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쟁이 한창 진행 중이던 1950년 10월 19일. 국군 제 1사단이 평양에 입성했다.
다음날인 10월 20일 유엔군 사령부는 평양을 점령했다고 공식 발표한다.
꿈에 그리던 평양 수복.
하지만 기쁨도 잠시였다.
수복 발표 하루 뒤인 10월 21일.
평양에는 미 제 10군단 소속의 군정위원회가 설치된다. 그리고 상급부대인 미 8군은
서북청년단 출신의 김성주를 평남 지사 대리로 임명한다.
(10월 30일, 평양 수복 군중대회를 위해, 신익희와 평양을 방문한 이승만)
미군이 독단적으로 평양 군정 입장을 밝히자 이승만은 황급히
평안남도 지사로 김병연을 임명했으나,
미국에 의해 거부된다.
이승만은 여기서 멈추지 않고 대한청년단 북한총단부 조직을 행정조직으로 보내 그곳의 행정, 치안을 맡겼다.
하지만 극우적 색채를 띤 단원들이 주 구성원인 대한청년단에게 행정의 전문성이 있을 리 만무했다.
미군 역시 적지였던 평양의 행정 실태를 제대로 파악하고 있을 리 없었다.
(본 사진은 전후 평양 시가지. 본 사건 설명과 관계 없음)
결국 미국과 한국 정부가 따로 따로 행정과 치안을 통솔하는 웃지 못할 사태가 벌어졌다.
뒤늦게 미군 평양시정위원회가 한국의 주민 자치기구를 흡수하며 수습에 들어갔지만,
평양 시민들은 그 과정에서 생긴 사실상의 무정부상태에 그대로 노출됐다.
왜 이런 일이 벌어졌을까?
(
Declares that there has bee established a lawful government ( the Government of te Republic of Korea) having effective controland jurisdiction over that part of Korea where the Temporary Commission was able to observe and consult and in which the great majority of the people of all Korea reside; that this Government is based on elevations which were a called expression of the free will of the electorate of that part of Korea and which were observed by the Temporary Commission; and that this is the only such Government in Korea;
실제로 1950년 북한의 남침 당시 유엔 안보리 결의안은
"적대행위의 즉각적인 중지를 촉구하고.....(중략)... 북한 당국이 그 군대를 38선 이북으로 철수할 것을 촉구"
하는 것을 골자로 하고 있다.
실제로 정전협정 후, 38선 이북 지역이었던 철원, 화천, 고성 등은 1954년까지 유엔의 관리 하에 있었고
따라서 1954년 총선거에서도 투표권을 부여받지 못했다.
그럼 이쯤에서 주목해야 할 이들이 있다.
"우리 영역내 활동에 대해선 동의가 필요하다"면서도 '북한' 언급은 생략
http://media.daum.net/politics/dipdefen/newsview?newsid=20151021181643354
일본: 한국땅에 들어갈 때 허락받는다 했지, 북한땅에서도 허락받아야 한다는 법적 근거는 없잖아?
참고
[박명림, 1950 전쟁과 평화](나남, 2002 612쪽)
[김창우, <한국전쟁 초기 미국의 전쟁정책과 북한점령>, 최장집 편, 한국전쟁연구(태암, 1990), 232~233쪽]
[시론] 유엔의 48년 ‘유일 합법정부’ 승인 38도선 이남인가, 한반도 전체인가 / 박태균 [한겨레신문] 2013-10-30
한국은 한반도 유일한 합법정부로 인정받지 못했다/이동준 [한국일보] 2015.06.15 17: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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