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해수야, 먼저 가서 날 기다려다오. 금방 갈게. "
.
.
.
벌써 한달이 지났다. 그가 나에게 한 말도, 내가 고려에서 대한민국으로 온 지도.
눈을 떴더니 보이는 곳은 병원 천장이었다. 내가 쓰러져서는 일어날 기미도 안 보였단다. 기적이라더라.
엄마가 그러는데 자는 내내 잠꼬대로 무슨 황자 님을 자꾸 얼버무린다고 무슨 꿈을 그리 계속 꾸냐하신다. 나도 참,
나는 고려에서 돌아온 지 일주일 후에 퇴원을 했다.
퇴원 후, 화장품 가게 직원 고하진을 그만두었다. 괜히 생각이 날까 봐 두려웠다.
날 찾아온다면서.. 일주일이 지났지만 누구도 날 찾아오지 않는다. 내게 용서를 구해야할 그 아이들도.
얼마 후, 나는 향수 가게 직원 고하진이 되었다.
그래. 화장품보단 향수가 낫다. 지독한 향수 냄새들이 가끔 내 기억을 잊게 해준다.
고려에서 맡았던 수수한 향기들, 은은했던 꽃내음, 그리고 그 사람의 품에 안길 때마다 났던 향기 등 거기서 겪었던 모든 것들을.
날이 지날수록 고하진의 일상은 점점 돌아왔다.
퇴원하고 처음으로 친구들을 만나러 갔는데 한 친구가 내게 그러더라. 그 자식은 잊고 새 사랑을 시작하라고.
네가 황자 님을 어찌 알고.. 라 생각하다가 문득 떠올랐다.
' 아 맞다, 나 한국에서 남자친구한테 호되게 차였지? '
그 사실까지 까먹을 정도로 고려에서 열정적으로 사랑했나 보다 하고 피식 웃었다.
해수에서 고하진으로 돌아온 지도 한 달이 지나간다.
이제는 해수 시절 기억이 가물가물해지려 한다.
'아, 나 그때처럼 어린 나이는 아니지?' 라며 내 나이를 곱씹으며 나는 어김없이 향수가게에서 손님을 기다리는 중이다.
따르륵 -
문이 열리는 소리다.
" 어서 오세.. "
말문이 막혀버렸다. 1000년 전에 살았던 사람이 지금 내 앞에 있다면 믿을 텐가?
눈, 코, 입, 눈 주변에 그때처럼 큰 상처는 아니지만 작게나마 상처도 있다.
믿을 수가 없다. 그 사람이다.
" 향수 하나만 얼른 추천해줘요. 급하니까 얼른요. "
"......"
날 기억할 것처럼 굴더니 새까맣게 잊었나 보다.
얼굴을 보고 놀란 마음이 원망으로 바뀌려 한다.
날 찾아온다면서 이런 식으로 찾아오다니, 정말 날 기억하지 못하는 걸까?
눈물이 난다. 그 사람을 빼다 박은 것처럼 닮은 저 사람을 보자마자 눈물부터 난다.
" 저기요, 뭐 합니까? 안 골라주고. "
아, 참. 나 고하진이지. 궁상맞게 눈물이 나 흘리네.
일해야지. 언제까지 그 생각만 하고 있을래?
" 네 손님. 죄송해요. 제가 아는 분과 많이 닮아서 잠시 멍 때렸네요.
손님께서 잘 어울리실 향은 이 제품일 것 같네요.
첫 향은 강하지만 시간이 지나면 잔향이 은은하게 남아요 "
사실 추천해준 향수는 내가 이 가게에서 일하면서 시간이 날 때 향수 시향을 했었는데 그때 그 사람과 잘 어울리는 향수를 발견했었다.
그의 첫인상과 현재 그를 향한 내 마음을 담은 듯한 향수였다.
" 이걸로 계산해주세요.
그런데 제가 많이 닮았나 봐요. 그 사람을 많이 좋아했나 봅니다. 눈물도 흘리시고. "
"네. 많이요. 아주 많이요..
좋아한 걸 넘어서 사랑했어요. 시대를 초월했지만 그래도 많이 사랑했나 봐요. 고하진으로 돌아오기 싫을 정도였어요.
그런데, 점점 잊히고 있었어요.. 무서웠는데 손님이 다시 기억하게 해주셨네요.
하하. 저도 참. 처음 보는 손님에게 이런 소리를 하다니.
자, 손님 계산 다 되었습니다. 좋은 하루 보내세요 "
" 타이밍 한 번 좋네. 잊힐 때쯤 찾아오다니.
우리 인연이 참 깊은 거 같아요. 그 사람도 많이 사랑했을 겁니다. 고하진 씨. 아니 해수야.
..늦게 와서 미안하구나. 보고 싶었다. "
해수..? 늦게 와서 미안해..?
무언가 내 머리를 쾅 하고 때리는 느낌이다.
이해를 하고 정신을 차려보니 내 눈에서는 눈물이 흐르고 있다.
황자 님을 빼다 박은 것처럼 닮은 이 사람을 보니 나를 보며 웃고 있다.
그 모습은 마치 고려로 돌아간 듯했다. 나도 해수로 돌아간 느낌이다.
정말 내가 기다렸던 4황자님인가요, 황자님?
" 황자님..? "
" 보고싶었다. 해수야. "


인스티즈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