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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양고양이ll조회 276l
이 글은 9년 전 (2014/7/25) 게시물이에요








[책] 전아리-팬이야 | 인스티즈

팬이야
전아리 저.




_
이렇다 할 꿈도 목표도 없다.남들처럼 일에 대한 욕심이나 야망이 있는 것도 아니다.
딱히 좋아하는 일이나 취미도 찾지 못했다.자주 만나 허물없이 속내를 털어놓을 수 있는 친구도 없다.
그리고 이제 유일하게 희망을 걸었던 사랑마저 끝이 났다.
나는 도대체 무엇을 기다리며 살고 있는 걸까.이제껏 삶을 뒤집어엎을 만한 어떠한 모험도 해본 적이 없었다.
무언가를 잃을까봐 두려워서,라고 둘러대곤 했지만
스물아홉이 된 지금에 와서 두 손을 들여다보니 딱히 잃을 만한 것도 없다.
생각해보면 모험의 부재가 문제였던 것 같기도 하다.내 삶에는 열정의 증거가 없었다.



















_
"이거 되면 뭐 주는 건데요?">
CD의 비닐포장을 뜯으며 옆의 여학생에게 물었지만
그녀는 나를 힐끗 쳐다봤을 뿐 다시 사람들 틈을 파고드는데 열중했다.
CD케이스를 열자 길쭉하고 흰 스티커가 눈에 띄었다.
스티커에는 'S10001'이라는 시리얼 넘버가 적혀 있었다.
나는 입을 조금 벌린 채 CD케이스와 매장 안쪽을 번갈아 보았다.
그때,옆에서 다른 사람들의 시리얼 넘버를 흘끔거리던 여학생이 와락 다가와 내 CD케이스를 잡아당겼다.
"어?이 아줌마 만일번째다!">
스물아홉이 된지 나흘도 채 지나지 않았는데 아줌마라니.
발끈해서 한 마디 해주려 했지만 어쩐지 주변 분위기가 심상치 않았다.
순식간에 매장내의 모든 시선이 내쪽으로 몰렸다.팬들은 부러움과 질투가 섞인 눈빛으로 나를 바라보았다.

"자,드디어 행운의 주인공이 뽑혔습니다.앞으로 나오세요!">
















_
왜였을까.네번째 멤버의 품에 안긴 순간 와락 서러운 감정이 몰려왔다.
며칠째 싱크대 하수구를 막고 있는 불어버린 미역이 떠오른 것도,
두번쯤 부재중 통화를 남겼을 뿐 더 이상 연락이 없는 동주가 새삼 그리워진 것도 아니었다.
두 팔로 내 등을 감싸고 있는 멤버의 품안이 너무나도 따뜻했기 때문이었다.
누군가를 이렇게 껴안아 본 적이 언제였던가.
두 손으로 심장을 조심스럽게 모아 잡은 듯 온몸에 따스한 기운이 흘렀다.
나도 모르게 눈시울이 축축해졌다.
주책이라고 생각하면서도 다섯번째 멤버에게는 내가 먼저 팔을 벌려 포옹을 했다.
















_
어쩌면 사람들은 질문은 나누기 위해 사랑을 하는 게 아닐까.
다정하게 이름을 부르며 물어오는,"지금 뭐해?밥은 먹었어?걷는 거 좋아해?"와 같은 소소한 질문들.
















_
좋아하는 상대가 어떤 인물이냐에 따라서 그에 대한 마음의 가치를 평가받는다.
이제껏 숱하게 짝사랑을 경험하며 깨달은 사실이지만,때로는 누군가를 좋아한다는 게 약점이 되기도 한다.
아무에게도 피해주지 않고 그저 혼자서 좋아하기만 했을 뿐인데도 말이다.















_
결혼하기 위해 지금까지의 인생을 누군가에게 평가받아야 한다면
차라리 얼룩무늬 고양이 한 마리와 함께 일생을 솔로로 보내겠노라고.













_
언제나 그를 만나러 가는 길에 가슴이 설렐때면,세상에서 가장 멋진 고백의 말을 고심해보곤 했었다.
물론 진짜로 고백을 하게 될 순간이 오리라고는 생각지 못했지만 말이다.
개중에는 꽤 그럴듯한 래퍼토리도 몇 개 있었는데,정작 그의 얼굴을 마주하자 모든 서사와 은유가 증발하고
민무늬 도자기처럼 단조롭기 짝이 없는 한마디만 머릿속을 맴돌았다.
좋아한다.그리고 또 좋아한다.










_
"때로는 순간의 감정으로 확신을 얻게 될 때가 있다.
게다가 오늘은 그 확신을 지지하고 싶다는 마음까지 들었다.
설령 일이 잘 풀리지 않아 후회하게 된다고 해도,지금 최선을 다해 본 뒤 미래의 나에게 당당해지고 싶다.










_
"웃기시네">

"내가 지금 현우 때문에 여기까지 와서 이러고 있는 줄 알아?">

"나 때문에 온거야,억울해서.내가 이 나이에 현우 걔 따라 다니면서 보낸 시간이 얼만데.
좋아해 준 사람 생각은 안하고,자기들끼리 교체요 탈퇴요 북치고 장구치고 하면 땡인가?">

"좋아하게 만들었으면 끝까지 책임을 지란 말이야.">









_
때로는 결과가 뻔히 예상되는 일임에도 일단 저질러 보자는 오기가 생길때도 있다.
의외의 결과가 야기될 가능성이 0.01 퍼센트라도 있지 않을까 하는 희망 때문에,
어쩌면 우연히 만나게 될 그런 결과가 내 삶을 새로이 바꿔줄지도 모른다는 기대의 판타지.
그건 건빵 속 별사탕 같은 존재였다.








_
좋아한다,그리고 또 좋아한다.
한 인간이 다른 인간에게 줄 수 있는 행복의 최대치는 과연 어느 정도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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