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어느 날 버찌가 침침한 눈을 비비며 잠에서 깨어났을때,
세상은 뭔가 달라져 있었음
인터넷에서 떠돌던 괴담처럼 겉보기엔 똑같았지만 바람 한 점 없었고 소리 또한 묵음.
낮과 밤의 경계도 흐릿해 지금이 낮인지 밤인지도 모르겠고
수많은 아파트 속에서는 빛 한 줄기 없는, 정지된 세상이었음

집 안에도 아무도 없는 것을 발견하자 직감적으로 이곳이 다른 세상임을 감지한 버찌는
나가는 것은 생각하지도 못한 채 며칠간 방에서 두려움에 떨며 지냈음
그렇게 며칠 뒤,
미술관에 걸린 그림처럼 정지되었던 도시가 시끄러워졌음
버찌는 집 문을 요란하게 두드리는 소리에 겁을 먹고 걸쇠를 걸어잠가버렸지만
소리는 더욱 커질 뿐이었음
곧 소리가 멈추자 안심한 버찌가 놀란 가슴을 진정시키는데,

"나와!"
손을 뿌리칠 새도 없이 문이 열리고 한 남자가 버찌를 집 밖으로 끌어냈음
그리고는 스프레이 통들을 집안에 대충 던지더니
불 붙은 성냥개비들을 그 쪽으로 뿌리고 문을 닫았음
당연하게 버찌의 집은 싸그리 불탔음
가족과의 추억이 담긴 집이 타버렸으니 허망한 마음에 남자에게 따지려 고개를 돌리는데,
며칠간 버찌밖에 없었던 집 안에서는 누구의 것인지 모를 비명소리가 나기 시작했음

"너 여기 있으면 안돼, 위험해. 돌아가자."
자초지종의 설명도 없이 버찌의 집을 불태운 남자는 살짝 웃음기 있는 얼굴로 태연하게 말했음
익숙하지만 낯선 서울,
그 고요한 도시에서는 조금씩 사라지는 집 안에서의 비명소리,
불타고 있는 버찌의 집이 무너지는 소리와 그 남자의 말만이 울려퍼졌음
2.
버찌는 몇 주 전부터 꿈을 꾸기 시작했음
묘령의 아이가 나타나 버찌의 과거를 꺼내 캐캐묵은 상처까지 모두 치유해주고
버찌의 상상과 소원들을 모두 이루어주기까지.
버찌는 그 아이의 꿈을 하루하루 기다리기 시작했음
그리고 어느 날 더운 여름, 낮잠을 자다 꾼 꿈에서 그 아이를 어김없이 만났을 때,
그 아이가 처음으로 버찌에게 말을 걸었음

"나랑 계속 있고 싶지 않아?"
버찌는 자신도 모르게 고개를 끄덕였음
그 아이는 살짝 웃더니 나도 그래, 짧게 대답하고는 제 손으로 버찌의 눈을 가렸음
그리고 꿈에서 깨어난 버찌는 어찌 된 영문인지 며칠 간 잠이 오지 않아 밤을 지새웠음
잠을 전혀 자지 못한지 일주일이 되어갈 즈음,
버찌는 펄펄 끓는 열을 재려 뻗은 엄마의 손이 이마에 닿자마자 기절하듯 쓰러졌음

"왔구나!"
눈을 뜨자 버찌는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를 읽으며 상상했던,
하트 여왕의 정원 같은 공간에 있었음
신비로운 색의 나비들이 날아다니는 그 곳엔 여기저기 복수초와 로벨리아 따위의 예쁜 꽃들이 보였고
버찌가 누운 풀밭은 더러운 구석 하나 없이 싱그러움만을 머금고 있었음

"이제 우리 여기서 계속 같이 있자. 같이 계속 놀자."
예전 꿨던 꿈들과는 조금 다른 느낌이 신경쓰였지만 버찌는 아무래도 상관없었음
버찌는 누워있느라 제 몸의 무게에 찌그러지고 찢어진 찔레꽃을 밟고 일어나 먼저 걸어가는 아이의 손을 잡았음
그래. 같이 있자.
이제 아프지 않아도 돼.
3.
버찌는 어느샌가부터 어느 이상한 세계에서 살기 시작했음
시간의 개념도 잊은 채 몇 년인지 몇 십년인지 모를 세월을 혼자서 보냈음
한 가지 좋은 점은 버찌가 원하는 곳은 어디든 갈 수 있다는 것
그게 19세기의 영국이든,
16세기의 유럽이든.
다만 일정 시간이 지나면 자연스레 원래의 따분한 세상으로 돌아오게 됨

버찌는 오늘도 버찌가 가장 좋아하는 시대, 역사의 아픔을 가진 조그마한 나라 조선으로 갔음
그간의 경험에 따르면 아무도 버찌를 볼 수 없기 때문에 읍의 저잣거리에서 비단도 만져보고
사람들에게 발도 걸어보는 장난도 쳤음
그리고는 돌아갈 시간이 거의 다 될 때가 되어 아쉬운 마음을 달래려
한양에서 제일 간다는 한과 집에서 슬쩍 과자 하나를 집으려는데,

"뭐하는 짓이오."
왠 남정네 하나가 버찌의 팔목을 붙잡고 달녀의 눈을 꿰뚫듯 보고 있었음
순간 일제히 낯선 조선의 사람들의 시선들이 버찌에게 꽂혔음
남자와의 접촉으로 모두에게 보이게 된 듯했음
"이 저잣거리내의 모든 장사꾼들이 하루하루 풀칠하려 어렵게 파는 물건인데,
응당 대가를 치루고 먹는 것이 인지상정 아니겠소?"
침착하고 또박또박하게 버찌를 구석으로 몰아붙이는 태도 때문도 그렇고,
당연 겉치레가 조선사람들의 차림새와는 확연히 달랐기에 사람들은 오랑캐나 악귀가 아니냐며 수군댔음

"나와 같이 포도청엘 가주셔야겠소."
남자의 말에 동의하며 높아져가는 주위 사람들의 원성에 버찌가 겁을 먹어갈 즈음,
버찌는 서서히 공간이 뒤틀어지는 것을 느꼈음
돌아갈 시간이 된 거임

"가자니까 뭐하고 섰소? 내가 관아 사람을 불러야 움직일거요?"
버찌는 남자를 밀치려고 했지만 장정의 힘을 당해낼 수 없었음
그렇게 서로 대치하며 끙끙대고 있을 때,
원래의 세상으로 빨려나가는 힘에 버찌가 뒤로 훅 당겨졌음 그리고 남자도 중심을 잃고 앞쪽으로 쏠렸음
그리고 잠시 뒤 버찌의 눈에는 버찌가 살던 원래의 세계가 보였지만,

"이, 이게 대체,"
그 남자도 함께 이 지루하기 짝이 없던 세상에 딸려오게 되었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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