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극 초반 등장하는 화장실 살인 시도 장면은 살벌합니다.
특히 손에 망치와 정을 든 살인마 영민을 묶인 채로 바라봐야 하는 미진의 시점에 이입되면 정말 끔찍하기
이를 데 없지요. 곁으로 다가와서 가방을 거꾸로 쏟으면 으스스한 연장들이 쏟아지는데, 이 악마 같은 인간이
벽에 갈고리를 걸기 위해 미진의 몸을 타넘어 가는 모습부터 무척 섬뜩합니다.
“갈고리와 연장을 미진 옆에 쏟아내는 것은 일종의 위협 같은 행동이죠. 그런데 배우로서 그런 것들을 절대 두드러지게 보이도록 하고 싶진 않았어요. 그래서 최대한 심플하게 연기했어요. 영민의 모든 행동이 자연스런 사람의 동작으로 보여야지,
악역이라고 무거운 기운이 들어가면 안 될 거라고 판단한 겁니다.”
-쪼그린 자세로 미진 옆에 앉아서 말을 걸다가, 마치 개를 쓰다듬듯 머리를 쓰다듬으며 진정시키듯
“쉬, 쉬~” 소리를 내는 모습에 이르면 영민이 어떤 인간인지 단번에 알 수 있죠. 그는 희생자를 먹이나 장난감으로
다루고 있는 셈이니까요. 영민이 마당의 개를 놀렸던 이전 모습과 겹치는 부분이 아닐 수 없습니다.
“머리 쓰다듬는 장면이 작위적이지 않을까 잠시 고민하긴 했어요. 그래도 그 장면에서 그 정도는 할 수 있는 거라고
판단했죠. 화장실 장면은 기본적으로 절대 괴기스럽게 연기하지 말자는 생각을 했어요. 영민의 입장에선
먹잇감이 들어와 묶여 있는 상황이고, 이제부터는 최대한 신나게 즐기면 되는 상황이지만,
그런 마음은 갖되 표현은 최대한 절제하려고 했던 겁니다.”
-‘추격자’는 스릴러 장르의 관습을 깨고 극 초반 두 주인공을 격돌시킵니다.
바로 두 사람의 차량이 접촉 사고를 내는 장면이었죠. 추격전으로 이어지기 전까지의 그 장면은 그리 긴 씬이 아니고
다양한 동작이 있는 씬도 아니지만, 그 속에서 하정우씨는 영민이 경험하는 당황 경멸 짜증 분노 같은
다양한 감정을 효과적으로 드러냅니다. 접촉 사고 후 다가온 중호가 연락처를 달라고 거듭 말할 때
‘됐으니까 그냥 가라’는 말을 세 차례에 걸쳐 변주하는데, 특히 세번째로 몸을 돌려 한 손으로 조수석 의자를 짚으며
정색하고 “아저씨, 저 괜찮아요, 예?”라고 말할 때가 상당히 인상적이었습니다.
“그런 이야기를 들으면 저로선 굉장히 부끄러운 부분이 있어요.
거의 무의식적으로 한 건데 좋게 이야기해주시는 거니까요.”
-개인적으로 접촉 사고 장면에서 가장 좋았던 하정우씨의 연기는 중호가 바로 앞에서 전화를 걸어 확인하면서
“받아, 야”라고 할 때 영민의 표정이었어요. 아무 것도 담기지 않은 맨 얼굴, 혹은 텅 빈 얼굴이랄까요.
갑자기 닥친 상황 속에서 정색하고 사태를 파악하려는 순간의 텅 빈 얼굴이 역설적으로 참 강렬하게 다가왔습니다.
“아, 그 장면이요? 갑작스런 일에 영민의 입장에선 ‘이건 뭐지?’까지도 도달하지 못한 상태라고 봤어요.
그래서 말씀하신 대로 얼굴에 표정을 담을 수가 없는 거죠. ‘이 놈이 잡으러 오면 도망을 가야겠다’는 생각 정도나
하고 있을까요. 그건 ‘내가 연쇄살인 행각을 벌인 것을 들키다니!’에서 비롯된 도망이 아니죠. 이후 골목길로
도망간 것은 누가 잡으러 오니까 본능에 가깝게 달아나는 거죠.”
-영화 초반부, 둘이 처음 쫓고 쫓기는 장면에서도 하나 질문하고 싶은 게 있어요.
망원동에서 두 사람이 추격전을 벌일 때 달아나던 영민이 커브를 돌다가 쭈욱 미끄러져 넘어진 뒤 벌떡 일어나
다시 도망가는 쇼트가 있죠. 그 모습은 시각적으로도 대단히 두드러져 보이는 훌륭한 디테일이었는데,
어떻게 찍으셨는지요. 매우 위험해 보이던데요.
“사고였어요.(웃음) 원래는 그 추격전의 후반부에서 넘어지는 설정이 하나 있긴 했지만,
그보다 전인 그 부분에서 미끄러져버린 거죠. 추격 장면에서 뛸 때는 모습이 중요합니다.
궁지에 몰려 달아날 땐 말을 내뱉거나 뒤를 돌아볼 새가 없어요. 그저 앞만 보고 전력질주하는 거죠.
그런데 그렇게 뛰다보니 코너를 돌다가 맨홀 뚜껑이 있는 걸 보지 못해서 진짜로 심하게 미끄러졌던 거에요.
그리고 전력질주를 강조하는 이야기를 감독님으로부터 하도 많이 듣다 보니, 넘어진 후에도 반사적으로 벌떡 일어나
계속 달렸던 거고요.”
-첫 취조 장면에서 영민은 실종된 여자를 팔았냐는 물음에 수줍은 듯 작은 목소리로 웃으며 “죽였어요”라고 말합니다.
연기자 입장에서 볼 때, 영민은 처음부터 그 사실을 말할 생각이 있었던 건가요, 아니면 하다 보니 불쑥 내뱉은 건가요.
“영민은 앞서 두 번 체포되었다가 그냥 나온 경험이 있었기에 이번에도 풀려날 줄 알았죠. 그래서 여유만만했던 거고요.
그런데 자기 전화번호를 말한 것은 실수죠. 그래서 강수를 둔 것입니다. 영민은 사실 자신이 무시당하는 걸
참지 못하는 인간이에요. 연쇄살인범들은 그런 성격을 가진 사람이 많잖아요? 과시욕이 크죠.”
-사실은 거물인데, 여자나 팔아넘기는 잡범 취급을 하니까 자존심이 상한 거군요?(웃음)
“난 살인을 저지른 사람이다, 잡범 정도가 아니다, 우습게 보지 말라는 거죠.(웃음)
‘진짜 죽였어?’라고 경찰이 재차 물을 때 마지막 답변으로 진지하게 시인한 것은 바로 그런 심리를
보여주고 싶었기 때문입니다.”
-중호와 함께 지구대에 끌려간 영민이 처음 취조받는 장면에서 가장 두드러지는 것은 이 인물이
얼마나 유아적인가,하는 점입니다. 이 장면에서 영민은 마치 어린이가 숙제하는 듯한 자세로 진술서를 쓰고,
DNA 검사를 위해 구강 세포를 채취한 뒤엔 손으로 입 안을 만져봅니다.
- 아이처럼 산만해서 진술하면서도 계속 한 눈을 팔고, 비닐 포장지로 싸여 있는 초콜릿을 비닐째 입에 가져가
당겨 먹습니다. 특히 중호가 호통을 치자 초콜릿을 까먹으려다 손을 입에 댄 채 멈추면서 쳐다보는 표정은 아이의
얼굴 그대로지요. 무엇보다 영민은 악마와 어린아이가 결합된 캐릭터라는 점이 가장 특징적으로 보입니다.
다만 전반부는 좀더 아이 같은 반면, 후반부는 훨씬 더 악마스럽죠.
어떻게 영민을 어린아이 같은 인물로 표현하게 되셨어요?
“연쇄살인범 역을 맡으면 아무래도 기존 캐릭터들이 많이 떠오르잖아요?
어떤 의미에서는 전형적일 수 있는 캐릭터니까 배우로선 무엇보다 그 인물이 입체적이길 바라게 됩니다.
그래서 생각하다보니 입체적인 살인마가 되려면 먼저 자연스러운 행동을 하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고 봤어요.
이 인물은 일일이 계산해서 연기하면 안 된다는 판단이 제일 먼저 들었습니다. 이 영화의 영민은 그 결과 탄생한 인물인 셈이죠.
영민은 분명 아이로 소개되어서 악마로 끝나는 캐릭터입니다.
-세번째는 심문관의 취조 장면입니다. 이 씬은 중반부 계속 이어지는 취조 장면의 마지막 부분인데요,
비슷한 취조 설정이라도 영민은 여기서 이전과 완전히 다른 모습을 보입니다. 우선 첫 쇼트부터 굳은 얼굴의
클로즈업으로 등장하죠. 힘없이 낮은 목소리로 설득하려 하기도 하고, 정색하고 정면으로 응시하며 반말로 내뱉기도
하지만, ‘성불구가 아니냐’면서 계속 자극하는 노련한 심문관에게 말려들어 결국 폭발하고 맙니다.
이 장면은 어떤 느낌으로 연기에 임하셨는지요.
“그 장면에서 가장 컸던 것은 피곤함이었어요.
지금 영화에 들어 있는 부분은 이 장면 촬영을 두 번 실패한 뒤 세번째 날에 찍은 분량이었죠.
처음 찍기로 한 날은 두 배우의 연기 톤이 잘 안 맞아서 접었고, 두번째 날은 제가 심한 몸살에 걸려 연기됐죠.
결국 세번째 날 다시 촬영하게 됐는데 그 날은 이상하게도 너무나 찍기 싫더군요. 자꾸 느낌이 이게 아닌 것만 같았고요.
그러던 중 분석관 역을 하신 배우 분과 감독님이 무려 네 시간이나 연기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는데,
밖에서 계속 대기하며 기다리고 있다가 연기에 대한 힌트를 얻었어요. 밤새도록 취조를 받았을 테니
영민도 진짜 피곤하겠다, 바로 이거다, 싶었던 거지요. 그러고나서 그 장면을 제대로 찍을 수 있었어요.
피곤해진 영민의 날 것 그대로의 감정이 많이 노출되는 장면이었죠.
-그 장면에선 분석관이나 영민 모두, 존대말에서 반말로 바뀌는 순간의 임팩트가 아주 강했습니다.
“너 같은 가 대개 그러니까”라는 분석관 대사 부분에서는 보면서 찌릿찌릿했어요.
“그 취조 장면은 이미 상황이 많이 진행됐다고 가정하고 시작하잖습니까. 그러니 말씀하신대로 첫 쇼트가
정색한 클로즈업이었던 거고요. 이미 시작부터 영민의 상태는 귀찮고 피곤한 거라고 봤어요.
계속 상대가 약을 올리는데 빨리 끝내고 싶어서 그게 아니라고 힘없이 말하다가 숨기고 싶은 정곡을 찌르니까 폭발하는 거죠.”
-아마도 ‘추격자’에서 가장 끔찍한 장면이 되겠죠? 두번째는 개미 수퍼 장면입니다. 이 장면에서 영민은 선글래스를 끼고 있지요. 영민은 얼굴에 상처가 많이 나 있고, 또 경찰서에서 막 풀려난 상황이니까, 영화 내적으론 충분히 리얼리티가 있는 설정입니다. 하지만 감정적 클라이맥스를 이루는 장면에서 배우가 선글래스를 끼고 연기하기란 쉽지 않을 수도 있겠다는 추측이 드는데요. 사실 얼굴 연기에서 정점을 찍는 것은 눈의 표정일 경우가 많으니까요.
“바로 그런 이유로 감독님께서 제게 그 장면을 촬영하기 전에 ‘괜찮겠냐’고 여러 번 물으셨어요.
그런데 전 그런 설정이 너무 좋았거든요. 눈을 가렸을 때 뿜어져나올 수 있는 표정도 있으니까요.
도리어 저는 그렇게 선글래스로 눈을 가리는 게 너무 상투적으로 보이지 않을까 싶었어요.
표정 자체라기보다는 그런 장면에서 범인이 선글래스를 끼고 있는 이미지 자체가 상투적일 수 있잖아요.
그걸 빼면 오히려 선글래스를 끼고 클라이맥스를 연기하는 게 더 흥미로울 거라고 생각했습니다.”
-미진이 숨어 있는 수퍼의 내실 문을 열고 들어올 때, 영민이 단 번에 들어서지 않고
잠시 멈춰서서 안을 쳐다보는 모습도 기억에 신선하게 남아 있습니다.
“멈춰서서 2~3초간 안을 쳐다봤어요. 관객들이 보셨을 때 그 장면이 한 장의 사진 같은 느낌이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거든요. 길을 가면서 담배갑을 구겨버릴 때부터 관객들은 영민이 개미 수퍼에 들르겠다는 예감을 하죠.
그때부터 극적 긴장감이 계속 올라가는 셈입니다.
이어 수퍼에 들어서서 아줌마와 이야기를 나누기 시작하면 조바심이 점점 더 심해지죠.
그곳에서의 장면들은 관객의 긴장감이 이미 최고조에 달해 있는 상황이니까, 제 연기의 패턴을 더더욱 줄여야겠다고
다짐했어요. 뭔가를 적극적으로 하는 연기는 경계해야겠다는 거였죠. 오히려 사진 같은 느낌을 주면 임팩트가 더 강해지겠다는 느낌이었어요.”
-방에 들어와서 발로 미진을 툭툭 건드려보던 영민은 미진이 계속 자는 척 하고 있자 “참, 한다”라고 내뱉으며 웃습니다. 그
런데 그때의 웃음은 그 전까지 하정우씨가 이 영화에서 웃었던 웃음과 완전히 다릅니다.
이전 웃음들이 인간으로서 영민의 복합성을 드러내는 자연스런 웃음들에 가까웠다면,
이 장면에서의 웃음은 연쇄살인범을 그려내는 영화에서 기대되는 소위 ‘악마적 웃음’이라는 점에서 장르적인 특성을 갖고 있지요. 더구나 그 웃음은 극중에서 클로즈업으로 표현되었는데, 그 장면에서 마음껏 악마적인 웃음을 웃고 있다는 느낌이 들었습니다.
“정확히 보셨습니다. 좀 뻔한 표현이지만, ‘여기선 이렇게 웃어주는 게 맞겠다’ 싶었어요.(웃음)”
‘참, 하네’라는 대사 역시 참 악마적이죠?(웃음)
“영민은 그 상황에 대해서 심각하게 생각하지 않는다고 봤어요. 들어가서 미진이 자는 척 하고 있는 장면을 보는데,
손만큼은 바르르 떨고 있으니, 정말 끔찍한 광경이지만 사악한 살인마 영민 입장에선 웃겼던 거지요.
그래서 그런 말이 나왔던 걸 겁니다.”
-그 장면에서 살인을 저지르기 전에 망치를 두 번 가볍게 흔들잖습니까.
일반적으로 못질을 할 땐 망치를 몇 차례 흔들어 조준을 하게 되는데, 그 장면은 그런 ‘예행 연습’ 같아서
끔찍하다는 느낌이 절로 들었어요.
“야구 선수들이 타석에 들어설 때도 미리 배트를 두어 차례 휘둘러보죠. 행동엔 그런 사전 제스처가 있잖아요?
그 전에 수퍼 주인으로부터 망치를 건네받을 때도 한 바퀴 돌려보잖아요? 서부 영화에선 카우보이들이 총도 돌리죠.
영민은 이전에 석재공이었으니까 더 그랬을 거에요.”
-영민(하정우)과 중호(김윤석)가 영민의 아지트에서 최후의 대결을 벌이는 액션 장면입니다. 영화 속에서
영민과 중호는 세 번 물리적으로 부딪칩니다. 망원동 골목길에서와 경찰서 취조실 안에서는 영민이 일방적으로 얻어맞습니다.
사실 육체적으로 연쇄살인범이 맞서 싸우는 주인공보다 더 약하다는 설정 자체가 ‘추격자’의 흥미로운 부분 중 하나죠.
그런데, 마지막 싸움에서는 두 사람이 팽팽하게 맞섭니다.
이건 물론 장르 영화에서 클라이맥스를 만드는 관습이기도 합니다만, 그 싸움의 구체적인 양상이 자못 흥미롭지요.
영민은 골프채를 휘두르고 중호는 역설적이게도 원래 영민의 범행 무기인 망치를 듭니다. 가격하려다가 미끄러지기도 하고,
기싸움에서 이기려고 과장된 표정을 짓기도 하면서 싸우는데, 개싸움에 가까운 사실적 액션 디테일들이 인상적이었어요.
“그 싸움은 영민의 아지트에서 벌어지는 것이니까, 영민으로선 일종의 홈그라운드 이점이 있는 거죠.
그리고 영민은 중호의 육체적 힘에 대해 그동안 두려움을 느껴왔는데, 막상 맞붙어서 휘둘러보니까 ‘쟤도 나가떨어지는구나’
싶은 생각을 하게 되는 겁니다.(웃음) 그렇게 싸우면서 자신감을 얻어나갔던 거죠. 이 영화에 일정한 모티브를 제공했던
연쇄살인범 유영철의 범행 중에도 그런 게 있었더군요.
어느 노부부 집에 부부 외엔 아무도 없는 줄 알고 들어갔는데, 정신지체인 아들이 2층이 내려왔대요.
그래서 순간적으로 겁이 덜컥 나서 무려 서른 번 넘게 잔인하게 내리쳤다고 합니다. 자기와 육체적 조건이 비슷하거나
더 좋은 남자와 맞부닥쳤을 때 살인자라도 충분히 공포를 느낄 수 있을 거에요. 아지트에서 중호와 함께 실내에 들어섰을 때
영민은 송곳으로 찌르긴 했지만, 처음엔 그 틈을 이용해 도망치려는 생각 정도였을 거에요. 그런데 그렇게 하다보니 빈 틈이 보여서 본격적으로 싸움이 시작되는 거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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