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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카 목욕에 대한 제목+내용 검색 결과
오드리될번ll조회 2348l 1
이 글은 12년 전 (2011/10/19) 게시물이에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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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instiz.net/pt/302405 

▲북한엘리트층탈북수기-1

 

그랬더니 아픔과 함께 순간 뇌리를 치는 곳이 있었다. 우리에게 세숫물과 함께 밥까지 주셨던 그 노인의 집이 떠올랐다. 나는 다시 용정리까지 걸어갔고 근심했던 것과 달리 쉽게 중학교 교사를 했다는 그 노인의 집을 찾을 수 있었다.

“친구는 어디 갔소?”
“연길교회에서 전화로 공안을 부르기에 도망치다가 헤어졌습니다.”

나는 거짓말 했다. 노인이 소개해준 곳에서 봉변을 당했으니 책임지라는 식이었다. 방으로 들어서기 바쁘게 그 집 전화로 광용을 찾았다. 신호음이 울리는 동안 광용의 첫 음성은 과연 어떨까? 혹시 친구가 받았으면…….하고 기원했다.

“지금 어디요?”

광용의 거친 질문에 나는 흠칫했다.

“나 지금 용정리인데 혹시 친구가 전화 안 왔었어요?”
“안 오긴 왜 안와, 이틀 전에 전화 왔었어요.”

나는 안도의 숨을 크게 내쉬었다. 그리고 밖에 펴놓은 옥수수를 돌보고 있는 노인의 동정을 살피며 헤어지게 된 경위를 소곤소곤 말했다. 광용의 말에 의하면 급히 만나자고 해서 나갔는데 친구 주제가 말이 아니더라는 것이다.

손전등들이 무리로 마을 입구로 들어서는 모습을 보고 황급히 뛰다나니 산을 넘게 되었고 길을 잃고 헤매던 중 이리저리 온 곳이 연길이었다는 곳이다. 그런데 문제는 친구가 친척집을 찾아가겠다고 고집했다는 것이다. 내가 전화 오면 자기가 친척을 데리고 올 때까지 기다리도록 잘 설득하라며 만약 잡히면 그때 도망치라했다는 것이다.

“안 된다고 했지요?”
“어떻게 그렇게 해요? 그 사람 혼자라도 갈 기세던데, 그러다 잡히면 나도 끝나겠는데,”

일단 친구를 집에 숨겨두고 광용이는 다른 사람을 내세워 친구의 작은 삼촌이라는 사람을 만났다는 것이다. 핏줄이 가까워서인지 작은 삼촌은 자기 조카가 절대 살인할 사람이 아니라며 무척 만나고 싶어 했다는 것이다. 그 사실을 알리려 집에 전화하니 친구가 목욕하고 밖에 나갔다는 것이다.

그때부터 몇 시간 연락이 두절 돼 자기도 지금 바늘방석에 앉은 것만 같다는 게 광용의 마지막 설명이었다. 나는 그동안의 방랑생활에서 자신감이 생겨 잠시 경솔해진 것이니 곧 들어올 것이라며 안심시켰다.

그러나 노인의 집에서 잡일을 해주며 3일을 기다렸지만 친구는 끝내 나타나지 않았다. 그 3일 동안 나는 한 번도 심장이 조용히 뛴 적 없었다. 그러던 어느 날 광용의 다급한 전화가 왔다.

“금방 창용 삼촌 아주머니한데서 전화가 왔는데 친구가 잡힌 것 같아요! 공안이 와서 탈북자들 한데 돈을 얼마 받았냐며 창용 아저씨를 싣고 갔대요. 나도 집을 옮길 테니 당신도 빨리 그 곳을 떠요.”

나는 드디어 올 것이 오고야 말았구나! 하는 당혹감에 두 무릎이 떨렸다. 붙잡히면 죽을 것이라는 충만했던 각오도 그 순간에는 허무하게 무너졌다. 더불어 나도 이제 곧 공안에서 덮칠 것만 같은 착각이 내 몸 안으로부터 세차게 요동쳤다.


6.

광용의 전화를 받고나서 나는 서둘러 옷을 입었지만 이내 다시 주저앉고 말았다. 돈 한 푼도 없이 어디로 간단 말인가? 그땐 정말 노인네 집 머슴이라도 될 수 있다면! 눈 감고 이런 짧은 생각을 해보기도 했다.

그렇지! 눈이 번쩍 떠졌다. 창용 아저씨밖에 없다. 그는 내 돈 700달러씩이나 받지 않았는가. 주었던 걸 돌려달라면 비열한 짓인 줄 알았지만 내 처지에 무슨 인격을 돌보겠는가? 나는 전화를 들었다.

“광용이한데 전화번호를 알았는데요, 창용 아저씨 아직 안 들어왔어요?”
“그래, 도대체 어떻게 된 거야? 왜 헤어진 거야?”

창용 아저씨 처는 겁에 질려 목소리까지 떨고 있었다.그것을 안 그때의 나는 정말 몹쓸 인간이었다.

“내 말 똑바로 들으세요, 내 친구는 돈 준 사실을 전혀 몰라요, 내가 준 돈이었거든요, 그러니 안심하세요, 그러나 만약(나는 여기서 힘을 주었다.)내가 잡히는 경우 어떻게 될지 몰라요, 그러니 내가 지금 당장 어디든 멀리 떠날 수 있게 광용이에게 전화해서 돈 100달러를 준다고 약속해요.”

창용 아저씨 처는 하늘에까지 맹세했다. 하여 나는 연길에서 신광용을 만나 300원을 손에 쥘 수 있게 되었고(나머지는 만약 친구가 오면 주라고 남겨두었다.) 심양으로 가는 버스에도 오를 수 있었다. 노인의 말에 의하면 심양주재 한국 영사부가 있는데 거기를 걸쳐 한국 가는 탈북자들이 많다는 것이다.

버스에 올라 털썩 주저앉고 나니 너무도 엄청난 일들이 단 몇 초 사이에 이루어진 것 같았다. 그리고 그때에야 친구의 불행에 대해 돌이켜보게 되었다. 정말 잡혔을까? 잡혔다면 지금 그는? 그러나 나는 자신에게 놀랐다. 왜 친구 잃은 슬픔보다 자신을 잃을 공포부터 앞세웠던가? 생사를 약속하고도 나는 왜 자결까지 결심했던 친구를 뒤에 두고 허겁지겁 달아날 궁리부터 했단 말인가? 비겁하고 치사하고 가증스러운 나! 나! 나! 이렇게 되뇌이며 손톱으로 계속 내 살을 꼬집었다. 그렇게라도 하지 않으면 용서가 안 되고 스스로에 대한 미움을 도저히 표현할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시간이 흐르자 광용의 말을 다시 한 번 곰곰이 의미해보고 싶어졌다. 창용 아저씨가 공안에 불려갔다. 친구가 잡힌 것 같다. 이것이 전부일 뿐 확실한 근거는 없지 않은가? 아니 창용 아저씨가 미워하던 그 중국여자가 신고하여 단순한 조사 차원일 수도 있지 않은가? 친구는 살아있으리라. 이 미련으로 마음을 다잡으니 박동소리가 약해지며 조금 편해진 듯싶었다.

그것도 잠깐. 나는 이번엔 버스에 불안해졌다. 도 경계선은 물론 군을 하나하나 통과할 때마다 군인들이 올라와 통행증을 일일이 검열하는 북한처럼 이 버스가 검문소 앞에 멎으면 어쩌나 싶어서였다. 6시간 넘게 달리는 동안 그렇게 나는 떨어야 했고 기도해야만 했다. 마침내 야경이 넘치는 도시가 보였다. 그 화려한 중심으로 버스가 당당하게 질주할 때는 친구를 좀 더 기다렸을걸! 저 불빛들을 함께 볼 수 있다면! 하는 후회와 희망이 썰물과 밀물처럼 혈관 속으로 오고갔다. 버스가 멈추기 바쁘게 승객들 중 가장 먼저 내린 나의 눈에 거대한 시계가 보였다. 12시 20분을 가리키고 있었다.

이젠 어디든 갈 수 있을 것만 같은 자신감의 시간은 그 때뿐, 공안들이 또 서있는 광경에 나는 그만 기겁하여 몸을 숨겨 찾아 들어간 곳이 PC방이었다. 물론 알아서 거기 눌러 앉은 것은 아니었지만 우연 중 다행으로 한 구석 의자에 앉아 밤새 눈을 붙일 수 있었다…….

누군가 심하게 흔들어 깨웠다. 화들짝 놀라 벌떡 일어나니 핑크색으로 머리를 염색한 여자가 비명 지르며 뒷걸음 치고 있었다. 내가 몸을 솟구칠 때 떨어뜨린 만두 세 개 때문이었다. 나에겐 목숨 같은 식량인 그 만두들을 똥처럼 혐오스럽게 보던 핑크머리가 줍고 있는 내 등에 대고 욕을 했다. 그때 만두를 집으며 나는 속으로 욕했다. “북한 같았으면 네 머리 꼴만으로도 개년 돼!”

나는 그 PC방을 나올 때 간판을 익혀두었다. 훗날에도 또 가리라, 물론 핑크머리년이 없는 곳으로! 밝은 거리를 걷는 나는 연길에서와 달리 발걸음이 가벼웠다. 중국이 이렇게 생겼구나, 이런 곳이 외국이구나. 여권도 없는 공짜 관광이 흡족했다. 북한에서 볼 수 없는 광고들을 신기하게 쳐다보며 걷다나니 불안이 점 점 일어섰다. 한글들이 슬 슬 지워지더니 간판들이 모두가 중국어에 가려졌기 때문이었다. 그 도시가 심양이 아닌 장춘이라는 곳을 알았을 때는 기가 막혔다. 심양은 또 어디란 말인가? 나는 일단 한국말을 알아들을 수 있는 곳부터 찾아가야겠다고 판단했다. 그래서 간 곳이 “고향밥”이란 한글간판 음식점이었다.

“심양 가려고 하는데 알려주실 수 없습니까?”

식당 아줌마는 골똘히 쳐다보더니 대답 대신 무언가 내밀었다. 한글로 된 관광 안내책자였다. 책이 그렇게 인간에게 필요한 물건인줄 그때 새삼 알았다. 그 책이 가리키는 곳으로 버스터미널을 찾아갔고 그 책 덕에 “썬양”하고 입을 열어 티켓도 구매할 수 있었다. 버스를 기다리는 동안 나는 김광선에게 전화를 걸었다.

“친구소식 없어요? 창용 아저씨는?”

광용은 달라진 것이 없다며 자기 사정을 더 길게 털어놓았다. 급하게 친구 집으로 짐을 옮기다나니 여간만 불편하지 않다는 것이다. 그 말을 듣는 동안 나는 그가 잠시 미웠다.

“내 친구가 꼭 전화 올 겁니다. 절대로 핸드폰을 꺼 놓지 말아요. 내가 지금 심양으로 가고 있으니 만약 친구가 오면 바로 출발하라고 해요”

심양으로 가는 버스 안에서 나는 하마터면 환성을 지를 번했다. 관광안내 책자에 심양 주재 한국 영사관 전화번호가 있는 것이었다. 나는 흥분됐다. 장춘 버스와 달리 심양버스는 느려 터진 것만 같아 발을 굴렀다. 빨리 가면 빨리 한국 갈 수 있는데, 심양에서 내리기 바쁘게 전화박스를 찾아 뛰었다. 두만강을 넘을 때부터 이렇게 줄곧 뛰었지만 언제 단 한 번 내 발이라고 느껴본 적 있었던가.

전화박스 안에서 번호를 돌릴 때에는 손이 부들부들 떨렸다. 신호음이 울리던 끝에 “여보세요”하는 남자의 목소리가 들리자 숨이 컥 막혔다.

“여보세요, 한국 영사관이지요?”
“네, 누구세요?”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나는 한국 영사관이 내 전화를 받고 있다는 사실에 너무도 격정이 끊어 올라 정신없이 이 말부터 마구 해댔다.

“근데 누구세요?”

나는 크게 호흡하고 또박또박 말했다.

“저 북한에서 왔습니다. 친구도 함께 왔습니다. 한국 가려고 합니다. 신분증도 가져왔고 정말 북한 사람 맞습니다.”

응답이 없었다. 기다렸지만 조용했다. 아니 전화가 끊어져 있었다. 망할 놈의 중국 전화! 나는 전화기를 주먹으로 쾅 쾅 쳤다. 고장 났다고 생각했던 것이다. 그래서 다시 뛰었다. 달리는 동안 주먹을 불끈 쥐었다. 내 전화를 애타게 기다릴 한국 영사관 직원을 생각하니 그동안의 고생들이 한꺼번에 두 눈으로 주르르 흘러 내렸다.

“여보세요”

다른 전화박스 안에서 이번엔 내가 먼저 불렀다.

“네 누구세요?”
“금방 전화했던 사람입니다. 한국 망명을 신청하려고 합니다. 신분증도 가져왔습니다. 공안이 우리를 살인자로 지목하고 수배하고 있습니다. 우린 절대 살인하지 않았습니다.”
“여보세요, 다 알겠는데 내 말 잘 들으세요, 이 전화가 그렇게 안전하지 않아요, 무슨 말인지 알겠죠?”

그 말에 나는 사방을 황황히 둘러보았다.

“여기 심양에서는 한국 가기 힘듭니다. 한국 갈려면 북경 대사관이나 영사관을 찾아가십시오, 우린 도움을 줄 수 없습니다.”
“북경 대사관에는 어떻게 가는데요? 어떻게 들어갈 수 있어요?”
“그건 탈북자들이 다 알아서 들어가요. 그것까지 우리가 어떻게 알려줘요?
전화 오래 못해서 그러는데 이만 끊겠습니다.”

나는 전화를 그냥 들고 서있었다. 해외공관들의 전화가 주재국 정보기관들의 도청에 노출돼 있고, 그래서 혹시나 공안이 이쪽으로 올 수도 있다는 생각을 하면서도 움직이지 못했다. 어떻게 여기까지 왔는데? 어떤 시련을 넘으며 왔는데? 설명을 잘 하지 못한 내 탓인 것만 같아 다시 전화를 걸었지만 이번엔 받지 조차 않았다.

마치도 그 침묵은 교회에서 중국인들이 우리를 쫒던 욕질 같았고 하루 밤만 재워달라고 애원하는 우리를 보고 쾅 닫아버리던 대문 같았다. 대한민국이 이다지도 먼 단 말인가? 대한민국이 우리 탈북자들을 구출할 권한이 이렇게까지 없었단 말인가? 전화박스 밖으로 나올 때 세상 끝으로 누가 날 밀어버리는 것만 같아 서러움이 확 북받쳤다. 스스로 알아서 가야 한다는 영사관 직원의 그 말에는 북한 주민인 내가 전혀 없었고 그래서 내 보기에도 나란 존재는 이국의 하늘 밑을 떠도는 작은 먼지 같았다.

나는 그날 주머니에 남아있는 마지막 돈으로 술을 마셨다. 한 잔 두 잔 먹다나니 연길에서 친구가 술을 사자고 말했던 그 상황이 그때가 아니라 지금 같았다. 친구가 그리워졌다. 제발 살아서 나에게로 와주었으면, 제발 내일은 그와 함께 새롭게 시작했으면,아파트 옥상 위에서 그렇게 자고 일어난 나는 아침이어도 갈 데가 딱히 없었다.

아래를 내려다보니 친구의 칼이 생각났다. 아직도 친구는 칼을 가지고 있을까? 만약 정말로 공안에 잡혔다면 그 칼을 원했던 것처럼 사용했을까? 이 생각까지 이르고 나니 나는 어디든 가야겠다는 결심이 서게 됐다. 그렇다. 북경으로 가자. 남들도 알아서 간다는 길을 내가 왜 못 가겠는가. 가자고 온 것이 아닌가. 여기까지 살아오지 않았는가.

나는 지붕 바닥 한쪽에 고여 있는 눈 녹은 물로 세수를 했고 옷도 툭툭 털었다. 그리고 시를 쓸 때와 같은 영감으로 사색했다. 사람도 땅도 모두 낯 설은 저 밑으로 내려가면 내가 가장 먼저 해야 할 일이 무엇일까? 계단을 내려 현관까지 가는 동안 아무리 머리를 굴려보아도 결론은 오직 하나였다. 사람이었다. 그것도 말부터 통하는 조선족을 찾는 것이었다. 그런데 어떻게 만난단 말인가? 중국말로 꽉 찬 이 심양에서! 그때 문득 좋은 방법이 떠올랐다.

나는 우선 조용한 골목길에 섰다. 그리고 행인들을 행해 조용히 불렀다. 남자가 지나가면 “아저씨!” 여자가 지나가면 “아가씨!”했다. 중국인이라면 그냥 지나갈 것이고 조선족이라면 틀림없이 반사적으로 돌아볼 것이리라. 그렇게 한 시간 또 한 시간, 어느덧 시간이 흐르고 흘러 해가 점점 서쪽으로 기울어졌다. 세끼를 굶은 이 채로 또 하루가 지나면 어쩌나. 그 조바심에 애가 타는데 그때 저만치서 26살 돼 보이는 여자가 내 쪽으로 오고 있었다. 나는 앞에서 부르면 말을 알아듣지 못해도 목소리에 반응하기 때문에 그 여가 등을 보일 때쯤 불러보았다.

“아가씨!”

그러자 그 여가 걸음을 멈추었다. 돌아섰다. 그러더니 말했다.

“저를 불렀습니까?”


7.

"뭘 물어보시게요?"

틀림없는 한국말에 나는 그 여자가 구면처럼 느껴졌다.

"네"

머리를 끄덕이며 대답하는 내가 절박해보였던지 그 녀는 선뜻 나에게로 다가오기까지 했다. 나는 그때 가까이 오는 그가 고마웠다. 누군가로부터 이런 관심을 받는다는 것이 내가 아직 멀쩡한 인간이라는 것을 증명하는 것 같아서였다.

"어디를 물어보고 싶은데요?"

나는 마주 선 그가 며칠 동안 씻지 않은 내 몸 냄새에 불쾌해 하지 않을까 내심 걱정했다.

"우선 내 말을 마지막까지 들어주겠다는 것을 약속해주십시오"
"?"

여자는 조금 당황하는 눈치였다. 그리고 그때야 내 아래 위를 얼핏 흩어보았다.

"전 이상한 사람은 절대 아니고 아가씨에게(동무라고 말할 번했다.) 해를 끼칠 사람도 아닙니다. 그냥 5분만 시간을 내서 제 이야기를 들어주셨으면 합니다."

여자는 손목시계를 들여다 보고나서 머리를 끄덕거렸다. 나는 내가 북한에서 왔고 친구랑 헤어진 딱한 사정이며, 한국으로 가려고 한다는 것까지 절절히 호소하다시피 했다. 그러나 배고픔과 관련해서는 단 한마디도 꺼내지 않았다.

왠지 그때에는 같은 사람 대 사람 사이에 할 말이 아닌 듯싶어서였다. 내 말을 다 듣고 난 그 여자는 자기가 도울 수 있는 것이 뭐냐고 물었다. 다 들어줄 것만 같은 그 물음에 목구멍까지 나오는 "밥입니다." 말 대신 나는 "한국 가는 방법을 좀 알려주십시오."했다.

내가 그러길 잘했던 것 같다. 그 여자는 낯선 남자라는 경계심을 풀고 부지런히 설명하기 시작했다. 심양보다 북경 영사관으로 다들 간다는 것과, 한국 사람들이 많이 오는 대련으로 가면 고생이 덜하다는 것, 그리고 돈이 있으면 중국 여권을 만들어 갈 수 있다는 것까지 참으로 아는 것도 많았다.

"어떻게 그런 걸 다 알아요?" 이 질문이면 대화를 좀 더 이어갈 수 있을 것 같았다. 역시나 그 여자는 내가 찾던 말동무임이 분명했다. 또 다시 이어가는 그 여자의 말 들 속에서 가장 반가웠던 것은 화룡시에 사는 자기 아버지가 탈북자들을 농사시키며 많이 숨겨주었다는 것이었다.

나는 무척 놀라며 그의 아버지를 대단한 분이라고 칭찬해주었다. 그러고 나서 내가 연길에서 심양까지 오는 길에 신세졌던 고마운 조선족들과 그들에 대한 나의 감사함을 열렬히 토로했다. 그 여자가 불쑥 물었다.

"이 심양에 친척이 있습니까?"

나는 고개를 가로 저었다.

"그럼 어디서 잡니까? 밥이나 먹었습니까?"

나는 먹었다는 말은 차마 입에서 안 나왔다. 잠시 고민하던 그 여자는 핸드폰으로 어딘가 전화를 했다. 혹시 공안에 신고라도 하는 것은 아닐까? 그의 핸드폰과 중국말이 조금 긴장되었다. 이윽고 나를 향해 돌아선 그 여자가 활달한 표정으로 말했다.

"아까 친구가 나에게 찜질방 같이 가자고 했었는데 물어보니 표를 주겠답니다. 거기서 자겠습니까? 여기서 멀지 않습니다."

그 아버지의 그 딸이구나 하는 생각이 머리를 스쳤다. 나는 그와 함께 걸으며 이름을 물었다.

"왕초린!"

몇 번을 못 알아듣는 내 귀가 신기했던지 자기 이름을 소리치며 깔깔 웃었다. 나이는 내가 알아맞히겠다고 했더니 고기 굽는 리어카를 가리키며 맞히면 저 양꼬치를 사주겠다고 했다.

먹을 것 때문에 여자 나이를 가슴 조이며 점쳐 본 적은 아마 그때가 난생 처음인 것 같다. 얼마나 그게 빨리 먹고 싶었으면 "26살!"하고 외친다는 것이 "양꼬치!"해버렸다. 얼굴이 확 달아올랐다. 다행히도 초린은 내 실수를 모른 채 양꼬치를 진짜 사줄 것이라며 거듭 다짐했다.

"26살"조심스런 내 음성에 "몇 살?" 다시 물었다.
"26살"내가 좀 더 크게 말하자 초린은 손뼉을 짝짝 쳤다.
"틀렸어요, 에궁 양꼬치 못 사주겠다……."

그 말에 양꼬치가 더 간절해졌다.

"도대체 몇 살이에요?"
"27살"

단호한 그 대답에 나는 속으로 '일 년 늦게 태어 날 것이지...'하고 푸념했다. 그러나 초린은 마음이 예뻤다. 일 년 젊게 봐준 턱이라며 쪼르르 달려가 양꼬치를 네 개씩이나 사들고 왔다. 나는 사람은 역시 고기를 먹어야 한다니깐! 이렇게 감탄하며 두 개를 먹었고 초린이 준 한 개를 또 먹었다. 초린이가 꼭 소원 성취하라며 친구로부터 받은 찜질방 표를 내밀 때 나는 부탁했다.

"조금만 더 있다 가면 안 돼요? 난 그동안 공안에 쫒기며 사람이 무서웠었어요, 그래서 사람이 그리워요."

측은한 눈길로 바라보던 초린은 미소를 지어보였다.

"힘내요. 나도 그러고 싶은데 내 대상이 기다리고 있어요."
"대상? 그게 뭐죠."
"음,,,뭐랄까. 한국에선 애인을 자기라고 부르잖아요. 우리 조선족은 대상이라고 해요"

이후 목욕을 하면서 나는 초린의 말에서 새롭게 안 대상의 의미에 피씩 웃었다. 뜻은 같은데 말이 다른 이국적인 여자를 직접 만난 그 시간이 믿기지 않을 만큼 새로워서였다.

나는 그날 씻고 또 씻었다. 몸이 깨끗해 질 기회가 다시 없을 것 같아 양꼬치 먹은 힘을 다해 때를 밀었다. 비누를 문댈 때 마다 친구생각이 났다. 나는 이렇게 더운 물에 목욕을 하는데 친구의 지금 상황은 어떨까. 광용에게 전화 할 돈도 남기지 않고 술을 사 먹은 내가 한심하기 짝이 없었다.

다음날 아침, 눈을 뜨니 몸은 깨끗해졌지만 대신 아프지 않나싶을 정도로 배가 고팠다. 온 몸이 나른했다. 내가 여기서 어떻게 자게 됐는지. 그것도 한참을 생각해봐야 했다. 이어 초린이 생각이 났다. 참 고마운 애였지. 그런데 그 얼굴을 아무리 되새겨 보려 해도 좀처럼 기억나지 않았다. 그냥 양꼬치만 보였다. 그때 내 옆에 누군가 서있는 것만 같았다. 누굴까? 나는 망설였다. 두만강을 넘은 후부터 내가 먼저 남을 쳐다본 적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맞지요? 어제 그 사람 맞지요?"

그 목소리에 고개를 돌리니 아니 글쎄 초린이가 아닌가.

"어떻게? 여기 어떻게 왔어요?"

나는 중국 땅에서 처음으로 지인을 우연히 만난 행운에 내가 한국말을, 그것도 북한 억양으로 소리치는 줄도 몰랐다.

"짜잔!"

초린은 폴싹 주저앉으며 플라스틱 통에 담겨진 흰 빵을 보여줬다. 나는 그때만큼은 진심으로 음식보다 사람이 더 반가웠다.

"어떻게 왔어요? 친구랑 같이 왔어요?"
"아니, 음식 줄려 왔어요. 어제 헤어질 때 사람이 그립다면서 더 있어달라고 말하던 게 자꾸 맘에 걸려서 분명 아침을 굶었겠구나, 이러면서 왔어요. 먹어요."

빵을 집어주는 그 손에 나는 무엇이든 주고 싶었다. 갑자기 공안이 가져간 내 외투안의 달러 생각이 났다.

"내가 어제 대상을 만나 자랑했어요. 이러이런 사람을 만났는데 이러이런 도움을 주었다고"

공상에 잠긴 듯한 초린의 표정이 무척 귀여웠다.

"대상이 뭐라고 해요? 중국 사람인가요?"
"네, 여기 한족이예요, 금방 뭘 물어봤죠? 아 참 내 대상이 뭐라고 했는지 그걸 물어봤죠?"

나는 그냥 웃었다.

"잘했다고 하던데요. 날 보고 착하다고 하면서 일요일 옷 사 주겠다고 했어요. 그 사람 착하죠?"

나는 둘 다 착하다고 말하고 싶었다.

"우리 대상도 김정일이 엄청 싫어해요. 아마 중국 사람들은 다 미워할걸요. 배 나온 게 싫어서. 조선은 다이어트 안 하죠?"

나는 마음씨도 말도 예쁜 초린에게 물이라도 떠주고 싶었다. 그래서 주변을 둘러보는데 벌써 그가 냉큼 일어나 물 컵을 두 개 들고 왔다. 그리고 허리를 굽히며 앉는데 옷 사이로 가슴굴곡이 살짝 보였다. 예쁜 그 속살은 도덕이요, 위선이요 하는 그 모든 겉 치례들을 부정하며 순수한 초린이 자체를 보여주는 듯싶었다.

"한국 언제 갈려고요?"

나는 아무에게라도 말하고 싶었던 고민들을 모두 털어놓았다. 설사 초린이가 그냥 사라진다고 해도 그가 들어주는 것만으로도 나는 무엇인가 얻는 것 같았다. 초린은 영리하기까지 했다. 광용에게 친구안부를 묻는 문제는 자기가 맡겠으니 한국 갈 큰돈을 해결할 논의나 하자고 하였다.

"돈 좀 벌만한 재간이 뭐가 있어요?"

그러고 보니 나는 정말 할 줄 아는 것이 아무도 없었다. 중국에서 지금껏 잘한 짓이란 공안을 피해 달아난 것밖에 없었다. 한숨 끝에 피아노를 좀 친다고 말을 흘렸더니 초린이가 버릇인지 손뼉을 쳤다.

"피아노를 칠 줄 알아요?"
서울에서 내가 가끔 친구들과의 모임에서 피아노를 치면 그들은 북한 사람이 어떻게 피아노를 치냐는 식으로 놀라군 한다. 마치도 북한은 음악도 없는 나라인 것처럼 말이다. 그때도 초린은 피아노란 말에 반신반의하는 기색이었다.

"어느 정도 치세요?"
"체르니 50번 정도"

초린이가 피아노를 전혀 몰랐다. 체르니 50번이라고해도 그 의미를 이해 못하기에 나는 연습과정을 한참이나 설명해주었다. 그 말을 다 듣고 난 초린은 자기 대상 조카가 한국인이 많이 오는 서탑에 사는데 그에게 피아노를 가르치면 용돈도 벌고 기회도 생길 것이라고 했다. 내가 감격에 두 주먹을 불끈 들어보이자 초린은 손뼉 치며 응원해주었다.


8.

초린이는 나 때문에 거의나 두 시간 넘게 여기 저기 통화했다. 그 뒷모습을 보고 있자니 친척의 허락보다 그의 전화비가 더 걱정됐다. 북한 같았으면 그 통화 값이 일반 주민 월급의 3배가 넘을 것이다. 북한에선 핸드폰이 특권의 상징이기도 하다. 가입비만 800달러가 되고 그 외에 접수비용 100달러를 더 내야 한다. 그러고도 중앙체신성 체신상의 사인이 떨어질 때까지 일주일 넘게 기다려야 한다. 그 기간에 중앙체신성은 국가보위부와 인민보안성으로부터 신청자의 범죄경력, 혹은 핸드폰 사용가능 여부를 조회 및 협의한다.

모든 신청자들을 기분 나쁘게 하는 것은 핸드폰 번호를 줄 때 중앙체신성에서 두꺼운 중국산 구식 핸드폰을 300달러에 의무적으로 사도록 바가지를 씌우는 것이다. 그러나 불평 부리는 사람은 단 한 명도 없다. 내가 번호를 받을 때만도 허가결정 번호를 보니 2000번 안이었다. 그 소수의 특권으로 들고만 다녀도 폼 나는 물건이기 때문에 대부분 핸드폰 사용자들은 돈을 따지지 않는다. 별도로 해외에서 작고 예쁜 외국 핸드폰을 구입하여 쓰면 그만인 것이다.

가장 인기는 액정판이 칼라로 된 한국의 삼성 핸드폰이 다. 이렇게 핸드폰 구입비까지 합쳐 거의 1500에서 1800불을 주어야 진정 목청 큰 핸드폰 소유자가 되는 것이 내가 북한에서 탈출할 때 당시의 2004년 실상이다. 일반 직장인의 한 달 월급이 2500원인데 핸드폰 한 달 최소 통화비는 2만원이니 열배나 넘는 통화요금에 습관적으로 늘 신경이 쓰였던 나는 초린이가 통화를 끝내고 돌아설 때 손을 저었다.

"안 된다면 그만 둬, 어차피 한국 가야 하는데"
"아닌데, 데려 오라는데"

초린의 대답은 짧고도 명료했다. 심양의 서탑이란 곳은 중국에 와서도 내가 처음 본 개혁개방 도시였다. 외국의 유명 로고타이프는 물론 한글간판들이 많고 너무도 번화하여 한국이 아닌가싶을 정도였다. 1월말인데도 흰 종아리를 드러낸 미니스커트를 입은 여자들이 신기했다.

김정일과 함께 원산 갈마초대소에서 식사하며 봤던 왕재산경음악단 무용수들의 짧은 치마 이후 두 번째인 것 같았다. 내가 처음 친구를 만났던 것도 그 자리에서였다. 당조직부 5과에서 지도원을 했던 친구는 할아버지가 김일성의 동지였고, 아버지는 김정일의 동창생이었다.

김일성의 회고록 "세기와 더불어"에서 당조직비서가 혁명선배들을 잘 모실 줄 안다며 사례를 든 이름이여서 북한에서 더 유명했다. 그래서 또 우리는 국경을 넘은 그 순간부터 살인자가 됐을지도 모른다. 변화와 세계가 보이는 이 번영의 도시로 친구와 함께 걸을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나는 이 생각으로 초린이가 앞에서 웃으며 손 흔드는 데도 아무 반응 없이 무표정한 얼굴로 따라갔다.

초린이가 삼촌이라고 소개한 사람의 집은 연길의 신광용의 집과는 판이하게 달랐다. 평수도 꽤 넓었고 큰 창문으로 들어오는 햇볕도 무척 밝았다. 가죽소파에 앉을 때에는 뒤로 넘어지는 줄 알았다.

"일단 피아노를 보여 주십시오."

아들 전용으로 보이는 작은 방에 검은 색 YAMAHA가 있었다. 나는 의자에 앉기 바쁘게 페달부터 밟아보았다. 그동안 얼마나 피아노를 그냥 방치했으면 오른 쪽 페달이 눌러지는 것이 아니라 뻑뻑한 게 긁히는 감이 들었다. 건반을 맨 아래 옥타브 음부터 위까지 눌러보니 소리는 괜찮아보였다. 검은색 건반들도 비교적 정상이었다. 다만 조율하지 않은지 좀 오래된 것 같았다. 나는 피아노는 노래하는 생명이기 때문에 자주 관리해주지 않으면 계절과 집안의 온도 변화로 사람의 목소리처럼 음정에도 이상이 온다고 훈시했다.

"한번 해봐요" 초린이가 참지 못하고 졸랐다.나는 숨찼던 시간들을 잊고 잠시나마 안정을 얻고 싶은 갈망에 베토벤의 월광 소나타를 속으로 먼저 의미해 봤다. 그러고나서 "라" 온음을 왼 손으로 지그시 누르며 오른 손으로 미 라~도 미 라~도 이렇게 8분음표로부터 시작하자 옆에 선 초린은 두 손을 살포시 마주 잡았다.

나는 두 눈을 감았다. 가을의 고요를 들려주는 것만 같은 전반부 선율에서 긴장으로 종 종 잊었던 두고 온 집을 보고 싶었다. 아니 보였다. 내가 치던 피아노며 어머니가 늘 앉아 감상하시던 소파, 내 귀가 어두워진다며 아버지가 감춘 헤드폰 대신 녹음기 스피커에 갔다 대고 몰래 듣곤 했던 어머니의 청진기. 그리고 누나가 안고 있던 조카의 작은 손까지 보니 눈물이 나올 것만 같았다. 이별이 슬픔으로 이어지고, 소원이 공포로 변하던 여기까지 오는 길의 갈래마냥 내 손이 빨라지는 간주와 후반 부분에선 심장이 막 뛰었다. 마지막 음정과 함께 페달에서 조심히 발을 뗄 때에는 미간이 떨리며 끝내 눈물이 주르르 흘렀다. 물을 떠 가지고 온 초린은 건반에 그냥 올려 진 내 손에 쥐어주며 다른 때와 달리 조용히 말했다.

"우리 삼촌 좋은 사람이예요, 그치 삼촌? 나도 오빠가 한국 갈 때까지는 친구처럼 잘해줄게요."

거실로 옮겨 앉은 우리는 앞으로 하게 될 일에 대해 이야기를 주고받았다. 초린의 삼촌 말에 의하면 애 교육은 신경 쓰지 말고 기회가 오면 내일이라도 당장 한국으로 가도 좋다고 했다. 아들에게 음악교육을 시키려는 이유는 전문성보다도 인성교육 차원이라고 했다.

어린 나이에 비하면 너무도 고집이 세고 난폭해서 음악정서를 주입시켜 억지로라도 교정해보고 싶다는 것이었다. 그러면서 무엇이 중요한가 물었다. 나는 정서를 알자면 우선 음감부터 익혀야 하기 때문에 청음연습을 동반하며 피아노를 배워주겠다고 했다. 삼촌은 머리를 끄덕이더니 지갑을 꺼내어 50원을 내밀었다. 초린이가 손뼉을 치려다 말고 자리를 박차며 발끈했다.

"삼촌 더 주세요!"

당황한 나는 집에서 먹고 자는 것만으로도 큰 신세라며 일어선 초린의 손을 잡아당겼다. 순간 그 손의 부드러움이 내 살 속으로 스며들었다. 산 속에서 날을 새고 소외양간에서 쪼그리고 잘 때 친구와 내가 주로 만졌던 것은 거친 것들밖에 없었다. 때로 친구의 손을 덥석 잡을 때에도 사람의 손이라는 생각을 못했었다. 떨리는 전율이 만져졌고 뜻밖에 살아난 두 목숨이 만져졌을 뿐이었다.

나는 초린의 그 손에서, 그 촉감에서 삶과 인간의 향수가 느껴졌다. 지금도 나는 선불일 뿐이라며 한 달에 350원을 주겠다고 말하는 삼촌을 향해 눈물에 젖어 쏘아보던 초린의 그 눈을 가끔 그려보군 한다.

우리가 이야기를 거의 마칠 때쯤 문이 떨어져 나갈듯 열리며 조그만 애가 쳐들어왔다. 삼촌이 중국말로 소리치는데도 그 애는 무엇을 찾는지 아랑 곳 없이 온 집안을 뛰어다녔다. 그리고는 들어올 때처럼 나갈 때도 문이 깨져나갈 듯이 쾅 닫고 사라졌다.

순식간에 벌어진 일이라 10살짜리 어린 애가 아니라 태풍이 휩쓸고 지나간 듯싶어 웃음이 났다. 상상했던 것보다 그 애는 훨씬 씩씩했다. 눈 떠서 잘 때까지 뛰거나 고함쳤다. 매일 아침 9시부터 나는 가르쳤고 초린은 옆에서 통역하고, 이렇게 어른 두 명이 달라붙었는데도 통제가 안 됐다.

피아노 앞에 앉으라면 의자위에 올라서 건반을 발로 밟았고 청음연습 시키려면 들려주는 음정마다 놀리듯 강아지 흉내 내며 멍멍했다. 보다 못해 삼촌 엄마가 한 손엔 막대기와 다른 손엔 칼을 들고 으름장 놓기도 했다. 초린의 설명에 의하면 삼촌엄마가 막대기를 들면 애가 부엌으로 달려가 칼을 들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아닐세라 삼일 후 그 녀석이 나에게도 칼을 장난감처럼 쳐들고 덤벼들기도 했다. 김광선에게 친구의 행처를 묻고 있는데 전화 선 코드를 뽑기에 쏘아본 것일 뿐인데도 말이다.

나는 그날부터 음악선생이 아니라 독재자가 되었다. 야단치는 것은 기본이고 애가 반항하려면 시범으로 초린이를 때린 척 했고 초린이는 아파 죽는 척 했다. 한번은 어린놈이 초린의 가슴을 들여다보겠다고 막무가내여서 막대기로 엉덩이를 몇 대 때리기도 했다. 울지도 않고 씩씩대던 그 동심의 결심이 어떤 엄청난 계획이었는지 나는 그때까지만 해도 꿈에도 몰랐다.

애가 밖으로 도망친 후 삼촌이 부르더니 70원을 주었다. 하여 내 주머니엔 120원이 모아졌다. 나는 그 돈으로 초린에게 밥을 사주고 싶었다. 고마워서이기도 하지만 그동안 도피생활로 잃었던 나의 인성을 찾고 싶었다. 떠돌며 쫓기는 과정에 밟히고 소멸된 내 인격과 자존심을 찾고 싶었다. 나를 인간으로 복원하고 싶었고 그 열정과 지혜로 하루 빨리 한국행을 다시 시도해보고 싶었다.

해가 점점 식어가는 저녁 쯤 나는 처음으로 외출을 했다. 초린과 그의 대상, 이렇게 셋이서 웨이터들이 현관 앞에 줄지어 선 고급음식점으로 갔다. 내가 사는 밥이어선지 입맛에 맞았다. 초린의 대상은 말은 통하지 않았지만 맘이 통할만큼 괜찮아 보였다. 나는 비로소 초린이의 앞날이 안심되면서도 한편으론 그 대상이 은근 슬쩍 부러웠다.

"너 배신만 해봐라!"

술이 조금 들어가니 이런 공갈도 하게 됐다. 웃으며 던진 그 말을 못 알아들은 초린의 대상은 좋은 뜻인 줄 알고 그냥 미소만 지었다. 나는 그때 언어란 것이 이렇게 중요하구나. 사람의 모든 감정은 언어로부터 시작되는구나 하고 새삼 알았다. 밥값은 내가 몰래 계산했는데 모태주가 비싸서인지 조금 모자랐다. 초린이 카운터로 달려와 야단치는 것을 나머지 돈만 겨우 내게 했다.

식사를 마치고 우리는 서탑으로 갔다. 대상이 거스름돈을 안 받겠다며 택시에서 먼저 내리자 초린은 기어이 받아내어 내 주머니에 살짝 넣어주었다. 나는 주머니에 들어온 그 손을 또 한 번 잡아보고 싶었지만 참았다. 대신 초린이가 두 남자를 양 옆에 끼고 콩 콩 뛰며 걸어서 행복했다.

삼촌 집 앞에서 초인종을 누를 때까지만 해도 웃고 떠들던 우리는 열려진 문 안의 광경에 굳어지고 말았다. 공안이 두 명 서 있는 것이 아닌가. 심장이 뚝 떨어지는 것 같았지만 왠지 이상하게도 죽고 싶은 정도는 아니었다. 그런데 다음의 상황에 나는 당황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삼촌 아들이 내 앞으로 흔들흔들 걸어오더니 내 배를 꾹 찌르며 중국말로 뭐라고 하는 것이 아닌가.

공안 한 명이 내 앞으로 바투 왔다. 대뜸 초린이가 나서며 그 말을 받았는데 나는 전혀 알아들을 수가 없었다. 공안과 초린이 사이에 고성이 오고 갔다. 이때라 싶었는지 초린이 삼촌이 설명했다.

"우리가 전에 당신이 탈북자이기 때문에 공안에 말하면 붙잡히니깐 절대 밖에 나가 말하지 말라고 했어. 근데 오늘 저 놈이 나가서 탈북자가 있다면서 공안을 데리고 온 거요. 이 사람들이 그래서 왔는데 초린이가 금방 한국 사람이라고 했으니 절대 놀라지 말아요."

공안이 나에게 손바닥을 펼쳐보였다. 초린이가 애인처럼 내 팔을 끼며 웃었다.

"여권 보여 달라고 해요. 가방을 분실했다고 내가 말해주겠으니 아무 이야기나 하세요. 빨리"

우리의 긴장과는 상관없이 덩지 큰 초린의 대상이 다른 공안에게 꽥 소리쳤다. 아마 담배를 끊으라고 욕을 한 것 같았다.

"초린아. 미안해, 나 때문에 삼촌이 벌금 물리는 거 아니야?"

내 목소리를 기다렸다는 듯 초린이가 공안에게 보다 당당하게 말했다. 그랬더니 공안이 핸드폰을 꺼내 전화를 급하게 했다. 초린이가 내 팔을 꽉 그러안았다.

"어머나! 차를 부르고 있어요, 어마나 어쩌지?"

그리고 비명처럼 중국말로 소리치자 대상이 의자에서 벌떡 일어나 공안을 콱 밀쳐버렸다. 그와 동시에 초린이가 내 앞을 다급히 막아섰다.

"뛰어요!"

나는 계단을 몇 개씩 짚으며 미친 듯이 날아 내려왔다. 내 뒤에서 울리는 고함과 누군가 넘어지는 소리를 들으면서 말이다. 그보다도 그 이후로 초린이와 영 영 헤어질 줄도 모르고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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탬뵹아리우쭈쭈  삐약삐약
빨리 다음편 ㅠㅠㅠ
12년 전
탬뵹아리우쭈쭈  삐약삐약
으잉 바로올라와잇네요 ㅠㅠㅠ 이거 완전 흥미진진함
12년 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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