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왜 말은 바람이 되고 물살이 되는가.
모든 것이 사라져도 떠나지 않고 남아 있는 말, 모두 다 빗물에 씻겨도 씻겨 떠내려가지 않을 당신,
그 무렵 그 말이 나에게 얼마나 힘이 되었는지를 당신에게 말하지 못했다.
- 바람이 분다, 당신이 좋다 中 / 이병률

달이 다녀간 뒤 내 몸에서는 달앓이가 시작되었다
입안 이곳저곳 자라나는 너의 손가락
나는 빈 들판처럼 아름다운 달빛을 내밀고 싶다
나의 꽃은 가장 작고 신비한 방, 꿈에 꽃술을 섞어 놓아 누군가 걸어 다니는 방, 오직
너만이 나의 배 위에서 머리를 묻고 내 꿈을 엿듣는다 나는 손톱을 다듬고 너의 머리를
쓰다듬다 한 움큼 달빛을 꺼낸다
달빛 속에는 너의 어린 소년이 걸어 다닌다
소년의 다리 아래에는 아름다운 언덕이 있고 그 숲속에서 달빛이 점점 짙어져 우리 몸을 지운다
이 잠은 너무 달콤해 너에게 배달할 수가 없다 너는 쌔근쌔근 내 눈 안에 손을 넣고
숨을 뱉는다 우물은 너무 깊어서 별을 가둘 수가 없다
달이 우물에 빠지던 날 달개비 꽃이 우물가 숲 속에 피어 있었지
내가 생각나 얼마큼 생각나 그늘진 길에 쌓인 비가 너무 따뜻해 길 위에 앉아있을 수
가 없다 너는 내 눈 속에 파란 잎의 꿈을 심는다
나의 몸이 파랗게 발효된다 나의 잠을 엿듣는 누군가의 눈빛에 파르스름한 달빛이 고인다
- 입덧 / 이혜순

나는 내가 좋습니다 당신도
당신이 좋습니까
낮에 당신은 당신에게 뭐라 말합니까
밤에 당신은 당신에게
뭐라 말합니까
오늘 당신에게 내 생각이 잠깐
다녀갔습니까
오늘 나에게 당신 생각이
잠깐 다녀갔습니까
북쪽보다 더 북쪽
남쪽보다 더 남쪽인 당신은
가볍게 오고 싶지 않습니다 가볍게
가고 싶지 않습니다
정말입니다
나는 내가 좋습니다 당신도
당신이 좋습니까
- 명량 / 고영민

문득, 아니 오래전부터 난 참 사랑을 못하는 사람이란 생각을 하곤 한다.
아무리 목숨을 걸어도 목숨이 걸어지지 않는, 일종의 그런 운명 같다.
이래서 사람이 안 되는 것도 같고 아무도 나를 사랑할 것 같지 않으며 사랑이 와도 바람만큼만 느끼는 것.
그래서 내 사랑은 혼자 하는 사랑이다.
사랑은 순례의 길과도 같아서 그 길을 통해 자기가 완성되어야 한다는 이기적인 속성이 있다.
아니 그 속성만 있다. 그 속성으로 구원받고자 함이 사랑이라면,
사랑한다는 말은 대단한 말이 아니라 구원받겠다는 말이다.
- 바람이 분다, 당신이 좋다 中 / 이병률

어쩌면 너와 나 떠나야겠으며 아무래도 우리는 나누어져야겠느냐
남 몰래 사랑하는 우리 사이에 우리 몰래 이별이 올 줄은 몰랐어라
꼭두머리로 오르는 정열에 가슴과 입술이 떨어 말보담 숨결조차 못 쉬노라
오늘밤 우리 둘의 목숨이 꿈결같이 보일 애 타는 네 맘속을 내 어이 모르랴
애인아 하늘을 보아라 하늘이 까라졌고 땅을 보아라 땅이 꺼졌도다
애인아 내 몸이 어제같이 보이고 네 몸도 아직 살아서 네 곁에 앉았느냐
어쩌면 너와 나 떠나야겠으며 아무래도 우리는 나누어져야겠느냐
우리 둘이 나누어져 생각하고 사느니 차라리 바라보며 우는 별이나 되자
사랑은 흘러가는 마음 위에서 웃고 있는 가벼운 갈대꽃인가
때가 오면 꽃송이는 곯아지며 때가 가면 떨어졌다 썩고 마는가
남의 기림에서만 믿음을 얻고 남의 미움에서는 외로움만 받을 너이었더냐
행복을 찾아선 비웃음도 모르는 인간이면서 이 고행을 싫어할 나이었더냐
애인아 물에다 물 탄 듯 서로의 사이에 경계가 없던 우리 마음 위로
애인아 검은 그림자가 오르락내리락 소리도 없이 얼른거리도다
남몰래 사랑하는 우리 사이에 우리 몰래 이별이 올 줄은 몰랐어라
우리 둘이 나누어져 사람이 되느니 차라리 피울음 우는 두견이나되자
오려무나 더 가까이 내 가슴을 안아라 두 마음 한 가닥으로 열어보고 싶다
자그마한 부끄럼과 서로 아는 미쁨 사이로 눈감고 오는 방임을 맞이하자
아 주름 접힌 네 얼굴 이별이 주는 애통이냐, 이별은 쫓고 내게로 오너라
상아의 십자가같은 네 허리만 더위잡는 내 팔 안으로 달려만 오너라
애인아 손을 다오 어둠 속에는 보이는 납색의 손을 내 손에 쥐어 다오
애인아 말 해다오 벙어리 입이 침묵의 말을 내 눈에 일러 다오
어쩌면 너와 나 떠나야겠으며 아무래도 우리는 나누어져야겠느냐
우리 둘이 나누어져 미치고 마느니 차라리 바다에 빠져 두 머리인어로나 되어서 살자
- 이별을 하느니 / 이상화

꽃잎에 수천 톤 욕망이 앉아 있다
육중한 신체가 타오르고 있다
여름의 한가운데 여린 불기둥
아서라, 꽃잎에는 아무것도 없다
쪼그리고 앉아 한 잎 먹으면
피가 잘 돌겠다
가까스로 사랑의 입구에 서있다
- 제라늄 / 박진성

네가 사랑에 빠졌다면 꿈틀꿈틀 가슴 한가운데, 뭔가 알지 못할 물기가 치밀어오르기도 할 것이다.
그것은 주황색으로 뭉글뭉글 심장 한가운데서 퍼져나가 너를 잠 못 이루게 하거나
너를 집에 돌아오지 못하게도 할것이며 어쩌면 바람을 일으켜 우산을 뒤집을 수도 있을 것이다.
- 바람이 분다, 당신이 좋다 中 / 이병률

자전가 바퀴 돈다 바퀴 돌고 돌며 숨결 되고 있다
풀 되고 있다 너의 배꼽에서 흐르는 FM 되고 있다
실개천 되고 있다 버들구릅 되고 있다
막 태어난 햇살 업고 자장가 불러주는 바람 되고 있다
초록빛 꽁꼬투리 조약돌 되고 있다
바퀴 돌고 돌며 너에게 가는 길이다
무엇이 될지는 알 수 없지만 모두 무언가 되고 있는 중인 아침
부스러기 시간에서도 향기로운 밀전병 냄새가 난다
밀싹 냄새 함께 난다 기운차게 자전거 바퀴 돌린다
사랑이 아니면 이런 순간 없으리 안녕 지금 이 순간
너 잘 존재하길 바래 그다음 순간의 너도 잘 존재하길 바래
자전거 바퀴 돌리는 달리아꽃 빨강 꽃잎 흔들며 인사한다
다음 생에 코끼리 될 꿀벌 자기 몸속에서 말랑한 귀 두짝 꺼낸다
방아깨비들의 캐스터네츠 샐비어 꿀에 취한 나비의 탭댄스
사랑에 빠진 자전거 되기 전 걸어온 적 있는 오솔길 따라
숲의 모음들 홀씨처럼 부춘다 아, 에, 이, 오, 우, 아, 아,
만약에 말이지 이 사랑 깨져 부스러기 하나 남지 않는다 해도
안녕 사랑에 빠진 자전거 타고 너에게 달려간 이 길 기억할게
사랑에 빠져서 정말 좋았던 건 세상 모든 순간들이 무언가 되고 있는 중이었다는 것
행복한 생성의 기억을 가진 우리 어린 화음들아 안녕
- 사랑에 빠진 자전거 타고 너에게 가기 / 김선우

옛 애인이 한밤 전화를 걸어 왔습니다
자위를 해본 적 있느냐
나는 가끔 한다고 그랬습니다
누구를 생각하며 하느냐
아무도 생각하지 않는다 그랬습니다
벌 나비를 생각해야한 꽃 이 봉오리를 열겠니
되물었지만, 그는 이해하지 못했습니다
얼레지
남해 금산 잔설이 남아 있던 둔덕에
딴딴한 흙을 뚫고 여린 꽃대 피워내던
얼레지꽃이 생각이 났습니다
꽃대에 깃드는 햇살의 감촉
해토머리 습기가 잔뿌리 간질이는
오랜 그리움이 내 젖망울 돋아나게 했습니다
얼레지 꽃말은 바람난 여인이래
바람이 꽃대를 흔드는 줄 아니?
대궁 속의 격정이 바람이 만들어
봐, 두 다리가 풀잎처럼 눕잖니
쓰러뜨려 눕힐 상대 없이도
얼레지는 얼레지
참숯처럼 뜨거워집니다
- 얼레지 / 김선우

하루가 멀다하고 당신께 야단맞는 꿈을 꾸죠
당신은 역시 차갑고 냉담한 사람이었구나
그리 생각하며 그 꿈의 나락에서 빠져나오게 되죠
왜 당신이 그렇게 쌀쌀맞게 등장하는지 그 이유를 전혀 모르겠어요
내가 부족해서 그런가보다 탓할 뿐이죠
내 요리솜씨가 서툴고 형편없어서 조금도 맘에 안 들어한다는 것쯤은 알죠
그렇지만 난 이제껏 어느 누구에게도 무시당하거나 박해받았던 적 없었죠
당신은 마치 헐렁하고 거추장스런 가디건을 억지로 걸치게 된 사람처럼 내게 끝없이 역정을 내죠
그러면서 어서 빨리 그 가디건에서 떨어져나간 단추 하나를 찾아내라고 연신 호통치는 거예요
얼마나 칠칠치 못하면 언제 그 단추를 흘렸는지 그것도 잊었느냐는 표정으로 날 빤히 노려보고 있죠
나로서는 그 단추도 그 가디건도 처음 보는 것인데 왜 당신이 잘 맞지도 않는 남의 옷 같은 걸
헐렁하게 걸치고 있는가도 모르겠는데 당신은 끝내 그 굳은 표정을 풀지 않죠
그토록 차디찬 얼굴이라니
평생 만년빙하에 갇혀 산 사람일지라도 그런 표정은 짖지 못할 거예요
하지만 내가 언제 한번이라도 당신 말을 거스른 적 있나요
그러니 그 단추를 찾으려고 몇 시간씩이나 반짇고리를 헤집고 서랍장 구석구석을 다 들추고
장롱 밑바닥까지 훑다가 끝내 기진맥진해서 뒹구는 먼지 뭉치처럼 꿈에서 깨고 말죠
그러고 나면 침대 끝에 걸터앉아 숨 한번 내쉬고 나서 가만히 내 자신을 향해 이렇게 말하죠
좋아요 당신 언젠가 꼭 그 단추를 찾아내 다시는 달아나지 않도록 제자리에 꽁꽁 매달아 드리죠
그 대신 당신은 내 어떤 꿈을 꾸고 있는가 어서 솔직히 털어놔 봐요
- 떨어진 단추 / 이학성

온 힘을 다해 살아내지 않기로 했다 꽃이 지는 것을 보고 알았다 기절하지 않으려고 눈동자를 깜빡였다
한 번으로 부족해 두번 깜빡였다
너는 긴 인생을 틀린 맞춤법으로 살았고 그건 너의 잘못이 아니었다 이 삶이 시계라면 나는 바늘을 부러뜨릴 테다
아무것도 모르는 아이처럼 하염없이 얼음을 지칠 테다 지칠 때까지 지치고 밥을 먹을 테다
한 그릇이 부족하면 두 그릇을 먹는다 해가 떠오른다 꽃이 핀다
두 손으로 얼굴을 가리면 울고 싶은 기분이 든다 누구에게도 말 못하고 주기도문을 외우는 음독의 시간
지금이 몇 시일까 왕만두 찐빵이 먹고 싶다
나발을 불며 지나가는 밤의 공벌레야 여전히 너도 그늘이구나
온 힘을 다해 살아내지 않기로 했다 죽었던 나무가 살아나는 것을 보고 알았다
틀린 맞춤법을 호주머니에서 꺼냈다 부끄러움을 기록하기 시작했다
- 밤의 공벌레 / 이제니

말 한마디가 오래 남을 때가 있다.
다른 사람 귀에는 아무 말도 아니게 들릴 수 있을 텐데 뱅그르 뱅그르 내 마음 한가운데로 떨어지는 말.
한마디 말일 뿐인데 진동이 센 말.
그 말이 나를 뚫고 지나가 내 뒤편의 나무에 가서 꽂힐 것 같은 말이.
- 바람이 분다, 당신이 좋다 中 / 이병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