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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병사갑옷착용에 관한 자료.
점심을 먹고나니 군장이 무거워졌다.
점심을 먹고 나서도 고달픈 병사의 하루는 여전하다. 오후훈련은 갑주를 입고 무기를 사용하는 훈련으로
일종의 완전군장 훈련을 하는것이다. 그런데 훈련장에서는 의도적으로 군장을 비롯한 무기를 더 무거운 것을 사용해
병사들의 힘을 키우는 것에 집중했다. 이는 사람의 힘을 쓰면 쓸수록 견고해지고 쓰지않으면 약해지는것이라,
힘줄과 뼈를 수고롭게하고 몸을 고달프게 하는것을 최고의 목표롤 삼았기 때문이다. 아마도
이런훈련법은 오늘의 군대와도 다르지 않을것이다. 그래서 평상시 전투훈련을 할때에도 병사마다
반드시 무거운 갑옷을 입고 무거운 물건을 몸에지녀 억지로 힘을 더하게했다. 예를들면 일반적인
피갑(가죽갑옷)을 입는 병사들에게는 갑옷안에 돌덩어리를 천으로 싸서 묶거나, 일반적으로 사용하는
칼 무게의 두배가 넘는 크고 무거운 목검을 이용해 훈련했다. 이는 실제 전투가 발생했을때에는
더 가벼운 갑주와무기로 사울수있기에 온힘을 더한다면 적을 충분히 꺾을수있기 때문이다. 특히
실제보다 더 무거운 무기를 사용하는 것은 손을 단련해 적보다 빠른 창이나 검의 쓰임을 훈련하기위해서였다.
심지어는 요즘처럼 다링에 모래주머니를 달고 훈련하기도 했는데, 전통시대에는 주로 빠르게 달려가며 진법을
짜고 공격과방어를 해야했기에 빠른 발놀림을 위하여 모래주머니를 활용하게 된것이다. 또한 일반적으로 각자의
주특기 혹은 병과에따라 특징적인 갑옷을 입게되는데, 가끔은 갑주를 바꿔입고 훈련하기도 했다. 대표적으로
조선시대실학자로 잘 알려진 아정 이덕무(1742~1793)는 병사들이 입는 갑주의특징에대해서 "보병은 긴 갑옷,
창수는 몸에 꼭 맞는 갑옷을 입어야한다"고 했다. 특히 피갑을 주로 입는 보병들에게 공성전 때 입는 철갑을 입혀
훈련하는 것은 그 무게에 적응하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뒤어난 훈련으로 인식되기도 했다. 그래서 갑옷을 바꿔입고
훈련하게된것이다. 진법훈련이라는 것이 쉼없이 뛰고 달리는 것이었기에 한차레 소나기같은 공격훈련이 끝나면
여기저기서 헉헉대는 소리가 퍼지곤 했다. 특히 기병과동시에 훈련하는 경우에는 기병의 말을 뒤쫒아가며
전속력으로 달려가고 다시 되돌아와야 했기에 더없이 힘들었다. 그렇게 넓디넓은 훈련장 이곳저곳을 발바닥에
땀이 나도록 달리면 해는 어느덧 기울어져 서산에 걸리는 저녁이 되곤했다. 그러나 훈련은 거기서부터 다시
시작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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밥 먹는 것도 훈련 받았다.
"병학지남연의"에 실린 병사들의 밥 먹는 순서를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신호포를 세번쏘고 징을 울리면서 대취타를 연주하면 군영의 문을 닫으며 , 신호포를 소고 나[우리나라 타악기의
하나]를 울리면 앉아서 쉬며 , 기화신호 한가지를 쏘아올리면 군영안에서 불을 피우며 , 나를 차례로 치면 갑옷을 벗고
밥을 지어 잠자던 곳에서 새벽밥을 먹는다." >
다시말해 훈련나갓던 병사들이 병영안으로 돌아오면 징을 두드리며 휴식시간을 주엇고 , 이후 하늘에 불꽂을 쏘아올려
밥을 동시에 짓기 시작해서 다시 징을 차례로치면 , 갑옷을 벗고 자기가 잠을 잣던 곳에 밥을 먹었음을 알수있다.
물론 밥을지으려고 물을 길어오거나 나무를 해올때도 이와 유사한 현태로 단체신호에따라 일사분란하게 움직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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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의다양한 갑옷들
조선시대 갑옷들은 대부분 색상과 만든 재료를 중심으로 이름이 붙었다. 갑옷이름은 간혹 이를 착용하는 사람의신분이나
때로는 갑옷의 특정부위를 세심하게 표현하기도 했지만, 대부분 주재료와 색상에따라 이름을 달리했다. 먼저갑옷의 색상을
보면 주로 다홍색 , 흑색 , 감색 , 백색등이 쓰였는데, 이외에도 아주 다양한 색상의갑옷이 있었다. 조선시대 갑옷의색이
다양한 이유는 당시군사제도와도 깊은 연관이 있다. 조선전기에는 오위제를 바탕으로 군영이 운영되었는데, 조선후기
또한 오군영체제를 유지했다. 이때문에 갑옷의색깔도 동쪽을 지키는 군사들은 청색 , 서쪽은 흰색 , 남쪽은 붉은색 ,
북쪽은 검은색 , 마지막으로 중앙을 지키는 병사들은 황색의 갑옷을 입어 부대의 이동이 한눈에 들어오게했다.
이번에는 재료를 중심으로 갑옷의조류를 살펴보자. 텔레비전사극에서는 흔히물고기 비늘모양을 한 두석린갑이나
갑옷에 콩알과같은 못이 박혀있는 두정갑을 많이보게 되는데, 이들갑옷은 핵심재료를 중심으로 이름을 붙인 경우이다.
조선시대에는 수십종이 넘는 갑옷이 사용되었다. 가장보편적으로 사용된 것이 철갑이다. 철갑은 작은 쇳조각 , 이른바
철찰을 가죽끈으로 연결해서 만든 것으로, 가장방호력이 뛰어난 갑옷으로 인정받았다. 그렇지만 철갑은 철찰을 이어주는 가죽근이
쉽게마모되면서 잘 떨어진다는 단점이 있었다. 이때문에 전투를 한번치르고나면, 갑오에 철찰을 다시꿰메야하는 상황이 종종
벌어졌다. 특히 전쟁이없는 평화로운 시기에는 군기고에 보관한 철갑들이 녹이슬거나 가죽이썪어 폐기처분되는 경우가 허다했다.
또 철갑을 이어주는 가죽을 쉽게 구할수있는것도 아니었다. 이가죽은 흔히소나돼지의가죽을 사용하는 것도 아니라 야생에서
거칠게자란 동물들의 질긴가죽을 썼다. 따라서 갑옷의수리를 위해서는 병사들을 동원해 사냥해야만 했기에 철갑옷을 유지하고
관리하는 수고로움 또한 만만치않았다. 철갑의 종류에는 대표적으로 수은갑,유엽갑,엽아갑(작은무쇠미늘로 만든 철갑)등이 있다.
수은갑은 철조각위에 은빛으로 밫나는 수은을발라 멀리서도 번쩍거리는 가장화려한 갑옷이다. 수은갑은 그화려함으로 인해
궁궐의섬돌위에서 서있던 왕의 최측근인 내금위병사들이 주로입었고, 여러군사의례에도 빠짐없이 등장했다. 그래서인지
수은갑은 모든병사들이 한번쯤은 꼭 입고싶은 갑옷으로 인식되었다. 수은갑은 중국의 갑옷을 모방해 만들었는데,
조선전기 북방을 괴롭히던 여진족들도 이러한 수은갑을 입었기에 서로 번쩍거리는 갑옷으로 무장하고 전투를 벌이는 일도 있었다.
유엽갑은 연기로 그을려말린 사슴가죽에 철 조각을 붙이고 그위에 검은색을 입힌것으로, 국상중에 번쩍거리는 갑옷대신 입었던
철갑이다. 엽아갑, 별철갑은 유엽갑과 유사한 방식으로 철 조각을 가죽으로 엮어만든 갑옷이다. 철갑다음으로 많이입었던
갑옷은 피갑인데, 이는 짐승의 가죽을 주재료로 해서 만든 것이라 볼수있다. 피같은 철갑보다 방호력이 많이 떨어지지만,
무기가 훨씬가벼워 활동하기 편해서 보병들이 즐겨 입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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갑옷에는 백성의 눈물이 담겨있다.
- 이렇게 다양한 모습을 지니고 있던 조선시대의 갑옷은 거의모두 백성들의 손으로 만들어졌다. 일부 유급병사는
구가에서 지급한 갑옷을 입었지만, 군역으로 온 대부분의 병사들은 자신의 갑옷과 무기를 스스로 사야했다.
이때문에 가난한 집에서는 무기를 사느라 집안이 망하는 일도 빈번하게 일어났다. 그러나 백성들의 딱한 사정에도
불구하고, 군법은 엄하기만 해서, 만약훈련에 갑옷을 제대로 챙겨 입지않으면 곤장세례를 내렸다. 상황이 이렇다보니
가난한 백성들은 대충 갑옷의 모양만 만드렁입는 갸우가 허다했다. 심지어 궁궐이나 북쪽변방을 지키는 튼튼한 철갑대신
피갑이나 지갑을 입는 일이 많았다. 철갑에 필요한 철은 워낙 고가이고, 피갑과지갑에도 백성의 눈물은 깊게 스며들어있었다.
먼저가죽갑옷의 제작에 필요한 엄청난 양의가죽을 구하려고 농사에 꼭 필요한 소를 밀도살하는 바람에 가뜩이나 노동력이 부족한
농촌은 더 어려워졌다. 게다가 남의소를 몰래 밀도살해서 가죽은 갑옷만드는 곳에팔고 고기는 푸줏간에 밀매하는 도적떼들이 들끓게
되면서 소 키우는 사람들은 밤잠을 설치기도 했다. 이렇게 밀거래가 휭행하자 국가에서는 아예 원천적으로 소의밀도살을 금지하고
만약 이를 어기면 극형에 처한다는 엄포를 놓기도 했다. 그런데 밀도살이 금지되면서 자연사한 소나 말의가죽도 채취하지못하게
돼 또 다른 문제가 생겼다. 결국 갑옷을 만들어 납품해야 하는 백성들은 더욱심한 곤경에 처할수밖에 없었다. 갑옷에 필요한 말이나
소가죽의 사용이 어려워지자 백성들은 사슴이나 멧돼지를 사냥해 그가죽으로 갑옷을 만들고자 했다. 하지만 이들짐승의수가 워낙
한정되어있어서 많은어려움이 따랐다. 또 사냥에 대규모 인원이 필요하다보니 힘 없는 백성들은 몰이꾼으로 동원돼
병사들을 따라 매일 이산저산으로 노력봉사를 다녀야 했다. 그리고 소나 산짐승의 가죽을 구하기가 어려워지면서 돼지가죽인
생저피가 각광을받아 덩달아 돼지가죽 가격이 급등하게되었다. 당시 포1필의 가격이 가장많이 올랐을 세조(1417~ 1468 , 재위
1455~1468)때에는 돼지가죽1장에 포19필,생저피로만든 갑옷한벌에 포50여필로 뛰어 국가에서 직접 가격을 통제하기도 했다.
상황이 이지경인 피갑대신 종이갑옷인 지갑을 마련하려는 백성들이 많을수박에 없었다. 그러나 지갑한벌에는 본 뜨는
휴지10근(1그은4000~600그램), 이면에 쓰이는 표지(책 겉장) 1권, 엮을떄쓰는 면사1근, 이을땠는 황색면사 1.5근, 송지(송진)3되
등 엄청난 양의 종이가 들어가기에 지갑을 만드는 것 도한 쉬운이은 아니었다. 그래서 보통은 비변사에서 과거를 본 시험지 중
낙방자의 것을 모아 필요한 양만큼 각도의감영이나 병영에 보내주는 방식을 취했다. 하지만 지갑의 양이 급격히 늘어나면서
시험지마저도 품귀현상을 빚게되었다. 이떄문에 공물로 지갑을 제출할 시기가 다가오면 궁지에몰린 백성들은 남의집 귀한서책이나
문서를 훔치기도 했다. 일부에서는, 겉에는 종이몇겹을 대충붙이고 속에는 말린짚단을 잘게 잘라넣어 두께를 부풀려 공물로 납품하기
도 했다. 하지만 갑옷은 병사들의 목숨과 직결되는 것이라, 만약 이것이 발각되면 곤장세례와함께 몇배에 해당하는 일종의벌금을
내야했다. 가진겂없는 백성들은 이래저래 고통을 겪어야만 했다.
--------------------최형국저서 "조선무사"에서 발췌-----------------------------------------------------------------
동래성 출토갑주를 토대로 복원했는 조선병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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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가 직접 최형국님의저서 "조선무사"를 사서 일일히 베껴썼습니다. 그림자료는 조선병사를 가장 잘 고증하였다고
평가받고있는 최원철 일러스트레이터가 작업하신 조선병사이미지입니다. 실물사진은 동래성 출토갑옷을 토대로
복원한 모습이라고합니다.효종실록자료는 온라인에서 찾아서 올렸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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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고의 명군이라는 세종대왕 치세 때.조선군의 무장에 대해 추론 가능한 기록들이 있습니다.
세종 6권, 1년(1419 기해 / 명 영락(永樂) 17년) 12월 16일(병술) 5번째기사
각도의 갑사와 별패도 군기와 갑옷을 사사로 장만하게 하다
전라도 도절제사가 계하기를,
“도내의 각색 군정(各色軍丁)은 군기(軍器)와 옷·갑옷을 모두 사사로 장만하는데, 홀로 갑사(甲士)와 별패(別牌)는 사사로 준비하지 않고 상번(上番)301) 할 때 군기감에서 받습니다. 하번(下番)302) 하여 시골에 있을 때 국경에 경보(警報)가 있으면 맨손으로 전장에 나갈 것이 뻔합니다. 전일에 동으로 대마도를 정벌할 때에도 각색 군사는 모두 사사로 군장(軍裝)을 준비하였는데, 유독 갑사와 별패 등은 선군의 것을 빼앗아 갔으니 실로 미편합니다. 갑사와 별패도 사사로 군장을 준비하게 하고 하번할 때마다 엄하게 점검하여 뜻밖에 일어나는 변고에 대비하도록 하소서.”
하니, 상왕이 그대로 좇고, 이어 다른 도에서도 이 예(例)에 따라 시행하도록 명하였다.
【태백산사고본】 3책 6권 16장 B면
상번 즉 입대할때는 국가에서 갑옷과 투구를 비롯한 무장을 지급하는데, 하번 즉 제대할때는 이 무장을 국가에 반납하고 가므로
비상사태가 발생하면 맨손으로 소집되어야 해서 문제라는 이야기입니다.
지금과 같이 보급체계가 발달하였다면 모르겠지만 당시로서는 심각한 문제였습니다.
교통도 불편해 중앙군이 즉각즉각 달려오지도 못했습니다.
그래서 개인이 무기를 사서 집에 보관하고 비상시 이것을 들고 전장에 나가라는 이야기지요.
현대식으로 말하자면 "니 돈으로 K2 사서 집에 놔뒀다가 전쟁나면 그거 들고 튀어오거나 싸워라" 라는거죠.
세종 69권, 17년(1435 을묘 / 명 선덕(宣德) 10년) 8월 9일(무신) 2번째기사
병조에서 잡색군의 무기를 통일할 것을 아뢰다
병조에서 아뢰기를,
“각도의 잡색군(雜色軍)이 자기가 무기(武器)를 갖추게 되매, 서로 같지 않음이 있게 되니, 뒷날 일에 임해서는 실로 절제(節制)가 없게 됩니다. 지금부터는 기병(騎兵)·보병(步兵)을 매 5인마다 오(伍)를 삼고, 매 오마다 활 3개, 창 2개를 갖추게 하고, 이내 모두 갑옷과 칼을 갖추게 하소서”
하니, 명하여 상정소에 내려 이를 의논하도록 하였다.
【태백산사고본】 22책 69권 14장 A면
세종 69권, 17년(1435 을묘 / 명 선덕(宣德) 10년) 9월 1일(기사) 4번째기사
잡색 군정에 갑주와 병장기를 준비하게 하다
병조에서 아뢰기를,
“요사이 흉년으로 인하여 여러 도(道)의 백성의 생계가 염려스러우니, 지금 잡색 군정(雜色軍丁)의 갑주(甲胄)와 병장기(兵仗器)를 상고하되, 한꺼번에 다 점검(點檢)한다면 소요를 일으킬 뿐만 아니라, 토지와 재산을 다 팔아서 반드시 직업을 잃게 될 것이니, 잠정적으로 매 1호(戶)마다 투구 한 개, 갑옷 한 벌, 칼 한 자루만 준비하도록 하고, 그 활·화살과 창은 반드시 다 준비하지 아니하여도 되며, 매 1패(牌)내에 5분의 3은 활과 화살을 준비하고 5분의 2는 창을 준비하게 하여 정수(定數)로 삼아 점차 준비하도록 하되, 매양 1년씩 걸러 한 가지 물건을 더 준비하게 하고 준비하면 곧 점검하도록 하되, 감사·도절제사·차사원(差使員)으로 하여금 순행 점고(點考)하지 말도록 하고, 다만 그 고을의 수령으로 하여금 점고하도록 하여 도순검사(都巡檢使)가 지경에 내려가기를 기다리도록 하게 하소서.”
하니, 그대로 따랐다.
【태백산사고본】 22책 69권 20장 B면
잡색군은 당시의 향토 예비군입니다.
그러니까 당시 향토 예비군의 기본 무장은 5명이 기본단위로
전원이 갑옷, 투구, 칼 로 무장을 하고 3명은 활과 화살, 2명은 창을 소지하도록 하였습니다.
물론 당시에도 이걸 100% 갖추게 하는것은 무리였고 이걸 기준으로 최종적으로 전국이 이를 갖추도록 지도하는게 목적이었습니다.
중앙에선 무장에 대한 샘플을 각 고을로 내려보내 각 고을에서 만들게 하였기 때문에
큰 형태는 다르지 않으나 각 고을마다 장인마다 그 질에선 차이를 보일것으로 보여집니다.
특히 개인이 사사로이 무장을 구입하였기 때문에
지금으로 따지면 누구는 AK-47 하나 겨우 장만했는데 누구는 악세사리 풀로 달아 HK416 장비하고 그런식이었겠지요.
여튼 덕에 세종때는 이런 일도 발생합니다.
세종 114권, 28년(1446 병인 / 명 정통(正統) 11년) 10월 17일(신해) 1번째기사
평안도 도관찰사에게 대성산의 도적을 제거하는 방법을 아뢰도록 유지하였다
평안도 도관찰사에게 유지(諭旨)를 내리기를,
“도내(道內)에 도적이 흥행(興行)하여 대성산(大城山)에 떼지어 모여서, 갑옷을 입고 병기(兵器)를 가지고 공공연히 다니면서 겁략(劫掠)하고, 영리(營吏)와 아전(衙前)들과 내통 공모하여, 관청에서 이를 체포하고자 하나 문득 도망하여 피하게 되니, 이와 같은 큰 도적을 제거하지 않을 수가 없다. 만약 세력이 성하여 당여(黨與)가 이루어지면 작은 일이 아니다. 잡는 방략(方略)을 어떻게 처리하겠는가. 비밀리 아뢰게 하라.”
하였다.
【태백산사고본】 36책 114권 15장 A면
보시면 알겠지만.. 조선은 갑옷 안갖춰입으면 소집해도 들어가지도 못합니다.
그것 때문에 처벌당하기도 하고, 그로 인해 군역을 진 사람이 우마를 저당잡히고, 전답을 팔아먹고
갑옷과 무기를 장만하는 경우도 있고..
갑옷을 3년 기한 내에 마련하라고 유예기간을 두기도 합니다.
여진족을 막던 북방 병졸들의 자비마련이 어려우니 관에서 제작해 지급하기도 하구요.
이런게 망실되어 다시 병졸들이 자체 조달해야 될 상황에 처하기도 합니다.
여수의 병졸들은 갑옷을 잘 갖췄다고 단체로 포상하려는 움직임도 보입니다..
그말은 즉슨.. 지방군들도 갑옷을 입는게 기본이었다는 것이죠. 경군뿐만 아니라..
그러니, 조선 초기엔 갑옷 장만이 기본 중의 기본이었고..
조선 후기 현종 대에는 갑옷 대신 의복이란 표현을 쓰고 있어서.. 갑옷 미착용 상태라도..
속칭 포졸복이라도 깨끗하게 차려입어야 넘어갔다 정도로 이해할 수 있겠지요.
이그림을 그린사람은 엄심갑을 조선병사의표준장비로 잘못알고그렸는데, 엄심갑은 지갑(종이"지"갑옷"갑")이라
불리우는 종이갑옷으로 이것은 제대로된갑옷이없거나할때 정식갑주가 망가지거나, 경제력이 안되었을때착용하는
갑주로 추정하며, 조선병사들의 제대로된표준장비는 갑사가입는 정식갑옷입니다..그래서 너무비싸서 집안이망하는
것이지요...삼국시대,고려시대,조선시대 모두백성들이 집집마다, 갑주와무기를갖추고 전쟁이나면 나가서싸우게
제도가 되어있었습니다.
조선군병사들도 정식갑옷 이런 제대로된갑주를 착용하도록 제도화되어있습니다. 그래서 비쌉니다.
명나라 갑주...조선도 명나라갑주를 본딸라는 어명이있었고, 그래서인지, 병사복장은 명나라 병사와비슷한복식이있지만,
장수용갑주는 명나라갑옷과 전혀다릅니다. 초기에는 명나라갑옷과 비슷한모양의것도 있었는데, 아무래도 조산국실정과는
맞지않았던 모양입니다. 갑주스타일이 북방민족과비슷한 양식인데,아마,북방민족인 여진족과싸우기위해서 우리가아는
조선갑옷이나온것같지않을까하고 추정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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