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남조 / 편지
그대만큼 사랑스러운 사람을 본 일이 없다.
그대만큼 나를 외롭게 한 이도 없다.
이 생각을 하면 내가 꼭 울게 된다.
그대만큼 나를 정직하게 해준 이가 없었다.
내 안을 비추는 그대는 제일로 영롱한 거울
그대의 깊이를 다 지나가면 글썽이는 눈매의 내가 있다.
나의 시작이다.
그대에게 매일 편지를 쓴다.
한 귀절 쓰면 한 귀절을 와서 읽는 그대
그래서 이 편지는 한번도 부치지 않는다.
이생진 / 기다림
너만 기다리게 했다고 날 욕하지 말라
나도 보이지 않는 곳에서
너만큼 기다렸다
이상하게도 같은 세월에
엇갈린 입장을
물에 오른 섬처럼
두고두고 마주 보았다
서덕준 / 강물
주제를 알면서 감히 꿈을 꿨다
남루하고 깨진 마음에 버겁게 밀어 넣었다
내 마음에 절망이 스미고
결국 가라앉아 강바닥에 묻힌다 한들
기어코 담고 싶었다
당신을 구겨 넣고 이 악물어 버텼건만
내가 다 산산이 깨어지고
강바닥에 무력히 스러져 눕고서야 알았다.
그대는 그저 흐르는 강물이었음을.
정채봉 / 인연
나는 없어져도 좋다
너는 행복하여라
없어진 것도 아닌
행복한 것도 아닌
너와 나는 다시 약속한다
나는 없어져도 좋다
너는 행복하여라.
김행숙 / 미완성 교향악
소풍 가서 보여줄게
그냥 건들거려도 좋아
네가 좋아
상쾌하지
미친 듯이 창문들이 열려 있는 건물이야
계단이 공중에서 끊어지지
건물이 웃지
네가 좋아
포르르 새똥이 자주 떨어지지
자주 남자애들이 싸우러 오지
불을 피운 자국이 있지
2층이 없지
자의식이 없지
홀에 우리는 보자기를 깔고
음식 냄새를 풍길 거야
소풍 가서 보여줄게
건물이 웃었어
뒷문으로 나가볼래?
나랑 함께 없어져볼래?
음악처럼
김소월 / 예전엔 미처 몰랐어요
봄 가을 없이 밤마다 돋는 달도
예전엔 미처 몰랐어요.
이렇게 사무치게 그리울 줄도
예전엔 미처 몰랐어요.
달이 암만 밝아도 쳐다볼 줄을
예전엔 미처 몰랐어요.
이제금 저 달이 설움인 줄은
예전엔 미처 몰랐어요.
박희준 / 하늘 냄새
사람이
하늘처럼
맑아 보일 때가 있다.
그때 나는
그 사람에게서
하늘 냄새를 맡는다.
배연일 / 사랑은 그렇게 오더이다
아카시아 향내처럼
5월 해거름의 실바람처럼
수은등 사이로 흩날리는 꽃보라처럼
일곱 빛깔 선연한 무지개처럼
사랑은 그렇게 오더이다
휘파람새의 결 고운 음률처럼
서산마루에 번지는 감빛 노을처럼
은밀히 열리는 꽃송이처럼
바다 위에 내리는 은빛 달빛처럼
사랑은 그렇게 오더이다.
서덕준 / 새벽
네가 새벽을 좋아했던 까닭에
새벽이면 네가 생각나는 것일까
아, 아니지.
네가 새벽을 좋아해서가 아니라
내가 너를 좋아해서였구나.
서덕준 / 호우경보
우울한 패랭이꽃처럼 하늘만 보았다.
미처 어리석은 처마 밑에
머리 기댈 틈도 없이
쏟아지는 너를 잠자코 맞기만 할 뿐
너를 향해 주파수를 주섬대는
내 마음속 라디오는
홍수처럼 사랑해라,
속절없이 호우경보만을 울려대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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