를 끌어당겨 안았다. 타쿠야 품 안에 내가 있다는게 느껴졌다. 타쿠야가 나를 끌어안은 상태로 중얼거렸다. 힘들었다고, 보고싶었다고, 계속 걱정했다고 중얼거린다. 목소리가 격양된 채 젖어있다. 나는 그 애의 허리를 좀 더 꽉 끌어안았다. 한 시라도 떨어지기 싫다는듯, 이대로 들켜도 상관 없다는듯 세게 끌어안았다. 그것은 늘어붙은 현재를 깨우는 각성제같았다. 나는 드디어 과거에서 벗어나 지금 이 순간 속에 존재할 수 있게 되었다. 그 흔한 좋다, 싫다의 잣대로 매길 수 없는 감정들이 내 세포 구석구석에 동력을 달았다. 그렇게 추켜세우던 자존심이 구부러졌다. 하지만 속이 시원했다.
* *
본격 운동부 현실 고발 팬픽
BGM - One thing , One direction
* * 재업. 규칙 위반이란 것은 안다만, 읽는 사람이 보기 편해야된다고 생각해.^^ 다시 이동 당하는건 그 때 생각하는걸로. 글잡에서도 동일글 볼 수 있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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