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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 l 외국어 l 해외거주 l 해외드라마
l조회 3730 출처
이 글은 10년 전 (2015/11/09) 게시물이에요
1.

진지한 토크쇼에서도 혀짧은 소리로 ‘오빠 오빠’밖에 못하는 여성 연예인들, ‘저는 군대에서 구르면서 남자가 된 것 같아요’라고 말하는 남성 연예인들은 모두 어떤 폭력의 피해자이면서도, 동시에 그 폭력의 구조가 유지-강화되는 데 기여하고 있다. 이때, 이런 피해자가 자신의 위치를 긍정적으로 규정(포장)하고 나아가 판매함으로써 제한적인 안정이라도 추구하는 것을 함부로 비난할 수는 없다. 데이트폭력이나 성차별에 적응한 피해자를 문책하지 말아야 하듯.

그러나 스스로의 피해자성을 판매하는 것과, 타인의 피해자성을 판매하는 것은 엄연히 다른 층위의 문제다. 전자가 사회적으로나 피해자 스스로를 위해서나 건강하지 않다 하더라도, 그런 개인의 선택을 타인이 비난할 수 있는 선은 분명 제한적이다. 반면 누군가 자신이 아닌 타인의 피해자성을 왜곡하고 소비할 때, 우리는 그를 비판할 수 있고 또 그래야 한다. 여성이 생각하고 말하고 설치는 것이 불쾌하다는 남성, 군대에서 굴러야 남자가 된다고 말하는 여성에게 우리는 타인의 삶을 규정하고 억압하는 것을 멈추라 요구해야 한다.


2.

아이유의 ‘zeze’는 소재가 성애인 만큼 남녀의 구도가 부각되고 있지만, 나는 이번 논란에서 아이유의 가장 무거운 책임은 ‘성인’인 본인과 ‘아동’ 사이의 비대칭적인 권력 관계를 간과한 것이라 생각한다. 10년 전쯤 이승연이라는 배우가 위안부 컨셉의 누드 화보를 촬영하여 논란이 되었다. 그 배우가 가해자의 위치에 설 수 있는 것은 그 자신이 군국주의 성폭력의 피해자가 아니기 때문이다.

아이유는 늘 ‘아이 같으면서 섹시한’ 자기 자신을 노래해 왔고, 자신을 그렇게 판매하는 그녀를 나는 싫어했을지언정 악하다고 할 수는 없었다. 그러나 이제 그녀가 아이의 탈을 쓰고, ‘저는 다섯 살인데 이렇게 섹시합니다’라고 노래하는 것을 두고 나쁜 것을 넘어 잔인하다 내가 말하는 이유는, 그녀가 다섯 살이 아닌 스물 세 살이기 때문이다.

1) 비대칭적인 권력관계에서 본인들이 원치 않는 성적 대상화의 위험에 노출되어 있거나, 실제 그런 피해의 경험이 있는 약자들의 집단을 두고 2) 그 집단 밖에 있는 사람이 3) 그 집단에 성적 상징을 부여하는 것ㅡ 나는 이 폭력에서 아이유와 이승연의 접점을 본다.
‘zeze’에 나온 제제도, 그 삼류 화보집에 나온 얼굴 고운 위안부 여성도 가상의 인물이다. 핵심은 가상이냐 실재냐가 아니라, 그 가상/실재의 인물이 가진 상징성이 폭력을 특정 집단에게 선별적으로 집중시킨다는 것이다. 그 가상의 존재들이 상징하는 현실의 여성, 민족, 지역민, 성소수자, 장애인, 미성년자들에게 그 작품들이 전달하는 공포와 모욕은 현실이지 가상이 아니다.


3.

비극적이지만 아이유도 이승연도, 다른 층위의 폭력에서는 다시 피해자가 된다. 한국 같은 나라에서 여성 연예인들에게 가해지는 폭력은 처참하다. 아동과 군 위안부까지 성적으로 소비하려는 한국의 도착적인 성문화가 이들에게서 시작된 것도 아니다. 마찬가지로 주변 형들이 늘 하던 대로 ‘산부인과처럼 다 벌리’라고 가사를 쓴 스물 세 살 랩퍼가 한국 여성혐오의 원흉도 아니다. 젊은 남성이 사회적 환경에 의해 그런 천박한 여성관과 예술관을 갖게 된 것도 어쩌면 비극적인 피해다.
하지만 그런 피해자로서의 지위가, 그들이 스스로 피해자가 아닌 영역에서 새로운 가해를 시작하는 것까지 정당화할 수는 없다.

자신을 향한 여성 차별과 혐오를 용서하는 것은, ‘야구장의 수많은 다른 여성 노동자들에 대한 그릇된 인식을 만들 것’이라는 치어리더 박기량의 선언은 그래서 숭고하다. 박기량은 자신에게 혐오를 용서할 권리가 없다고 하였으나, 사실 그녀는 그 혐오의 피해에서 자기 자신을 가장 우선적으로 보호할 충분한 권리가 있다. 그녀는 그 안온한 기회를 포기함으로써 폭력의 순환을 끊어낸 셈이다.

나는 박기량처럼 ‘끊어진 사슬’이 될 용기와 결단까지를 차마 모든 피해자들에게 강요할 수 없다. 그러나 적어도 우리는 치열하게 사고하고 반성해야 한다. 가정 폭력과 여성 억압의 피해자인 내가, 이성애자로서 동성애자를, 비장애인으로서 장애인을, 성인으로서 아이들을 함부로 규정하고 억압할 위험을 인지해야 한다. 끊어진 사슬이 되지 못할지언정, 새로운 폭력의 첫 사슬이 되지는 말아야 할 것 아닌가.

http://ppss.kr/archives/6046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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