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서 오세요 고객님, 무엇을 도와드릴까요?
요즘 잘 나가는 향수 추천 좀 해주세요.
네, 고객님. 혹시 선물하실 거세요? 연령대가 어떻게 되시나요?
20대 중후반이던가.
눈이 부실 정도로 환한 백화점 조명 아래에서 동민은 신기한 듯 향수병을 여러 번 들었다 놨다 부산스럽게 움직인다. 둥글고 흰 테이블 위에는 브랜드에서 나온 향수가 종류별로 구분되어 있었다. 동민을 응대하는 점원은 시향지에 여러 종류의 향수를 뿌려가며 하나씩 손에 쥐어주었다. 동민은 시향지를 8개나 손에 쥔 채 연신 코를 킁킁대고 있었다. 하도 여러 냄새를 맡아 이제 그 냄새가 그 냄새일 텐데도 예민한 자기는 구분할 수 있다며 우겨대는 일 역시 빼놓지 않았다.
옆에서 그런 동민을 구경하던 진호가 이쪽으로 다가온다. 재미가 없는지 구석에 서서 연신 핸드폰게임을 하던 진호는 3판이나 내리 져서 기분이 몹시 좋지 않은 상태다. 동민은 진호에게 대뜸 시향지를 내민다.
어떤 게 나을 것 같아? 이거? 이거? 아님 이거?
아 몰라몰라. 아무거나 골라아.
진호는 동민의 어깨에 손을 턱 올려놓고 동민이 시향지를 들이 댈 때마다 진절머리를 친다. 그게 귀여워서 동민은 자꾸 진호를 놀려주고 싶었다. 친한 여자 후배의 생일선물을 사러 간다고 했을 때 질투하며 불같이 화를 낼 줄 알았던 진호는 의외로 순순히 허락하며 친히 따라 와 선물 고르는 것을 도와준다고 까지 말을 했었다. 뭐 지금 이러는 게 돕는 거라면 돕는 거겠지만.
요즘 꽃향기도 잘 나가는데 플로럴 계열은 관심 없으세요? 이거 저희 신제품인데.
점원은 또 시향지에 향수를 뿌려 동민의 코 끝에 들이댄다. 뭐가 그렇게 좋은지 동민은 눈을 감고 향을 느끼고 있었다. 아니 저건 백프로 느끼는 척이다. 진호는 입을 비죽인다. 아무리 천연 재료로 만들었다고 해도 진호에게 향수 냄새는 독하기만 했다. 옆에 있던 자신도 독한 향수를 하도 곁에서 뿌려대 코가 마비되어 냄새 구분이 가지 않을 정돈데 무슨 조향사도 아니고 동민은 향에 대해 비평까지 하고 있었다. 대단한 향수평론가 나셨네!
음..사과 냄새도 약간 나는 것 같은데.
어떻게 아셨어요 고객님? 어머어머 정말 코가 예민하신가보다.
점원은 옆에서 연신 박수를 치며 동민의 후각을 칭찬하기 바쁘다. 조금만 더 있다간 오구오구 내새끼 잘 한다라는 말이 육성으로 튀어나올 것 같았다. 탑 노트는 작약꽃이 어쩌고 저쩌고 진호는 모르는 외계어가 두 사람 사이를 신나게 오고 간다. 해도해도 이건 너무한거였다. 진호의 이런 심정을 아는지 모르는지 동민은 충청인답게 느릿느릿 향을 맡고 느릿느릿 생각하고 느릿느릿 골랐다. 점점 깎여가던 인내심이 바닥을 칠 때 즈음 동민이 이걸로 할께요 하고 드디어 결정을 내린다. 진호는 속으로 이를 갈며 저 물건 살 때 고심 해 보는 결정장애부터 고쳐야겠다고 단단히 다짐했다.
계산을 하고 돌아 선 동민이 진호의 등을 탁 치며 말한다.
오늘은 웬일로 니가 얌전히 있냐? 평소에는 5분도 못 참고 빨리 집에 가자고 보채는 놈이.. 따라온 김에 너도 향수 하나 사줄까?
뭐? 또 향수를 보러 가자고? 싫어. 나 그런거 안뿌려
왜 좀 뿌리면 어때서. 너 한번도 향수 보러 다닌 적 없지?
내가 형인지 알아? 형처럼 그렇게 향수 모으고 싶은 마음도 없고 뿌리고 싶은 마음도 없어. 그리고 난 원래 좋은 냄새 나서 향수같은거 안뿌려도 돼.
동민은 풋 하고 입까지 손으로 가리고 웃었다. 그걸로도 모자라 백화점 복도 한가운데서 방정맞게 깔깔거리기 시작하더니 진호를 손가락으로 가리키며 말한다.
여러분, 홍진호가 자기한테서 좋은 냄새 난다고 한대요. 너한테서 좋은 냄새가 난다구? 너 그 말 자신 있어? 좋은 냄새가 아니라 담배 쩐내 아님 홀애비 냄새겠지. 집 좀 치우고 살어.
발끈한 진호는 동민의 목을 잡고 마구 흔들었다. 캑캑거리면서도 동민은 웃는 것을 멈추지 않았다. 한참을 붙어서 투닥대던 두 사람은 곧 지쳐서 헐떡이며 떨어졌다.
야, 사준다고 할 때 그냥 받어. 나도 좋은 냄새 좀 맡자.
아니 왜? 내 냄새가 어때서!
너 니 손 냄새 지금 니가 맡아봐. 어?
동민은 진호의 손을 잡아 코 밑에 아얘 들이댄다.
좋은 냄새밖에 안 나는 구만.
그게 좋은 냄새냐? 너 비염있냐? 그러니까 내가 담배 좀 적당히 피라고 했지?
진호는 다시 한번 자기 손 냄새를 맡아 본다. 아무리 맡아봐도 별 냄새 안 나는 것을 동민이 유독 호들갑이라는 생각이 든다. 옆에서 진호를 못마땅하게 쳐다보던 동민이 척하니 자기 손을 내민다. 확실히 동민의 손에선 좋은 냄새가 났다.
이런걸 바로 좋은 냄새라고 하는 거야.
어 진짜 좋은 냄새나.
그래 이새꺄. 이제 좀 알겠어?
응. 근데 형은 핸드크림으로 떡칠한 냄새잖아.
이게 진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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싫어. 싫어. 이것도 싫어.
결국 진호는 동민에게 질질 끌려다니며 남성 향수를 파는 브랜드들을 뺑이치는 신세가 되었다. 하지만 진호역시 호락호락하지 않았다. 선물 받았다 뿐이지 직접 향수를 골라본 적이 없다는 진호는 무슨 기준인지 동민이 골라주는 향수마다 전부 다 퇴짜를 놨다. 자꾸 이렇게 거절해서 내 맘에 드는 게 없네 하고 빠져나갈 생각이면 가만 두지 않겠다고 으름장까지 놨지만 진호는 미간을 찌푸린 채 가만히 고개를 저을 뿐이었다.
야. 뭐 그렇게 기준이 까다로워. 그냥 내가 골라주는 거 뿌려!
싫어. 내가 뿌리고 다닐 건데 나도 내가 맡기 좋은 냄새 맡고 싶어.
어차피 뿌리지도 않을 놈이.
형이 선물한 거니까 뿌리고 다닐게.
진호의 진지한 눈빛에 동민은 불평을 눌러 삼켰다. 뭘 알지도 못하는 놈이 왜 이렇게 까다로운지 짜증이 나는 동시에 오기가 생겼다. 기필코 맘에 드는 향수를 찾아다 주리라고 결심한 동민은 더 열정적으로 진호를 이리저리 끌고 다녔다. 얼마 지나지 않아 진호는 다리가 아프다며 징징거렸고 정말 바닥에 주저앉은 전적이 있는 진호 때문에 덜컥 겁이 난 동민은 진호를 끌고 의자가 있는 곳으로 향했다. 얌전히 끌려가는가 싶던 진호는 한 브랜드 앞에서 걸음을 딱 멈췄다.
그냥 여기서 사고 가면 안돼?
시키지도 않았는데 진호는 향수를 팔목에 척 뿌리고 냄새를 맡더니 이게 마음에 든다며 이걸로 사자고 우기기 시작했다. 누가 봐도 이대로 가다간 백화점에 입점 된 모든 브랜드를 다 들어갈 기세인 동민이 무서워서 낸 꼼수였다. 동민은 곁으로 다가가 진호의 팔목 냄새를 맡는다.
시원한 향이네.
응. 나 시원한 향이 좋아.
별 특징이 없는 거 같지 않아?
아. 아까 형이 골라 준 향들도 다 특징 없었어.
동민은 인상을 쓰고 고민하기 시작한다. 진호는 동민이 매니저에게 가로수길 어딘가에 있다던 남자 향수 편집숍에 대해 물어보겠다고 말했던 것을 기억하며 제발 그냥 이걸로 향수 쇼핑이 끝이 나길 간절히 빌었다.
좀 더 돌아보고 올게요.
마법의 그 말과 함께 동민은 굳어있는 진호를 끌고 바로 옆 가게로 향한다. 진호는 정말로 7살짜리 어린 애처럼 바닥에 털퍼덕 주저 앉아 엄마 언제 집에가? 하고 말하고 싶은 심정이었다.
여기 이건 어때?
육각형 모양의 까만 뚜껑이 달린 향수를 동민이 내민다. 허락하지도 않았는데 대뜸 진호의 손목에 향수를 뿌린 동민은 팔목을 가져다가 냄새를 맡았다.
난 이거 괜찮은 거 같은데.
동민이 골라 준 향수는 꽃향기와 나무향기가 섞인 미묘한 향이 나는 향수였다. 남자 점원은 가벼운 플로럴 향과 우디향이 섞인 감각적이고 세련된 향수라고 입을 털었다. 아니 가벼우면 가벼운 거고 무거우면 무거운 거지 가볍고 무거운 건 또 뭐야? 동민은 점원과 함께 맞장구를 치며 이게 너한테 딱 이라고 초롱초롱한 눈빛 빔을 보내온다.
다시 천천히 냄새를 맡아보니 진호도 사실 싫지 않았다. 은은하게 왠지 담배냄새가 묘하게 섞여 나는 것 같기도 했다. 점원은 파리 남자들이 이 향수가 처음 출시되자마자 모조리 달려들어 매진이 되었다며 제품을 선전하기 바빴다. 이대로 형 말대로 하자는 말만 하면 이 지루한 향수 쇼핑이 끝이 나는데도 진호는 어쩐지 그냥 순순히 동민이 하자는 대로 하는 것이 억울했다.
괜찮긴 한데, 난 아까 그게 더 마음에 들어.
동민은 어이 없다는 표정으로 입을 딱 벌렸다.
야. 이게 너한테 딱이라니까? 너랑 니 그 독한 담배냄새에는 이 향수가 딱이야!
너는 볼 줄 모른다는 둥 아까 그건 담배냄새랑 섞이면 구역질 나는 냄새가 될 거라는 둥 동민은 옆에서 열심히 진호를 설득했지만 진호는 꿈쩍도 하지 않았다. 오늘 동민이 하자는 대로 실컷 끌려 다녔으니 마지막이라도 원하는 대로 해야겠다는 심보였다. 사실 아까 그 냄새나 이 냄새나 진호에게는 그게 그거이기도 했다. 동민이 보는 안목이 탁월한 건 사실이었지만 어차피 향수라는 게 다 거기서거기 아니겠는가.
결국 백화점 문 닫을 시간이 되어서야 동민은 진호가 고른 향수를 사는 것을 허락했다. 아슬아슬하게 카드 결제를 끝낸 뒤 동민은 화장실을 가겠다며 진호를 쉬는 곳에 남겨두고 쌩하니 가버렸다. 진호는 어느새 깜깜해진 밖을 보며 허탈하게 웃었다. 오늘은 좀 제대로 얼굴 좀 보는가 싶었더니 허무하기 짝이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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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장실에 간다고 몸을 피한 동민은 백화점을 한 바퀴 빙 돌아 다시 아까 마음에 드는 향수가 있던 브랜드로 갔다. 아무리 생각해도 진호에게는 이 향수가 딱 이었다. 향수를 사고 결제한 동민은 아까 진호가 고른 향수의 포장을 풀고 향수를 꺼낸 뒤 자기가 산 향수를 몰래 집어 넣었다. 집에 가서 포장을 풀어보면 진호는 향수가 바꿔치기된 것을 알고 길길이 날뛰겠지만 뭐 어쩌겠는가. 진호가 고른 향수는 솔직히 구려도 너무 구렸다. 그런 구린 향을 또 형이 사준 향수니까 라며 신나게 뿌리고 다닐 진호를 생각하면 넌덜머리가 났다. 집에 가서 향수를 풀어 보고 바로 동민에게 전화를 걸어 펄펄 뛸 진호를 떠올리며 동민은 낄낄거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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돌아온 동민은 뭐가 좋은지 함박웃음을 짓고 있었다.
화장실 많이 급했나 봐?
평소대로라면 딱밤이라도 먹여야 할 동민이었지만 오늘은 이상하게 아무런 반응이 없었다. 떨렁떨렁 들고 온 브랜드 봉투를 진호에게 안기며 동민은 이제 빨리 집에 가자고 진호를 조른다. 한숨을 팍 쉬며 진호는 자리에서 일어나 백화점 입구로 향한다.
내가 사준 거니까 꼭 맨날 뿌리고 다녀.
극성이라고 생각하면서도 진호는 고개를 끄덕인다.
알았어 형. 진짜 꼭 뿌리고 다닐게.
꼭이야. 너 약속했어. 다음에 나 만날 때 이거 꼭 뿌리고 나와.
알았다니까.
향수가 바꿔치기 된 줄 까맣게 모르고 있는 진호를 보자 동민은 자꾸만 비죽비죽 웃음이 나왔다. 뭘 그렇게 웃냐며 핀잔을 주는데도 어쩔 수가 없었다. 가만히 진호의 손을 잡아 끌며 동민이 속삭인다.
약속해, 홍진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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완전 늦은 지각쟁이네 ㅠ 전력 너무 늦게 시작한게 화근이다 ㅠㅠㅠ
다음번엔 절대 지각 안하도록 해야겠어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다들 꽃 제목으로 해서 나도 꽃 제목으로.. 진호 향수에 베르가못 꽃이 들어가서 꽃이라고 우겨 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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