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춘경, 바람 저편에 서면그러하다바람은 길 끝에서부터 불기 시작하고바람의 파장이 어깨를 스쳐갈 때쯤그때서야 비로소길 위에 서 있음을 깨닫는다서로 닿지 못하는 동안의 떨림과서로 닿았을 때의 흔들림그 짧은 교차가 허공을 진동하면어느새 길은 또 멀어진다바람이 분다바람 저편에 서면지독한 고요함에 슬픔이 밀려온다오지연, 가을 안에 서다가을이 물들기에가을이 익기에가을이 지기에딱 한 번만 이별 같은 날을가슴 터지도록울어보면 안 될까하늘이 높기에햇빛이 맵기에풀잎이 쓰러지기에딱 한 번만, 이 웬수 같은 날을가슴이 미어지도록그리워하면 안 될까김사빈, 달빛마악 그 삽작을지나는 길이라 하더니저녁마다 뜨락을기웃 거리는 것은그리 말 안하셔도달빛에 젖은 박꽃을 보면당신이 왔다 간 것을 알지요알몸이 부끄러워안개비로 가리더니밤 중에야얼굴을 내미는 것은잠이 든 님을 훔쳐보려고그리하는지 알지요박영석, 햇빛나는 그를 심었다물을 주고 꼭꼭 밟아주었다뿌리를 덮고 있는 흙을 가만히 쓰다듬어주었다줄기를 가시를 쓰다듬어주었다그는 잎으로 피었다꽃봉오리로 맺혔다꽃나무로 서 있었다그가 빨간 장미로 필 때 나의 쓰다듬음은 빨갰다그가 노랑 장미로 필 때 나의 쓰다듬음은 노랬다그가 흰 장미로 필 때 나의 쓰다듬음은 하얬다쓰다듬었을 뿐인데오월이 오고쓰다듬었을 뿐인데나비가 날고쓰다듬었을 뿐인데바람이 불고이파리들이 자꾸 시퍼래졌다단지 쓰다듬었을 뿐인데모자 속에서 비둘기가 나오듯이지은숙, 가을숨겨둔 사람 하나있었으면 좋겠다가을 강 내려다보며삶은 한번 살아볼 만하다고물수제비 띄우며환하게 웃을 줄도 아는사람 귀하게 여겨그 옆에 서면나도 귀한 사람이게 만드는사람 다 거기서 거기다 해도질리지 않을구절초 같은 사람 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