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령왕후 해씨=해수
신명순성왕후 유씨=충주원왕후UC
태령왕후 해씨(娧朎王后 解氏, 930~?)는 고려 제 4대 왕인 광종의 비이다. 경주 해씨 가문 출신이라는 것 외에 정확한 출생은 밝혀지지 않았으며, 후사는 없다. 사망한 연도는 확실히 기록된 바가 없으나 고려사 광종 시절 '황후 해씨의 승하 이후 황제가 한 달여 간 제대로 곡기하지 아니하였다' 라는 부분으로 미루어보아 광종보다 일찍 사망했을 것으로 추정된다.
고려사에서 태령왕후는 광종의 절대적 후원자로서, 자주 언급된 부분을 한 데에 모아놓았으나 대부분이 불타 정식으로 기록된 내용은 상세히 알기 어렵다. 대신 두 사람의 이야기를 엮은 유명한 야사(野史) '보보경심록'에 따르면 해씨는 어린 시절 그 육촌언니를 따라 대종 왕욱(王旭, 태조의 황자)의 집안에서 머무르며 광종의 황자 시절부터 함께 해온 여인이다. 애당초 대종의 정실부인이 병사하자 그 뒤를 이어 대종과의 혼례가 예정 중이었으나, 얼마 지나지 않아 일명 '황자 시해사건'이 일어나며 그 범인으로 지목받은 해씨가 무수리로 신분 강등되고 혼인은 무효화 된다. 이후 잠시 후진으로 떠나 있다 개경으로 환궁한 광종이 해씨와의 언약식을 올렸다는 것이 두 사람의 본격적인 시작으로 보인다.
그 자체의 내용이 검증되지 않았다는 단점에도 불구하고, 굉장히 상세하며 유연하다는 특징이 강한 야사의 특성 상 역사 속 황실 부부에 비해 광종과 태령왕후는 다양한 이야깃거리가 존재하는데, 당시 신명순성왕후 유씨(神明順成王后 劉氏)와 사이가 좋지 않았던 광종이 황위 계승 서열에서 밀려나 있을 때 정치적으로는 물론이고 개인적으로도 굉장한 지지자가 되어주었다고 한다. 또한 원래 광종의 국혼 예정자이자, 태조 왕건과 신정왕태후 황보씨(神靜王太后 皇甫氏) 사이의 공주 황보씨와의 혼인이 깨진 결정적 원인이 해씨에게 있었다는 사실로 미루어 보아, 해씨가 직접적으로 황실 기록의 수면에 나타난 것은 그 무렵이다. '정종 시절 황자 왕소가 대리진압했던 왕규의 난은 그 과정이 매우 끔찍하고 잔혹하였으나 온전히 그의 뜻이 아니었고, 이루고 난 후 급격이 약해진 정신을 보필해준 것은 그의 부인 해씨였다.'라는 기록으로 보아 아마 당시 두 사람이 정식부부로 인정 받았음을 알 수 있다.
정종의 승하 이후 바로 그 동생인 광종이 황제가 되며 자연적으로 해씨는 황후가 되었고, 기존 황후전이 아닌 황명에 따라 신설한 '태령전'에 머물렀다. 시호 역시 그에서 따온 것이다. 대규모 숙청사업이 벌어지던 와중에조차 두 사람의 금슬이 매우 좋았으며, 현재까지 광종의 업적으로 기록되는 노비안검법 실시(광종 8년)와 과거제 도입(광종 9년) 역시 황후의 빈틈없는 지원이 뒤따라주었던 것으로 유명하다. 이후 약 10여 년이 흘러 황후는 고질적으로 앓고 있던 심장병이 원인이 되어 온천으로 행궁을 나가 있는 경우가 잦아졌으며, 이내 승하하였다. 이때 태령왕후가 광종의 아이를 잉태하고 있었던 것으로 전해진다.
야사에 의하면 해씨의 성품은 보다 진취적이고 당돌한 면이 강했다고 전해진다. 그러나 말년 대대적인 숙청사업으로 인한 신경성 병세가 악화되며 상당히 예민한 모습을 보였다고도 한다. 해씨의 자세한 이야기를 적은 보보경심록의 부록은 그녀를 보필해온 궁녀가 기록한 것으로 알려지지만 역시 야사와 비슷하게 그 진위여부를 확인할 수는 없다.
아래는 광종과 태령왕후의 서사를 엮어낸 야사 보보경심록의 일부 구절이다.
'지역에서 올라온 특산품 중 필요한 것을 간추리고 잉여로 남은 몫은 그 전부를 황제가 갖는 것이 관례였으나, 황후에 대한 황제의 총애가 말로 이루기 어려울 정도인지라 당시는 태령전으로 가는 황제의 몫이 당연시 되었다.'
'태령전이 아닌 총비전(寵妃殿)이라는 별칭을 얻었다.'
'황후의 몸이 태생적으로 약한 탓에 5년여 간 후사가 없자 후궁을 들이라는 상소가 적잖았으나, 황제 모두 물리고 이를 엄금하다.'
'송나라를 다녀온 고려의 사신이 공적인 업무 보고 후 사적으로 황제를 알현했는데, 그때 송나라로부터 가져온 진귀한 패물이 전부 태령전으로 들어갔다.'
'황후의 간곡한 청 끝에 황제가 태조 시절 황자 독살시해사건의 진범으로 참수되었던 황실 상궁 오씨에게 죄가 없음을 밝히고 그 집안을 복권시켜주었다.'
'황후가 교방 여악들이 사용할 화장 도구를 직접 만드는데 그 재주가 대단하였고, 특히 이를 황제가 흡족해 하였다.'
'황후가 심장병으로 인해 일어나지 못할 때마다 황제는 그날의 정무를 최소화하고 태령전을 지켰다.'
'황후 해씨의 승하 이후 황제가 한 달여 간 제대로 곡기하지 아니하였다.'
그 밖의 자세한 이야기는 보보경심록을 통해 참조 가능하다.
소와 수가 진짜 혼인했더라면!ㅎㅎ
위키백과 버전으로 함 꾸려봤옹
참고로 아름다울 태+달빛 영롱할 령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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