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서론
'그레이트 게임'은 대영제국과 러시아제국이 중앙아시아에서의 패권을 두고 벌인 전략적 경쟁과 충돌을 의미한다 일반적으로 그레이트 게임은 1813년의 ‘러시아-페르시아 조약’에서 1907년 ‘영국-러시아 회담’까지의 기간까지 지속된 것으로 간주되는데, 1917년 볼셰비키 혁명이 발생한 후에는 그 양상이 다소 진정되었다 2차대전 이후에는 특정 지역에서 지정학적 패권과 영향력을 두고 경쟁하는 의미로 사용되었다
그레이트 게임이라는 용어는 보통 영국 동인도회사에 소속된 벵갈 제6경기병연대 장교 아서 코놀리(1807-1842)가 사용한 것이 시초이다 그리고 영국 소설가 루드야드 키플링이 그의 소설 ‘Kim’에서 그레이트 게임이라는 용어를 사용하면서 대중적으로 사용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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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14년 그레이트 게임 초기의 페르시아
2. 아프가니스탄에서 벌어진 영국과 러시아의 경쟁
영국의 관점에서 러시아가 중앙아시아로 확장하는 것은 영국의 “왕관의 보석”이라고 불리는 인도를 위협하는 행위였다 영국은 차르의 군대가 중앙 아시아의 칸이 다스리던 지역(히바, 부하라, 코칸트)을 잇따라 장악하는 것을 경계했다 아프가니스탄 토후국들이 러시아가 인도를 침략하는 단계적인 기둥이 될지도 모르는 일이었기 때문이다
심중에 있던 이런 생각들로 인하여 영국은 1838년 ‘1차 영국-아프간 전쟁’을 일으켜 ‘샤 슈자’를 내세워 아프가니스탄에 괴뢰정권을 세웠다 그러나 괴뢰정권은 오래가지 못했고 영국군의 지원없이는 지속될 수 없다는 사실만 드러났을 뿐이다 1842년까지 아프가니스탄 국민들은 카불(아프가니스탄의 수도) 시내에서 영국군을 끈질기게 공격하였고 결국 영국 주둔군은 지속적인 공격을 받은 끝에 카불에서 철수할 수 밖에 없었다
후퇴하는 영국군은 대략 4500여명의 군인(유럽출신 690명 나머지는 비유럽 식민지군)과 12000명의 종군민간인(군대를 따라다니는 상인, 인부, 매춘부 등의 민간인)으로 이루어져 있었다 인도로 퇴각하던 영국군은 아프가니스탄군의 맹공을 받았으며 ‘윌리엄 브라이든’을 제외한 모든 유럽출신 병력은 전사하였다 (비유럽 출신인) 극소수의 인도 식민지군만이 살아남아 인도땅을 밟을 수 있었다 카불에서 굴욕적인 퇴각을 경험한 후, 결국 영국은 아프가니스탄에서의 야심을 꺾고 말았다 1857년 세포이 항쟁 이후, 영국 정부는 아프가니스탄을 완충 지대로 간주하였다
한편 콘스탄틴 코프만, 미하일 스코벨레프, 미하일 체르니야예프 세 장군이 이끄는 러시아군은 아프가니스탄을 노리고 남쪽으로 꾸준히 진군하였으며 1865년 타슈켄트가 (러시아에) 공식적으로 합병되었다 1868년 사마르칸트가 러시아의 영토가 되었고, (우즈베키스탄의) 같은 해 부하라의 독립은 평화조약으로 인해 사실상 요원해졌다 이로써 러시아의 영향력이 아무다리야 강 북부까지 확장되었다
이에 대응하여 빅토리아 여왕에게 보내는 편지에서, 영국 수상 벤자민 디즈레일리는 러시아의 중앙아시아 영토를 공격하여 그들을 카스피해까지 몰아붙여야 한다고 주장했다 벤자민 디즈레일리는 1876년 ‘국왕작위법’을 도입하여 인도 황후를 빅토리아 여왕의 작위 목록에 포함시킴과 동시에 인도 황후를 러시아 황제와 동등한 직위로 간주하였다
1878년 ‘대(大)동방위기’가 발발하고 러시아가 카불로 외교사절단을 보내자, 영국은 아프가니스탄 통치자인 셰르 알리에게 영국 외교사절단도 허용하라고 요구했다 그리고 러시아 사절단들이 아프가니스탄을 방문한 후 러시아로 귀국하자, 이에 대한 보복으로 영국이 다시 4만명의 병력을 동원해 국경을 넘어 침공하여 ‘2차 영국-아프가니스탄 전쟁’이 발발하게 된다 전쟁의 결과 압두르 라만 칸이 아프가니스탄의 왕위에 올랐으며 라만 칸은 영국이 아프가니스탄의 외교권을 장악하는데 동의했다 그는 내부 반란군을 무자비하게 진압하여 많은 지방을 중앙정부의 통제하에 두었다
1884년, 러시아의 팽창주의 정책은 또 다른 위기인 ‘판데 사건’을 일으켜 메르브의 오아시스를 장악하였다 러시아는 (아프가니스탄의) 이전 통치자들이 지배하던 모든 영토을 요구하였고 판데 오아시스에서 아프가니스탄군과 전투를 벌였다 이로써 두 강대국(영국과 러시아)간 전쟁이 임박한 듯 했지만, 영국은 러시아가 아무 다리야 북부 영토를 지배하는 것을 기정사실로 받아들이기로 결정했다
1885년에서 1888년 사이 ‘영국-러시아 공동국경위원회’는 러시아의 판데 지역 지배를 인정하였으나 판데를 제외한 나머지 영역은 러시아가 포기하기로 합의하였다 물론 이 과정에서 아프가니스탄의 의견은 반영되지 않았다 협정에 의하여 아프가니스탄은 판데와 그 주변지역을 중심으로 상당한 영토를 상실하였고 북쪽 국경은 영구적으로 아무 다리야 지방으로 고착되었다
한편 와칸의 조르쿨 호수 동부지역도 국경으로 남았는데, 이 지역에 대하여 중국과 아프가니스탄, 러시아가 각기 자신들의 영토라고 주장하였다 1880년대 아프가니스탄은 알리차 파미르의 호수 북쪽까지 진출했다
1891년 러시아는 와칸지역에 군사력을 투입하여 영국군의 프란시스 영허스번드 대위가 주둔하던 보자이 굼바즈를 떠나라고 경고함으로써 외교적인 마찰을 일으켰다 이 사건과 더불어 러시아 코사크 기병이 힌두쿠시 산맥의 남쪽을 기습했다는 보고가 올라옴에 따라 영국은 러시아가 (인도 북서부) 카쉬미르와 잠무가 있는 페티 주(州)까지 개입하는 것을 우려하였다 이것이 1891년에 일어난 ‘훈자-나가르 작전’(훈자, 나가르 : 오늘날 파키스탄의 지방)의 원인이었다 작전의 결과 영국군이 훈자와 나가르에 지배권을 확립하였다 1892년 영국은 던모어 백작을 파미르에 조사관으로 파견하였다 또한, 영국은 러시아가 중국의 취약함을 이용하여 영토를 확장하는 것을 우려하였다 이에 대해 1893년 러시아와 국경을 확정하는 조약을 체결하고자 하였고 1895년 최종적으로 조약이 승인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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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48년경 중앙아시아의 영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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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국군 장교 토마스 에드워드 고든이 그린 조르쿨 호수의 수채화(187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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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치 풍자화 : 아프가니스탄의 국왕 셰르 알리와 그의 친구들(사자의 영국과 불곰의 러시아)
3. 그레이트 게임의 무대가 동쪽으로 옮겨가다
1890년대까지 중앙아시아 키바, 부하라, 코칸드 지역의 토후국들이 함락되어 러시아의 속국이 되었다 이제 중앙아시아는 러시아 차르가 장악하였고, 그레이트 게임의 무대는 중국, 몽골, 티벳이 있는 동쪽으로 옮겨졌다
1904년 영국군은 티벳의 수도였던 라사를 공격하였다 러시아는 달라이 라마 13세와의 비밀회담을 가지고 아시아를 향해 음모를 꾸미고 있었는데 이에 대해 영국이 선제기습공격으로 대응한 것이다 달라이 라마 13세는 (라사)를 탈출하여 중국과 몽고로 망명하였다 영국은 러시아가 인도를 침략하는 것을 굉장히 우려하였다 그러나 러시아는 러일전쟁에서 일본에게 패배하고 내부 반란으로 쇠락하였기 때문에 현실적으로 영국에 맞서는건 불가능하였다
그러나 청나라는 또 다른 문제였다 자연재해, 기근, 내부 반란으로 청나라는 쇠락한 상태였다 19세기 말기, 일본과 서구 열강은 손쉽게 무역과 영토에 대한 권리를 획득했다 한 때, 중국 전역을 통치할 정도로 강성했던 만주족에게는 굴욕적인 항복이나 다름없었다 그러나, 러시아군은 일본과의 전쟁에서 얻은 중요한 교훈을 잊지 않았다 서구의 기술과 산업생산의 비법을 수용한 아시아 국가는 유럽 강대국들과의 전쟁에서도 승리할 수 있다는 사실이었다
1906년 러시아 차르 니콜라이 2세는 청나라에서 일어나는 개혁 정책과 근대화 작업에 관한 정보를 얻고자 청나라에 간첩을 보냈다 그 당시 러시아 육군 대령이었던 ‘칼 구스타프 만네르하임’(1차세계대전, 러일전쟁에서 러시아군으로 복무했으나 이후 핀란드로 복귀하였다)’에게 그 임무가 주어졌는데, 그는 프랑스의 중국학자 폴 펠리오와 동행하여 중국으로 들어갔다 만네르하임은 핀란드 여권을 이용하는 민족지학 수집가로 위장하였다 그 당시 핀란드는 대공국에 불과하였기 때문이다 2년 동안, 만네르하임은 신장, 간쑤, 산시, 허난, 내몽골에서 베이징에 이르기까지 두루 돌아다녔다 불교도의 성지 오대산에서, 그는 달라이 라마 13세를 만날 수 있었다 그러나 만네르하임이 1907년 중국에 머무는 동안, 러시아와 영국이 “영국-러시아 협정”을 체결하면서 기존의 그레이트 게임은 종결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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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앙아시아인(1861-1880년 사이로 추정)
4. 영국-러시아 동맹
1차세계대전으로 이어지는 기간 동안, 러시아와 영국 두 제국은 독일이 나날이 중동에서 영향력을 증가시키는 모습에 크게 놀라게 되었다 그중 특히, 독일이 주도하는 바그다드 고속철도 건설 프로젝트로 메소포타미아와 페르시아 지방에 교역로를 열고자 하였다 이에 러시아의 알렉산더 이즈볼스키, 영국의 에드워드 그레이 수상은 중동으로 진출하는 독일에 대항하기 위해 그들의 오랜 갈등을 청산했다 1907년 영국-러시아 회담의 결과 양국의 기존의 그레이트 게임은 종식되었다
러시아측은 영국이 아프가니스탄 정권을 교체시켜서는 안 될뿐만 아니라, 아프가니스탄을 영국이 단독으로 지배하는것을 받아들였다 또한 아프가니스탄과의 외교적 관계를 맺으려면 영국의 허가가 필요하다는 점도 받아들였다 영국측은 양국이 현재의 국경을 유지하고 아프가니스탄이 러시아 영토를 침략하려는 어떤 시도도 저지해야 한다는 점을 받아들였다 페르시아의 영토는 3개의 영역으로 분할되고 말았다 즉 남부는 영국, 북부는 러시아가 지배하였고 남부와 북부 사이의 완충지대 이렇게 3개의 구역으로 나뉘어졌다 티벳 문제에 관해서는 티벳의 영토를 온전히 보존하고 라사문제에 대해선 종주국인 청나라를 통해서만 대처하기로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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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1년 영국의 한 풍자신문기사 : "우리가 잘 몰랐다면 말이야, 나(영국)는 자네들(러시아)이 우리 꼬마 친구(페르시아, 고양이로 묘사)와 뭘 하고 있는거냐고 묻고 싶었을지도 몰라."
5. 양국의 경쟁이 다소 완화되다
1917년 볼셰비키 혁명으로 기존의 조약이 무효화되었으며 2차 그레이트 게임이 시작되었다 아프가니스탄의 통치자 하비불라흐 칸이 암살되면서, 1919년 3차 영국-아프가니스탄 전쟁이 발발하였다 하비불라흐의 아들이자 계승자였던 아마눌라흐가 아프가니스탄의 완전한 독립을 선포하고 영국령 인도의 북쪽 국경을 공격하였다 비록 이 과정에서 군사적인 성과는 거의 없었지만, 1919년 라왈핀디 조약으로 교착상태가 해결되고, 아프가니스탄은 외교권을 회복하였다 1921년 5월, 아프가니스탄과 소련은 우호조약에 서명하였고, 소련은 아마눌라흐 정권에 자금, 기술, 군수물자 및 무기를 원조하였다 이렇게 하여 아프가니스탄에서 영국의 영향력은 점점 줄어들었다 그러나 소련과 아프가니스탄의 관계 또한 애매해졌다 많은 아프가니스탄인들이 메르브와 판데의 영토를 되찾고자 했기 때문이다 반대로, 소련도 아프가니스탄의 우호조약을 통해 아마눌라흐의 생각보다 더 많은걸 얻어내려고 하였다
영국은 소련-아프가니스탄 조약에 대해 약간의 제재와 외교적 무시로 대응하였다 아프가니스탄이 영국의 영향권에서 벗어나는걸 우려하고 아프가니스탄 정부가 듀랜드선(1893년에 아프가니스탄과 영국령 인도 사이에 그어진 경계이자 현재의 아프가니스탄과 파키스탄의 국경선) 양쪽에 정착해있던 파슈툰어를 사용하는 민족 전체를 지배하려는 의도를 간파했기 때문이다 이에 대해 1923년 아마눌라흐는 스스로를 황제라 칭하고 소련과 영국령 인도로부터 피난온 무슬림들을 위한 피난처를 제공하는 것으로 대응했다
그러나 아마눌라흐의 개혁 정책은 군대를 신속하게 강화하기에 역부족이였으며, 결국 1928년 국내의 압력을 이기지 못하고 왕위에서 물러났다 이 위기로부터 가장 수혜를 받은 인물은 ‘모하메드 나디르 샤’이었다 그는 1929년에서 1933년까지 아프가니스탄을 지배하였다 소련과 영국은 이 상황을 자국에 최대한 유리하게 이용하고자 하였다 소련은 1930년에서 1931년까지 우즈베키스탄 반란을 진압하는데 아프가니스탄의 도움을 받았으며, 영국은 아프가니스탄의 정규군 4만명을 육성하는데 원조를 제공했다
2차세계대전이 발발하고 1941년 6월 22일, 독일이 소련을 침공하면서 영국과 소련의 이해관계에 일시적인 조정이 이루어졌다 양국 정부는 아프가니스탄에서 활동하던 독일의 대규모 민간대표단을 축출하라고 아프가니스탄 정권에 압력을 넣었다 그들이 간첩행위를 하고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아프가니스탄은 즉시 요구에 응했다 1945년 전쟁이 끝날때까지 나치 독일에 대한 영국과 소련의 상생하는 협력기간이 지속되었다 다소 완화된 양상이었던 2차 그레이트 게임은 2차세계대전 이후 지정학적 변화에 의해 새로운 시대에 진입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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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02-1903년 러시아 제국령 영토(히바, 부하라, 코칸트의 경계)
6. 19-20세기 영국과 러시아의 경쟁에 대한 비평
제럴드 모건의 저서 ‘그레이트 게임의 믿음과 현실(1973)’에서는 중앙아시아에서 영국의 첩보네트워크가 존재했는가를 알아내기 위해 (영국의) 인도통치 시절의 다양한 부서 및 기관을 연구하였다 모건은 그런 네트워크가 있었다는 증거는 존재하지 않는다고 하였다 아무리 낙관적으로 봐도, 중앙아시아에서 러시아의 움직임에 대한 정보를 얻기 위한 노력, 즉 첩보활동은 매우 드물었다 루드야드 키플링의 소설에서 나오는 모험들과 비슷한 음모는 근거 없는 루머였으며 모건은 그런 루머는 중앙아시아에서는 항상 흔하게 통용되었다고 하였다 영국 뿐만 아니라 러시아에게도 마찬가지로 말이다
말콤 야프는 ‘그레이트 게임의 전설(2000)’이란 강의에서, 영국인들은 19세기 후반 아시아에서의 이해관계에 관련된 다양한 상황을 설명하기 위해 “그레이트 게임”이라는 용어를 사용했다고 설명했다 야프는 인도 식민지 정부의 주된 관심이 인도 현지인들을 통치하는 것이지 러시아의 침략은 그다지 관심이 없었다고 생각한다 야프에 의하면, 인도와 중동에서 대영제국의 역사를 보다보면 전략적 논의의 중요성이나 비현실성에 끌리게 될 것이다
번역 : The Beatles by 이종격투기 카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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