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 본래 나는 다른사람과 같이 있는것을 좋아하는 편이 아니기도 했다. 가족 외의 다른사람을 좋아하지 않았다. 부모님이 안 계시다는 걸, 아니, 죽었다는 걸. 그 사실을 덤덤하게 말 할 수 있을때가 한참 되었었고, 다른 사람들의 시선, 생각이 어떻든간에 나는 항상 자발적으로 혼자 행동했으며 또 그것을 원했다. 세 명이 누우면 다 찰 듯한 그 좁은 공간에서, 혼자서 작은 노트에 연필로 자그맣게 적은 글씨들을 썼다 지웠다 하는게 좋았다. 고요한 방 안에서 홀로 짙게 사각거리는 연필, 그 소리가 끊길 때 즈음 둥그런 가루를 만들어 내며 단단한 소리를 내던 지우개가 좋았다. 그렇게 하염없이 피곤한 것도 모른 채 글을 적어내려가다보면, 살짝 열린 창문 밖에서부터 까만 그림자를 들춰내는 주황빛 은은한 새벽빛이 좋았다. 잠깐 방의 문을 열면 싸늘하지만 동시에 저며있던 가슴을 풀어주는 맑은 공기가 방 안을 가득 채웠다. 나는 언제나 항상 그렇게 하루를 시작했다.
01. 당연하듯 쉬는시간, 수업시간 할 것 없이 항상 그 초록색의 작은 노트는 내 손에 쥐어져 있었다. 현재의 감정, 그리고 그것을 묘사할 무언가가 떠오르면 여느때나 펼쳐두고는 길게 적어내려갔다. 가끔씩 누군가가 그것을 뺏어내 읽으며 키득거릴때도 있었지만, 항상 별 대수롭지 않게 넘겼다. 오히려 얼굴을 마주해 한번 미소지어주면 제 웃음으로 나를 흔들 수 있을거라고 생각했는지 적잖게 당황하는 모습이 얼굴빛에 적나라하게 드러나곤 했다. 그러나 그때, 사물함에 기대 유독 이 쪽을 쳐다보고 있던 누군가가 그 노트를 쉽게 잡아 빼고는 내게 쥐어주었다. 그의 얼굴은 살짝 놀란 눈치의 내 얼굴에 부합하듯 얕은 미소를 띄우고 있었으며, 그의 뚜렷한 얼굴을 멍하니 훑다 재빨리 눈을 피하니 그는 내 손을 잡아오며 그 특유의 장난끼가 섞인, 그러나 꽤나 진중한 말투로 말했다. 글 잘 쓰더라, 허락없이 읽은 건 미안. 마치 무언가 들어서는 안될 말을 들은 것 처럼 심장이 조금씩 불규칙적으로 뛰기 시작했고, 동시에 약간의 울렁거림도 찾아오기 시작했다. 장동민. 끝이 닳아 살짝 실이 풀린 그 파란색 명찰 위 하얀색 이름이… 나는, 좋았다.
02. 내가 읽던 시집에 책갈피처럼 구겨져 눌려있는, 줄기가 반 토막 이상 잘린듯한 하얀 국화꽃을 보며 너는 물었다. 이렇게 큰 꽃을 왜 꽃아놔? 나는 그저 아무말 없이 앞에 앉아 내 얼굴을 빤히 쳐다보는 너에 활짝 미소지으며 애써 다른 답을 내놓았다. 너랑 닮아서. 사실 나는 지금은 이 이유가 더 맞다고, 스스로 확신하고 있었다. 눌려 누렇게 멍들어버린 기다란 하얀색 꽃잎에는 조금 번진 검은색 볼펜으로 익숙한 날짜가 쓰여져 있었다. … 2014년 7월 20일. 내가 가끔 낯 간지러운 말을 할때면 얼굴이 붉어지며 애써 다른말로 그 붉은 얼굴을 감추려고 하던 평소의 너와 달리 넌 아무 말 없이 웃으며 납작한 꽃을 조심히 들고는 내게 안겼다. 오늘따라 틱틱대지 않는 너에 팔을 뻗어 조금 더 세게 밀착하자 너는 얼굴에 열이 오르는지 이내 목을 조금 가다듬고는 팔을 조금씩 움직여 꽃을 만지작댔다. 7월 20일? 어, 이거 내 생일이잖아. 나는 조용히 몸을 떼고는 벌벌 떨리는 손으로 네 손의 국화꽃을 빼내 제 자리에 끼워넣고는 다시금 책을 덮었다. 그리고, 쓸 일이 별로 없어 필통 맨 끝 구석에 자리잡고 있던 커터칼을 꺼내들었다. 피와 살 조각이 섞여 굳어버리는 바람에 이제 더는 쓸 수 없을 것 같아 보였다.
03. 책상 위에 항상 놓여있던 초록색 노트 대신 덩그러니 파란 커버의 달력만 한복판에 놓여있었다. 양면으로 2014, 2015년을 모두 볼 수 있는 달력. 달력을 들어 손으로 받치고선 2014년의 7월 부근을 들춰보니 새까만 매직으로 온 종이가 찢길 듯 칠해져 있었다. 손을 대 보자 종이가 일어나 울퉁불퉁한 겉면이 만져져 마음에 들지 않아 이내 뒤로 넘겨보니 2015년의 7월 달력이 보였고, 빨간색 볼펜의 꽤나 예쁜 글씨로 '장 생일' 이라 적혀져 있었으며 까만 매직이 비쳐 살짝 노란 종이의 색깔이 어둡게 보였다. 등받이가 없는 낮은 의자에 살짝 걸터앉으니 발을 움직일 때마다 바닥에 나뒹구는 부러진 연필과 조각나버린 지우개가 자꾸만 걸려왔다. 역시, 그렇다니까. 나는 …, 나는 안 돼. 얇게 뻗은 머리카락을 손으로 잡아 뜯 듯 감싸쥐며 이를 꽉 깨물었다. 차가운 볼 위로 뜨거운 눈물 줄기가 타고 하염없이 흘렀다.
04. 경찰들은 내가 사고로 인해 정신적 충격을 입었다며 몇 주 간 학교를 가지 않아도 좋다고 했다. 나는 그 동안 물에 젖어버린 이전 노트 대신 새로운 무제노트를 사 장동민, 즉 장에 대한 글을 적어내려가기 시작했다. 마음은 확인 할 방도가 없지만, 적어도 몸은 너와 항상 함께 있었다. 우리 관계는 이제 더할 나위 없이 완벽했다. 머릿속이 온통 너로 가득 차올라 그 생각들이 가끔 은폐에 관한것들을 잊게 하기도 했다.
[ 소년은 국화꽃 한 송이를 주웠고, 그것은 두 종류의 잉크로 물들어 있었다. 하나는 그리움, 좋아함, 엇갈림 등의 것 이였고, 나머지 하나는 좋아함, 사랑, 악연 등의 것 이였다.
여기서 비극적인 사실은, 소년은 그 두 종류의 잉크를 모두 좋아했다는 것이다. ]
* 2015년 5월 10일 오전 11시 20분
"동민아, 좋아해서 미안해."
"얘가, 무슨 그런말을 해."
"나 때문에 오늘 체육시간에도 넘어진거잖아."
"지/랄. 아니거든, 됐고요. 들고있는 파스나 좀 붙여줘."
"…미안."

인스티즈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