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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제와 황후의 첫날 밤.
적막만이 감도는 침전 안에서 먼저 말꼬리를 튼 것은 다름 아닌 황후, 연화였다. 폐하, 신첩이 아직 가채가 익숙지 못한 탓에 점점 힘이 듭니다. 이제 가채를 손수 내려주시지 않으시겠습니까? 혼주만 벌컥 마시던 황제, 소의 움직임이 멈추었다. 이내 고개를 들어 이제 자신의 반려가 된 연화를 물끄러미 바라보는 소. 고왔다. 연화는 이 고려 최고의 미인이라 할 수 있을 만큼 제법 곱고 사뭇 아리따웠다. 한참을 연화의 얼굴만 바라보던 소가 몸을 일으켜 연화에게 다가갔다. 친히 무릎을 꿇고 연화의 가채에 꽂혀있는 장신구를 하나 하나 거두고 있는 소에게 연화가 말을 걸었다.
" 제법 곱지 않습니까, 폐하? "
" … 그래. 곱구나. "
" 그 아이 솜씨입니다. "
" … 뭐라? "
" 다미원 최고 상궁, 해 상궁의 솜씨라 하였습니다. "
보이지 않았다. 분명 제가 언제든 눈을 돌리면 그 곳에 있으라 하였는데. 그 아이는 그 곳에 없었다. 그렇게 떠올리지 않기 위해 오늘 하루 내내 노력했던 그 아이의 얼굴이, 그 한마디에 떠오르고 말았다. 한 떨기의 수국처럼, 해사하게 웃는 그 아이. 심통이 난 듯 뾰로통하게 입술을 쭉 내미는 그 아이. 시무룩해져 항상 올라가 있던 입꼬리가 푹 내려가 있던 그 아이. 울면서 저의 숨겨진 여인 따위 되고 싶지 않다던 오늘의 그 아이. 겨우 잡고 있던 이성의 끝이 툭 하고 끊어지는 순간이었다.
가채를 다 내린 연화가 머리를 살짝 다듬다, 아무런 미동조차 없는 소가 의아해 고개를 돌렸을 때. 아마 연화는 그 때 소의 표정을 죽어서까지 잊을 수 없을 거라 문득 생각했었다. 곱디 고운 연화의 얼굴이 그 누구보다 추악하게 일그러 졌다. 일부러 그 아이를 언급한 것이었다. 그 아이의 분수를 아시라고. 그 아이와 폐하께서는 이루어질 수 없다고. 이 나라 고려의 황후는 오직 나 하나라고. 일그러졌던 얼굴을 욕망이라는 이름에 가련히 숨긴 채 연화는 소의 품에 기대었다.
" 페하, 밖에 궁인들도 기다리고 있을 것 입니다. 어서 옷고름을 풀어주시지요. "
" … "
" 폐하, 어서요. 정 힘드시다면 제가 … "
직접 옷 고름을 풀려는 연화의 손을 덥석 잡은 것은 다른 누구도 아닌 소였다. 폐하, 어찌 이러십니까. 혹 폐하께서 직접 풀어주고자 하십니까? 연화야. 다정스레 불리는 저의 이름에 연화는 못내 설레었다. 예, 폐하. 말씀하시지요. 미안하다. … 예? 연화가 상황을 채 파악하기도 전에 소가 침전에 있던 모든 궁인들을 물렀다. 원로한 노 상궁이 절대 아니 된다 하였지만 종내 살기를 내뿜는 황제의 모습에 결국 무엇보다 제 목숨이 소중한 노 상궁은 마지막까지 침전에 남아 있던 상궁들과 함께 물러났다. 그 후, 침전 안이 공기보다 더 조용해졌다. 이게 무슨 일인지 상황 파악조차 되지 않는 연화가 노기에 찬 목소리로 말했다.
" 폐하, 지금 이게 무슨 짓이십니까? 궁인들을 다 무르시다니요! "
그런 연화의 모습을 보던 소가 성큼성큼 걸어가 황제와 황후가 부디 꽃잠을 주무시길 바라며 한 땀 한 땀 만들었을, 금색 실로 봉황이 수놓아져 있는 이불을 걷어내었다. 폐하! 아무것도 묻지 않은 듯 새 하얀 요를 바라보던 소가 이내 품 속에서 작은 단도를 꺼내들었다. 그리고 정말 순간이었다, 소가 단도를 들고 제 자신의 손을 그은 것은. 갑작스러운 소의 행동에 연화도 놀란 듯 단말마의 비명을 내었다. 눈처럼 새 하얀 요 위에 붉디 붉은 황제의 피가 떨어졌다.
" 이 정도의 피면 궁인들도 너와 내가 함께 밤을 보내었다고 믿을 것이다. "
" … "
그 말을 끝으로 침전 밖으로 나가려는 소를 붙잡은 것은 연화의 작은 목소리였다. 폐하. 소가 연화를 향해 돌아섰다. 그 모습 그대로 가만히 앉아있는 연화가 소에게 물었다. 어째서 한 번도 황후라 불러주시지 않으십니까. …. 폐하. 이 나라, 고려의 황후는 저 하나뿐 입니다.
" 아시겠습니까. 이 나라, 황후의 자리는 오직 제 것이란 말입니다. "
" 연화, 네게서 그 자리를 뺏지는 않으마. 허나. "
" … "
" 나의 연모까지는 바라지 말거라. "
아무도 없이 홀로 남겨진 침전 안의 공기가 눅눅해졌다. 아, 밤은 무척이나 길었다.
*
모든 궁인들을 돌려보내었지만 혹시나 하는 마음에 황제의 직속 내관인 김 내관은 이제 막 가려던 얼마 안 된 어린 홍 내관을 슬쩍 불러 내었다. 혹 폐하가 나오시는지 지켜보라 전하고 돌아간 김 내관에 차마 무섭다고 하지도 못한 채 어린 홍 내관은 손톱을 연신 물어 뜯고 있었다. 한 동안을 그랬을까. 한 손에 피가 철철 난 모습으로 침전에서 나오는 황제의 모습에 홍 내관은 펄쩍 놀라 다가갔다. 폐하, 이게 어찌된… 소란 피울 것 없다. 해가 밝을 때까지 황후가 계신 침전에 아무도 다가가지 말라 전하거라. 예, 폐하. 분부 받잡겠습니다. 제 할 말을 마쳤는지 빠른 걸음으로 걷는 황제의 곁에 다급하게 홍 내관이 따라 붙었다. 폐하, 이 늦은 시각에 어딜 가십니까. 일단 다치신 옥체부터 돌보셔야.. 따라오지 말거라. 폐하, 고귀하신 옥체가..!
" 너, 목숨 줄이 꽤나 여러 개인 모양이구나. "
" 히익 "
" 한 번만 더 말했다간 그 입, 다시는 놀리지 못하게 해주마. "
발걸음을 재촉하는 소를 차마 말리지 못하고 떠나 보내는 홍 내관은 저 멀리 소가 점이 되어 보이지 않을 때까지 그 자리에 서 있었다. 그러다 다리에 힘이 풀린 듯 털썩, 주저앉고 마는 홍 내관이었다. 홍 내관은 끝까지 오줌을 지리지 않은 제가 무척이나 대견스러워지는 순간이었다. 부들 부들 떨리는 다리를 힘겹게 일으킨 어린 홍 내관은 부랴부랴 자신의 처소로 뛰어갔다. 내일 동이 트자마자 다른 궁인들에게 얘기할 것이었다. 한 때 늑대개라 불리던 황제의 모습을 보았노라고. 물론 조금 과장되게 덧붙인 자신의 이야기도 말이다.
황궁 내 동지. 한줌 빛도 없던 그 곳에 작은 불빛 하나가 반짝 빛났다.
황후, 연화의 치장을 마무리하고 공주의 처소를 나와 다미원에 도착하자 해수는 겨우 참아왔던 토악질을 토해냈다. 역한 장밋빛 향이 아직도 제 몸에 배어 있는 것 같았다. 있는 힘껏 모든 것을 토해내자 어딘가 서러움이 몰려왔다. 본래 황제의 혼인은 황궁 행사인지라 궁인인 해수 역시 필히 참석해야 했지만 몸이 아프다는 핑계로 참석하지 않았다. 풀과 나무를 밝게 비추던 해가 저물어 달이 뜨는 밤이 될 때까지, 몇 시진이 넘도록 움직이지 않은 채 처음 자세 그대로 앉아있는 해수였다. 살짝 열린 창 틈 사이로 연한 달빛이 흘러 들어와 해수의 얼굴을 비추었다. 고개를 돌린 해수가 창 틈 사이로 보이는 달을 응시했다. 음기로 가득 찬 해. 미동조차 없던 몸이 움직였다. 작은 등화에 의지한 채 걸음을 재촉해 도착한 곳은 황궁 내 동지였다.

여긴 어딥니까? 동지란 이름 호수야. 궁에서 가장 먼저 해가 뜨는 곳이다. 황궁은 어떤 덴 데요?
들어오긴 힘들지만 나가긴 더 힘든 곳. 남을 믿으면 죽고 가장 가까운 사람부터 의심해서 살 수 있는 곳. 그런 곳이라 배웠다.
에이, 그럼 황자님도 다 아시는 건 아니네요. 이 곳에선 누구나 다 혼자야. 그거 하나는 확실하다.
전 혼자가 아니니까 괜찮습니다. 혼자가 아니야?
황자님이 계신데 왜 제가 혼자입니까?
돌아갈 수만 있다면, 그 때로 돌아가고 싶다. 이리 아픈 줄 미리 알았더라면, 이렇게 살지 않는 것인데. 짙게 어둠이 내린 동지를 바라보는 해수의 눈가에 끝내 물방울이 맺혔다. 툭, 툭, 떨어지는 물방울은 이내 강이 되고 바다가 되어 도저히 어떠한 것으로도 막을 수가 없었다. 역시, 이 곳에 있을 줄 알았다. 갑작스레 들려오는 목소리에 화들짝 놀란 해수가 그만 등화를 떨어뜨리고 말았다. 어둠에 가려졌던 어느 낯선 객의 얼굴에 달빛이 스며들었다. 황제, 소 였다. 다급히 해수의 곁으로 간 소가 해수의 이곳 저곳을 살피었다. 다행히 다친 곳은 없는지 안도의 한숨을 내쉰 소는 큰 소리로 해수를 나무랐다. 해수! 어찌 너는 이리도 조심성이 없는 것이냐! 이러니 내가 너를 한시라도 내 곁에서 아니 둘 수 없는 것이다. 어찌 이리 사람 속을 새까맣게 태우는지, 원! 도대체 해수, 너란 아이는! … … 해수가 웃었다. 희미하게 지은 그 미소를 본 순간, 저 멀리 떨어진 깊고 깊은 마음 한 구석 어딘가가 아렸다. 하얀 눈을 닮은 그 아이가 작디 작은 어린 새가 되어 제가 절대 찾을 수 없는 곳으로 떠나갈 것만 같았다. 소가 해수에게서 한 발짝 물러났다. 해수는 그저 멍하니 소의 얼굴만을 바라볼 뿐이었다. 해수가 떨어뜨린 등화를 다시금 손수 들어든 소가 해수에게 등화를 잡지 않은 손을 내밀었다. 잠시, 걷지 않겠느냐.
작은 등화가 흔들렸다. 손을 내민 소도, 그 손을 잡아든 해수도 아무런 말이 없었다. 분명 꽉 쥐어 잡은 손이었다. 허나, 작은 손가락이 밤의 바람처럼 손가락 사이를 빠져나갈 것만 같았다. 그렇게 반 시진을 꼬박 걸었을까, 뚜벅 뚜벅. 들려오는 두 개의 걸음 소리 중 한 걸음이 뚝. 걸음을 멈추었다. 걸음을 멈춘 이는 해수였다. 폐하. 시각이 꽤 많이 지체되었습니다. 이제 그만 황후 께서 계실 침전으로 돌아가시지요. 3보. 해수보다 딱 3보 앞에 서 있던 소가 몸을 돌려 해수와 마주했다.
" 기억하느냐? 널 이 동지에 처음 데려온 날을? "
" 폐하, 어서 침전에… "
" 수야. "
수야. 해수야. 항상 그는 수야 혹은 해수야, 라고 다정히 불러주었다. 그 한마디가 설레고 너무나 행복해서 잠을 이루지 못한 밤도 더러 있었다. 허나, 지금은 아니었다. 어찌 다 잡은 마음인데, 이리 쉬이 무너질 수 없었다. 주먹을 꽉 쥐었다. 미처 자르지 못한 손톱들이 손바닥을 파고든다. 고려의 제 4대 황제, 광종. 그는 역사였다. 그는 역사대로 황위에 올랐고 역사대로 연화 공주와 혼인하였다. 그의 옆에 내 자리는 존재하지 않는다. 어지러운 마음을 다 잡는 것도 잠시, 소가 한 걸음을 걸었다. 2보. 소와 해수 사이의 거리였다. 두 걸음이면 그 거리는 쉽게 좁혀들 것이다. 수야, 나는 지금 황제로 네 앞에 서 있는 것이 아니다. 단 한 명의 사내로써 네 앞에 서 있는 것이다. 해수, 너의 사내로 말이다. 1보. 두 사람 사이에 있던 두 걸음 거리의 공간이, 소가 한 걸음 다가서는 것으로 한 걸음 차로 좁혀졌다. 나의 사내. 나의 사내라 하였다. 단 한 걸음이었다. 이 한 걸음으로 모든 것이 바뀔 것이었다. 두려웠다. 너무나 잘 알았다. 역사는 절대 변하지 않는다는 것을. 바꾸려 하면 할수록 역사는 그대로 흘러간다. 과거에서도, 현재에서도, 미래에서도.
아무 말 없이 온전히 제 마음을 담아 시선을 보내오는 그의 눈빛과 마주쳤다. 부정할 수 없다, 나는 이 사람이 좋다. 밤의 바람이 차다. 황제의 숨겨진 여인이 되지 않고 싶다고 했느냐. 이 궁에서 너의 자리가 없다고 생각하느냐. 수야, 내가 만들 마. 이 삭막한 궁에서 해수 네가 온전히 너로서 있을 수 있는 자리, 내가 만들 마. 해수, 너는 변하지 않아도 돼. 그대로여도 좋다. 아니 그대로가 좋다, 수야. 혹여 수, 네가 궁이 싫다 하면 저 멀리 단 둘이 도망가는 것도 나쁘지 않겠구나. 나는 동물을 사냥하고 너는 세욕제를 만들고 그리 평범히 살고 싶다면 우리 그렇게 살자. 그리하여 네가 내 곁에 있을 수만 있다면, 이 황제의 자리는 언제든지 버릴 수 있어. 난 황제이기 보다 네 사내이고 싶다, 수야. 만약 누군가 나에게 역사에 황제로 남을 것인지, 너의 연인으로 남을 것인지 선택하라 한다면 말이다. 나는 너의 연인으로 남을 것이다. 온 마음을 다해 오로지 연모하는 이에게 닿기를 바라는 마음. 황제가 아닌 한 사내로써 제가 가진 마음을 가득 담아 저에게 보내오는 고백이었다. 해수는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아, 이 사람이라면 어찌 되든 좋아. 온 몸이 달았다. 그의 숨겨진 여인이 되든,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져 죽음을 맞이하든. 이 사람의 곁에 있을 수만 있다면 아무래도 좋았다. 연모합니다. 입안 가득 맴돌던, 삼키려고 무던히 노력했던 그 말이 내뱉어졌다.

소와 해수. 두 사람 사이, 한 걸음의 공간이 사라졌다.
저를 안아주세요.
밤 그림자가 푸르스름한 짙은 새벽과 함께 소리 없이 춤추고 있었다.
길었던 밤이 끝나고 달이, 진다.
결국, 아침이 찾아올 것이었다.
어떤 뾰가 이어서 써달라고 그랬어서 열심히 썼는데, 아주 대차게 망한 듯 싶다..
그래서 소랑 해수랑은 밤새 아침이 찾아 올 때까지 무엇을 했을까... 나는 알 수가 없다....
근데 안아달라는 게 우리가 아는 그 안아달라는 것일까? *^0^*/
소해 꽃길만 걷자 8ㅅ8
말랑카우.. 행복해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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