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미 여시들도 짐작하고 있겠지만 조선 7대왕 세조 이유(李瑈) 1417~1468 ㅇㅇ이정재수양대군 엄연히 묘호도 있지만 대군시절 커리어가 여러가지 의미로 화려해서 살아서나 죽어서나 군호로 많이 불리는 그분임. 세종의 넷째이자 차남인 수양대군은 비록 형님과 동생에게 빛이 바랬지만 문무 양쪽에 뛰어난 (세종의 자식들이 다들 그렇지만)재주있는 아들임. 세종 말년엔 동생 안평대군과 함께 부왕을 도와 조정의 일을 맡아 할 정도로 신임 받는 아들이기도 했음(과연?) 근데 비록 모든 분야에서 독보적으로 뛰어나진 않았지만 이 사람은 자기가 잘난 걸 좀 잘 알고 있었는지 자기에 대한 자부심이 지나칠 정도로 대단했다고 함. 뽐 내는 걸 좋아해서 겨울에 사냥 갈때도 일부러 얇은 옷을 입고 사냥을 다녔는가 하면 일부러 늙고 비실비실한 말을 골라 타서 말이 넘어질 때 말 위에서 뛰어내려 착지하는 묘기를 부왕 앞에서 자주 선보였다고 말한테 무슨짓이냐 노인학대 그만해라 이런건 부전자전인가봄. 그리고 딴엔 멋있다고 생각했는지 일부러 소매 긴 옷을 지어서 펄럭펄럭 하면서 입고다녔다고 하는데 그 모습을 본 세종이 "수양쯤 되는 용력이면 가히 저정도 옷은 입고다녀야 한다." 하면서 허허 웃었다는 일화도 유명함(이 점에 대해선 다른 해석도 존재하는데 세종의 이 말을 두고 "너는 힘이 세니 그런 불편한 옷을 입어 마땅히 스스로를 경계해야 할 것이다"라는 뜻으로 해석하는 학자들도 있음. 실제로 다른 아들들과는 다르게 유독 세조만 군호가 여러번 바뀌었고 특히 마지막으로 받은 군호에 담긴 의미를 생각하면 세종은 세조의 야심을 어느정도 눈치채고 있었을 가능성이 높음). 어쨌든 어렸을 때 부터 이렇게 뽐내기를 좋아했던 아바마마 저 완전 잘나지 않았음? 그러니까 세자자리 좀 주세여세조는 자기 스스로를 영웅적으로 포장하기를 즐겼는데 자기를 당태종이나 주공(주나라 무왕의 동생으로 형이 어린 아들인 성왕을 남겨두고 일찍 죽자 섭정의 자리에 올라 왕에 버금가는 권력을 휘두르다가 성왕이 성인이 되자 미련없이 권력을 내려놓고 일반 신하의 지위로 내려갔음. 공자가 진정한 성인의 표본이라고 언급하기도 함)에 비유하기를 서슴치 않았음 낯 부끄럽지도 않냐. 말년엔 세자(예종)에게 양위하면서 아예 대놓고 "운이 다한 영웅은 자유롭지 못한 범, 내뜻을 어기려는가?" 라면서 자기 자신을 영웅에 비유하기도 했음(ㅋㅋㅋㅋㅋㅋㅋㅋ). 그런 영웅적 풍모를 과시하고 싶었는지는 몰라도 술도 엄청나게 좋아했고 왕이 되고나선 아예 술자리에서 모든 국사나 인사를 의논하기도 함(참 대단한 일 하십니다). 그런 주제에 의외로 색은 즐기지 않았는지(호색까지 했으면 영웅의 조건을 모두 갖추는건데) 기생을 몹시 싫어해서 "그들은 사람의 족속이 아니다" 하면서 술자리를 가질 때 기생들의 얼굴에 하얗게 분칠을 시켰음(그럼 그냥 기생집을 안가면 되잖아). 정실부인인 정희왕후를 아껴서 후궁을 들이라는 신하들의 요구를 거절하거나 이런저런 곳에 같이 대동하기도 하고 국정 회의하는데 신하들 앞에서 "우리 마누라가~"하면서 왕비의 의견을 소개하는 일도 많았음. 조선왕조실록 홈페이지에서 교태전으로 검색하면 세조실록이 압도적으로 많은 문건이 나올 정도ㅇㅇ. 그렇다고 후궁(첩)을 아예 안들인 건 아님. 그래도 역대 조선왕들 중엔 정말 손에 꼽을 정도로 후궁을 많이 안들였음. 근데 적은 인원에 비해 소리없이 강렬한 존재감을 자랑하는게 또 세조의 부인과 후궁들이라 한번 쭉 정리해 봄. 1. 정희왕후 윤씨(貞熹王后 尹氏) 子 : 2남 추존왕 덕종(의경세자) 이장, 조선 8대왕 예종 이황1녀 의숙공주 본관은 파평으로 아버지는 판중추원사 윤번. 그녀의 영향력 덕분인지 파평 윤씨는 그녀 이후로 연달아 세명의 왕비를 배출하며 조선 전기 정치사에(대부분 안좋은 의미로) 큰 영향을 끼쳤음. 야사에 따르면 원래 수양(당시에는 진평)대군의 정실후보는 그녀의 언니였는데 언니를 만나러 왔던 상궁의 눈에 띄어서 그녀가 대신 수양대군의 부인이 되었다고 함(언니 지못미...). 결과적으론 상궁의 눈썰미가 좋았던 건지 정희왕후와 세조는 상당히 죽이 잘 맞는 부부였음. 큰며느리가 다들 그모양이라 시어머니인 소헌왕후와도 굉장히 사이가 좋아서 그녀가 첫 아들인 도원군(덕종)을 출산할 때 관례를 깨고 그녀를 궁으로 불러들여 출산하게 했을 정도. 남편과 사이가 좋았던 그녀는 기질도 비슷했던 모양인지 상당히 담대하고 배짱있는 면도 있었다고 함. 계유정난이 일어나기 전 날 망설이는 남편에게 직접 갑옷을 입혀 내보내며독려했을 정도. 결과적으론 베팅이 성공해서 원래대로라면 꿈도 꿀 수 없었던 왕비가 됨. 세조 치세 후반에 이시애의 난이 일어났을 때는 "이번 일로 나라의 군사들을 훈련시키는 계기가 되었으니 이것은 국방을 튼튼히 하는 방책이 될 것인즉, 이시애의 반역이 꼭 화만은 아닙니다." 라는 간지폭풍 발언을 하기도. 그렇게만 끝나면 해피엔딩이었겠지만 수많은 사람들의 피를 뿌려가며 얻은 왕위의 업보 덕인지 세조의 가족들은 상당히 불행한 결말을 맞이했음. 장남인 의경세자가 약관(스무살)의 나이에 요절하고 남편인 세조는 말년에 극심한 피부병(기록을 볼 때 한센병이었다는 의견도 나옴)과 정신적 압박감에 시달리다 사망, 뒤를 이어서 왕이 된 차남 예종도 1년 2개월만에 약관의 나이로 사망했음. 장녀인 의숙공주도 서른 여섯의 나이에 요절해서 그녀는 살아생전에 남편과 자식들이 모두 죽는 것을 보게 됨. 왕위계승권자의 지명권을 갖고 있던 그녀는 작은 아들인 예종이 네 살인 원자(제안대군)만 남기고 급서하자 원자가 너무 어리고 의경세자의 큰아들(월산대군)은 몸이 병약하다는 이유를 들어 한명회의 사위이자 의경세자의 둘째인 자을산군(성종)을 왕위에 올림. 당시 성종의 나이도 열 세살이었기 때문에 그녀는 조선왕조 최초로 수렴청정을 한 왕비이기도 했음. 평은 상당히 좋은 편인데, 기강이 엄정했고 공은 손자에게, 과는 자신에게 돌리는 식으로 무난하게 정국을 잘 이끌어 갔다는 평이 있음. 자녀들 의경세자(추존왕 덕종) 이장(李暲) 초명은 숭(崇). 세조와 정희왕후 사이의 첫 아들로 성품이 온순하고 예의가 발라서 할아버지인 세종에게도 예쁨을 많이 받은 아들이라고. 글씨 쓰는데도 일가견이 있었다고 함(해서체를 특히 잘썼다고). 단 몸이 약해서 잔병치례가 잦았던 듯. 1455년 아버지가 왕위에 오른 뒤 원자로 책봉되었다가 그해 바로 동궁의 자리에 올랐는데 그 후로 2년 뒤인 1457년 감기로 추정되는 질환으로 사망하게 됨. 야사에는 단종의 어머니인 현덕왕후가 세조의 꿈에 나타나 '네가 죄 없는 내 아들을 죽였으니 나도 네 아들을 죽이겠다!'하고 저주를 한 뒤 의경세자가 바로 사망했다는 이야기가 전하는데 사실 의경세자는 단종이 죽기 두 달 전 먼저 사망했음. 이 의경세자의 부인이 무서운 시월드로 유명한 인수대비(소혜왕후). 왕이 된 아들이나 마누라에 비해서 존재감은 별로 없는듯. 조선 제 8대왕 예종 이황(李晄) 할아버지 세종이 돌아가시던 해(1450)에 태어난 세조부부의 늦둥이 아들. 세조가 왕이 되던 해에 해양대군(海陽大君)에 봉작되었음. 원래대로라면 왕위와는 연이 없어야 하겠지만 형인 의경세자가 요절하는 바람에 8살에 나이로 세자가 되었음. 무소불위의 권력을 휘두르던 아버지를 롤모델로 삼았는지 즉위하자 마자 남이 숙청 등등 굵직굵직한 사건을 일으키면서 공신들을 정리해고 정리해서 왕권을 강화하려고 했지만 즉위 1년2개월 만에 지병인 족질(당뇨 합병증이라는 설이 있음)로 급작스럽게 사망해서 독살설이 제기되는 왕이기도 함. 여담으로 그의 묘호인 예종은 그가 살아생전 자기가 죽으면 꼭 올려달라고 신신당부를 해서 붙여졌다고 한다(...). 세조 때부터 편찬을 시작한 경국대전은 예종대에 이르러 완성했는데 그가 갑작스럽게 사망하는 바람에 결국 공은 조카인 성종에게 돌아갔음. 여러모로 눈물이 앞을 가리는 왕. 의숙공주(懿淑公主) 세조의 (선원계보에 따르면)고명딸. 드라마 공주의 남자 방영시 주인공 세령(문채원)의 옆에서 대차게 를 끌던 여동생 세정이 바로 이 의숙공주다. 조선왕조의 공주들 중 드물게 이름이 남아있는데 드라마와는 다르게 이름이 세선(世宣)이었다고. 하동부원군 정인지의 아들인 정현조에게 하가했으나 후사없이 요절했다. 남편인 정현조는 상당히 하기로 유명한데 비단 한필 없어졌으니까 도둑좀 잡아주세요ㅠㅠ하고 왕에게 징징대질 않나 시종이 우산을 잃어버렸다고 아깝다는 소리를 연발해서 비웃음을 사질 않나, 그 후로도 불교를 숭상하는 모습을 자주 보여 이래저래 유학자였던 신료들에게 를 제대로 끈 모양. 이정도만 했으면 다행일텐데 공주가 죽고난 뒤에 양반가의 딸을 계실로 맞았다가 탄핵을 당했음. 결국 성종이 경숙옹주의 남편인 강자순의 경우와 같이 계실과의 사이에서 낳은 아이들은 모두 서얼로 치는 것으로 마무리가 되었음. 중종대에 이르러 계실의 아버지가 외손자들의 벼슬길을 열어달라고 조정에 탄원을 했지만 중종의 쿨스루로 마무리. 의령(혹은 의화)공주 세희 야사인 금계필담에만 전해내려오는 인물로 공주의 남자의 주인공 세령의 모티브. 아버지 세조의 왕위찬탈에 반대하다 쫒겨나 김종서의 서자(혹은 손자)와 숨어살았다고 한다. 그 외에 그녀의 흔적을 찾을 수 있는 기록은 없으나 세종실록(1446년당시) '수양대군은 1남 2녀를 낳았는데, 맏이는 도원군이고 두 딸은 아직 어리다'라는 기록으로 보아 야사처럼 김종서의 자손과 이러쿵저러쿵 하지는 않았더라도 세종 대에 살아있다가 요절했을 경우도 배제할 수는 없다. 하지만 광릉(세조의 능)의 비문에는 세조가 정희왕후 사이에서 2남 1녀를 낳았다고 기록되어 있어 혼란을 주고 있다. 2. 근빈 박씨 子 : 3남 덕원군 이서, 창원군 이성, 왕자(요절) 1425년 혹은 1426년 생(생몰년은 확실하지 않으나 연산군 10년인 1504년 당시 팔순이었다는 실록의 기록을 근거로 계산). 세조가 아직 대군이었던 때에 첩으로 들였다가 세조가 왕위에 오르면서 후궁의 반열에 올랐다. 그녀가 빈의 지위에 오른 것은 성종 14년의 일로 그 전까지는 귀인의 자리에 있었다. 그녀의 출신에 관해선 궁녀설, 무희설 중 여러가지가 있지만 가장 유명한 설로는 패기甲박팽년의 누이(혹은 딸)설이 있다. 일단 공식적인 기록에 따르면 박팽년의 본관은 순천, 근빈의 본관은 선산이라 가능성이 떨어지는 이야기다. 하지만 근빈 박씨의 본관이 선산이라는 기록은 전주이씨대동종약원 선원파보 덕원군파의 기록에만 전해져 오는 이야긴데, 근빈의 본관이 선산이라고는 하나 부계관련 기록이 전무하고 근빈 박씨는 1455년 사망했다는 실록과는 상반되는 기록이 나와(위에서 보면 알겠지만 근빈 박씨는 적어도 1504년 당시까지는 생존해 있었다. 거기다가 덕원군의 동생인 창원군은 1457년 혹은 1458년 생으로 저 기록에 따르면 세조가 자가생식을 하지 않은 이상에야 태어날 수도 없음) 아예 가능성이 없는 이야기라고는 할 수 없다(만약 근빈이 정말로 박팽년의 친족이라면 어머니가 역모죄로 화를 입은 집안의 태생이라는 것은 차마 기록하기 어려웠을테니까). 다만 덕원군파의 기록을 본 후대사람들이 ??왜 거짓말함? 뭔가 냄새가 나는데? 하고 한 결과일 수도 있으니 확답은 금물. 만약 그녀가 정말로 박팽년의 친족이라면 나이로 미루어 볼 때 박팽년의 딸이라기 보다는 여동생이라고 보는게 더 타당할 듯. 더불어서 양반가의 딸이 첩으로 들어갔으니 서녀라는 추측이 가능하다. 만약 위의 설이 사실이라면 남편이 내 친정 박살냄하고 미*넷에 사연이 올라올 만큼 인생이 기구하지만 정희왕후만큼은 아니라도 세조와는 나름 사이가 좋았던지 세조와의 사이에서 덕원군 (1449년 혹은 1450년 생), 창원군(1457년 혹은 1458년생), 요절한 왕자 등 세 명의 자식을 두었다. 별달리 문제되는 기록이 없는 것으로 보아 정희왕후와도 사이가 나쁘지 않았던 듯. 성종 14년 빈의 지위를 받으면서 창수궁(昌壽宮)이라는 궁호를 받을 정도로 우대 받았으니 이만하면 대접도 나쁘지 않고 평탄한 삶을 살았을 것 같은데.... ㅇㅇ 원래대로라면 평안한 말년을 보내야할 그녀의 인생에 연산군이라는 함정카드가 발동되고 말았던 것이다.... 시녀들의 말안장 28부를 만들어 들였다.왕이 금표 안에 나가놀게 되면 항상 수행하므로 만들도록 한 것이나, 거둥이 절제가 없어 빠르기가 폭풍과 같으므로, 왕이 나간다는 말을 들으면 모두 전도(顚倒)하여 맨발로 가는 자도 있었다. 이때 세조의 후궁 근빈(謹嬪) 박씨(朴氏)가 나이 80세로 머리를 깎고 여승이 되어 항상 자수궁(慈壽宮)에서 거처하다가 이 무렵 입궐하였는데, 왕이 나놀려면, 근빈에게 교자(轎子)를 타도록 하고, 궁인이 메게 하므로 궁인들이 항시 승혜(繩鞋)를 신고 갔다. 술이 취하면 왕이 스스로 일어나 춤을 추고, 또한 근빈도 일어나 춤추게 하였는데, 근빈은 늙어서 할 수 없었으나 치열한 학대가 두려워 따르지 않을 수 없었다. 연산 55권, 10년(1504 갑자 / 명 홍치(弘治) 17년) 9월 4일(신묘) 5번째기사 어서를 내려 이르기를, “근빈(謹嬪) 등 칠푼(七分)이를 내일 아침 일찍 동궁(東宮)으로 나아갔다가 29일 뒤에 도로 나오게 하고, 또 음악을 잘하는 나이 젊은 기생 20명을 내일 아침 일찍 건양문(建陽門) 안에 대령시키라.” 연산 56권, 10년(1504 갑자 / 명 홍치(弘治) 17년) 11월 17일(계묘) 5번째기사 Aㅏ..... 참고로 근빈 박씨의 남편인 세조는 연산군보다 3대 앞의 왕이었고, 족보로 따지면 증조부임. 그러니까 연산군은 증조부의 후궁을 데려다가 저짓거리를 한거임. 왕들이 비록 직첩이나 신분이 어떻던 간에 선왕의 후궁은 대충 서모대접은 해주는데 개념甲 연산군은 서모도 아니고 서증조모를 능욕한거. 사스가 연산군....사스가 수양대군 증손자.... 이 후로 실록에서 근빈 박씨의 기록은 찾아볼 수 없지만 저걸 보면 심적인 고통때문이라도 그 뒤 얼마 살지 못했을 것 같음 자녀들 덕원군 이서(李曙) 1449년 혹은 1450년 생. 단 예종이 그에게 토지를 내리면서 '나의 동생은 덕원군과 창원군 뿐인데' 라고 언급한 것을 보아 1450년 생이라는 설이 우세하다. 세조가 대군 시절 낳은 아들로 품행이 방정하여 아버지와 형제들의 사랑을 받았다고 한다. 실제로 세조 8년 덕원군의 집을 구입하면서 60여 간(間)이나 되는 큰집을 구입한다고 세조의 이종사촌 노사신이 비판상소를 올린 것을 보면 나름 아버지의 총애를 많이 받은 것은 사실인 모양 집이 60간 씩이나 되다니 너무 지나친 거 아닌가요? 그렇게 막 낭비해도 되는거임? "? 내가 내 돈으로 내 아들 집 좀 사주겠다는데 니가 왜 난리? 나 화나게 하지 말고 내 말대로 시행하셈ㅇㅇ" 이런 아버지의 사랑이 외사랑이 아니었던지 아들인 덕원군 또한 엄청난 아버지 덕후여서 늘 부왕을 정성껏 모셨으며 말년에 세조가 피부병때문에 자주 피접을 나갈때도 항상 따라다니며 시중을 들었다고. 어느 날은 세조를 따라 온양온천에 피접을 갔다가 그 근처의 땅이 마음에 들어서 '아빠 나 저 땅좀 가지면 안됨?'하고 징징부탁한 적도 있다고 한다. 물론 아들덕후 세조는 당연히 승낙(..). 이런 총애는 대를 이어서 계속되었는데 예종은 '우리 동생 가난하게 지내는거 보면 안쓰러움ㅠㅠ'하면서(앞의 경우를 보면 별로 그렇지도 않은것 같은데)토지를 내리거나 (별 공도 안세웠는데)남이 옥사때 공신에 넣어서 또 포상(...). 덕원군은 풍수와 음양학과 천문학에 관심이 많았다고 하는데 특히 천문학에 대해선 거의 전문가 수준이라 아버지인 세조가 관련부서 관원과 함께 혜성을 관찰하고 기록하는 임무를 맡겼을 정도. 또 어느날은 삼신통재(풍수학 책인듯)라는 책을 얻더니 예종에게 '금연진경'과 '백중경'이라는 책도 봐야하는데...하고 책을 구해달라는 부탁을 돌려서 하자 깜짝놀란 예종이 관련부서 관원인 안효례를 불러 묻자 '왕자님이 풍수지리를 본격적으로 배워보고 싶다고 하시길래 조언을 드렸는데요?'라고 대답함. 결국 앞으로는 그러지 말라고 잘 타이르면서 마무리. 물논 거기에 관련된 관원들은 처벌을 면치 못했다(...). 성종대에는 종친부의 일을 맡아보면서 종친의 집에 있는 기첩의 자식은 종량토록 하거나 종친은 6살 차이 이상 나는 자와 혼인할 수 없게 만드는 법을 제정하도록 청원하는등(그런 주제에 덕원군 자신은 혼인을 네번이나 함) 나름 정치에 관여도 하며 세있는 종친 행세를 한듯. 불사를 드린 일로 대간의 탄핵을 받기도 했지만 물논 성종은 쿨스루. 대신 거기에 관련된 다른 사람들은 짤없이 처벌받았다(이래서 부모형제는 잘두고 봐야.....) 창원군 이성(李晟) 1457년 혹은 1458년 생. 만인의 아이돌이었던 형과는 다르게 어렸을 때부터 그피는 어디 안가는지난폭한 행실로 부모 속을 제대로 썩였다. 정희왕후가 여러번 불러다 야단을 쳐도 그때 뿐 말을 전혀 듣지 않았다고. 조정의 관원을 자신의 사사로운 일을 해결하는데 멋대로 동원하거나 길에서 만난 조정 신료가 자신을 보고도 말에서 내리지 않았다며 깽판을 부리질 않나, 온천에 피접간다고 거짓말을 하고 멋대로 타 지방으로 이탈해서 온갖 사고는 다치고 다니는 등(종친이 다른 곳으로 여행을 가려면 그 전에 미리 조정에 알리고 알려진 곳 이외에 다른 곳으로 벗어나는 것은 철저히 금지당했음. 아마 역모를 방지하기 위한 조치일듯) 문제가 많았다고 한다. 그 때마다 처벌 받는 것은 창원군이 아니라 애꿎은 그의 종들(....). 그의 난행에 관련한 가장 유명한 사건은 고읍지 사건인데 1478년 그의 집의 여종이었던 고읍지라는 여인이 온 몸이 칼로 난도질 당한 채 목이 졸려 죽은 채로 발견된 일이 있었음. 그래서 사건을 조사하는데 점점 창원군과 관련된 증거들이 속속 드러나기 시작했음. 그래도 이왕 시작한 조사 창원군의 집을 수색하기 시작하자 '난 왕의 아들임! 니가 뭔데 감히 내집을 조사함?'하고 제발이 저려서 화를 버럭 냈다고. 결국 범인은 창원군으로 밝혀졌는데 자기한텐 작은 아버지급의 창원군을 차마 처벌할 수 없었던 성종은 '이건 주변 사람들의 증언만 있지 확실한 물증은 없지 않음? 확실한 증거 가저오셈' 하고 피를 토하는 를 침. 물논 신하 개무시ㅇㅇ. 그래서 이번엔 성종이 직접 친국을 했는데 창원군이 아니라 그집 종들을 데려다가 친국^^(창원군 집 노비들 : 어쩌라고). 결국 저 난리부르스를 치고 나서도 창원군이 범인이라는 증거가 속속 나오자 성종은 물증이 없으니까 살인죄는 처벌 못하지만 공무집행방해죄로 처벌하겠음ㅇㅇ하고 무리수 돋는 판결을 내림. 그 처벌이라는 것도 신하들이 재산 뺏고 귀양을 보내라는 걸 할머니 정희왕후 핑계까지 대가면서 한양을 나가 근신하는 것으로 마무리함. 그나마도 그 해 대왕대비(정희왕후)의 '세조대왕 아들은 덕원군 형제 뿐인데 멀리 보내는 것은 옳지 않다'는 적극 로 다시 한양에 돌아왔고 다음해는 직첩이랑 재산도 전부 돌려줌. 이게 말이야 방귀야..... 이렇게 패악을 부리고 다니던 창원군은 성종 15년인 1484년 서른살도 못되어 죽었는데(아마 창원군 집 노비들이 제일 기뻐했을듯) 이 때 대신들이 내린 시호가 여도(戾悼). 저 여(戾)자에는 '지난 일을 뉘우치지 않음'이라는 의미가 담겨있었는데 어머니인 근빈 박씨가 '얘가 구제못할 망나니인건 맞지만 그래도 죽은 앤데 저건 너무 심하지 않나요ㅜㅜ?' 라고 시호를 고쳐주길 청원했지만 대신들의 반대로 뜻을 이루진 못했다고. 정부인인 교하 노씨를 비롯해서 세명의 부인을 들였는데 모두 후사를 보지 못하고 형인 덕원군의 2남이 양자로 들어가서 그의 가계를 이었다고 함. 조선사에 미친 영향이 미비해서 저 시대를 극화해도 잘 등장하지 않는 편인데 최근에 방영된 MBC단막극 불온에서 진용석진태현이 창원군 역을 맡아 연기 한 바 있음. 3. 폐소용 박씨(廢 昭容 朴氏), 혹은 덕중(德中) 子 : 1남 왕자 아지(요절) 앞에 붙은 폐라는 글자에서 알 수 있지만 소용의 자리에 있다가 폐위된 후궁임. 덕중은 소용 박씨의 이름ㅇㅇ 덕중은 원래 수양대군 집 여종이었음(일설엔 정희왕후를 모시던 시녀였다는 설도 있지만 확인된 바 없음)그러다 세조(당시는 수양대군)의 눈에 띄어 그의 첩이 되어 아들을 하나 낳고 세조가 왕이 된 뒤 소용 첩지를 받음. 여기까진 좋았는데 아들이 일찍 죽고 세조의 관심도 사그러들자 적지 않게 외로웠던 모양. 이 때를 기점으로 기행을 저지르기 시작함. 내시 송중(宋重)을 짝사랑해서 그에게 추파를 날리다 세조의 눈에 뙇! 하고 걸리고 만거임. '아 나 ...가오 안살게 내 승은까지 입은 여자가 내시를 짝사랑해서 추파를 던지다니 이게 무슨 망신임?;' 그래도 한 때나마 정을 주고 자기 자식까지 낳았던 여자라 죽이기엔 뭐했는지 직첩만 빼앗고 일반 궁인으로 남게 놔둠. 여기서 끝났으면 좋았을텐데 이 여자는 더욱 대담한 사고를 치고 맘! 세종의 넷째아들 임영대군의 차남이자 세조에겐 조카가 되는 귀성군 이준에게 반해서 내시를 시켜 그에게 연서를 보낸거임! 식겁한 귀성군은 아버지와 함께 연서를 들고 황급히 세조에게 달려갔고 그 편지를 읽은 세조는 경악했음. "Aㅏ...." 결국 그녀에게 세번은 없었음. 세조는 그녀를 교형에 처하고 이 일을 불문에 부침. 조카 귀성군은 하나남은 친동생의 아들이라 그랬는지 처벌하라는 신하들의 상소에도 아랑곳 하지 않고 쳐줌. 귀성군은 이후 세조 때 영의정에 역임 했다가 성종 때 명망있고 군부에 줄있는 종친이라는 이유로 유배형에 처해진 뒤에 유배지에서 생을 마침. 모든 소박맞은 여인네가 저사람처럼 굴었던 건 아니지만 애초에 세조가 좀만 잘했어도 저런 일을 저지르진 않았을텐데 참 안타까움ㅠㅠ 4. 숙원 신씨(淑媛 申氏) 子 : 없음 이 쪽은 신숙주의 서녀로 말 그대로 정략적 의미로 들인 후궁 같음. 실록에서 어떠한 기록도 찾아볼 수 없는 것으로 보아 세조의 무관심을 짐작케 함. 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