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영삼
1. 박정희시절 가택연금 되었을때 단식투쟁 벌인다고 다 떠벌리고 다녔는데 문익환 목사가 위로차 사전연락 없이 방문했다가
대보름달빵과 바나나우유 먹고있던거 딱걸렸음 딱 보름달빵같이 생겨갖고

2. 클린턴 전대통령에게 후아유라고 묻고 대답을 듣자 미투라고 대답해서 졸지에 빵삼이 힐러리 남편 되버렸음
3. 클린턴 전대통령과 자유로운 분위기에서 조깅하면서 대화를 해야되는데 젊은 대통령 기좀 죽이려고 3시간동안 악바리로 달리기 해서 대화한마디 못하고 달리기대회 2명중 1등했음
4. 박근혜가 칼로 그이고 병원 입원했을때 빵삼이가 병문안 가서 위로해준단 소리가 나도 박정희 대통령에게 고문 많이 당해봐서 다 안다고 말해줌
5. 금융실명제라는 좋은 제도를 국민에게 안겨주고 그로인해 빵삼이아들은 비리로 구속 자폭

6. 일본 리쿠르트 뇌물 스캔들을 요쿠르트 사건이라고 말함

7. 점수가 바닥을 달리는데 서울대학교 성적표를 뭐가 그리 자랑스럽다고 만천하에 공개

8. 일본의 잔재를 싫어했던 빵삼이 조선총독부 폭파크리!!
폭파전


폭파후

9. 남산경관 막는다고 아파트 통째로 폭파크리


이회창
1. 서민흉내 내고 싶어서 시장통으로 선거운동 나가서 흙묻은 오이를 그냥 씹어먹음


2. 서민흉내 내고 싶어서 맨손으로 생선모가지를 꼭 쥐고 들었음

3. 숨겨왔던 회창이의 소심한 학창시절

4. 혼자만 심각하고 혼자만 외롭고 혼자만 힘들었던 회창이 가출사건 (굵은글씨만 읽어도 대충 파악됨)
"회창이는 역시 문과를 가야겠군." 청주에서 중학교를 다닐 때였다.
수학 선생님은 내가 수학문제 푸는 것을 내려다보시면서 종종 그런 말씀을 하셨다.
그 무렵부터 나는 문과 기질을 분명하게 보이고 있었던 모양이다. 국어나 영어 같은 어학과목을 좋아하였고, 작문시간을 좋아하였다. 어렸던 나의 마음에는 그 말씀이 참 섭섭하게 들렸다.
나는 모든 과목에서 최선을 다하려고 노력하고 있었고, 특별히 수학을 못한다는 생각은 하지 않던 터였으니까. 그러나 다른 한편으로 그 말씀은 내게 일종의 최면 같은 영향을 미치고 있었다.
나도 모르게 자꾸 수학을 싫어한다는 생각을 갖게 되었고, 수학은 내게 어울리지 않는다는 생각까지 하게 된 것이다. 덕분에 나는 몇 차례의 작은 시험들을 망쳤다.
학기말 시험에서 나는 수학과목의 명예회복을 다짐했다. 그리고 나름대로 준비를 했다.
그런데 무슨 마가 씌웠는지 그 시험마저 망쳐버리고 말았다. 너무 긴장한 까닭인지 대수시험에서 말도 안되는 실수들을 저지른 것이다. 점수는 60점 만점에 20점(100점 만점에 40점 정도) 정도밖에 나오지 않았다.
나는 그만 모든 자신감을 잃어버리고 말았다. 자신감을 잃어버린다는 것은 우리집에서는 모든 죄악들 중에서도 으뜸가는 죄악이었다.
할아버지께서 아버지꼐 물려주신 가훈은 바로 '정신일도 하사불성'이라고 했다. 정신을 하나로 모은 다면 이루지 못할 일이 어디 있겠느냐는 뜻이다. 아버지께서는 기회가 있을 때마다 자식들에게 그 말씀을 들려주시며 모든 일의 성패는 마음가짐에 달려 있다는 것을 강조하시곤 했다.
그런데 나는 그 소중한 가훈인 자신감을 잃어버리고 만 것이다.
집으로 돌아오는 내 발걸음은 무겁기만 했다. 집에서는 내 기분과 전혀 다른 일들이 벌어지고 있었다.
어머니는 아주 즐거운 모습으로 부엌과 마당 을 오가며 떡을 찌고 계셨다. 형님과 내가 그날 시험을 마쳤으니 그 동안의 수고를 치하할 겸 모처럼 떡을 만들기로 했다는 것이었다. 집안에는 달콤하고 고소한 향기가 가득했다.
밥해먹을 쌀도 모자라서 매끼니 끙끙거리던 시절이었으니 그것은 대단한 일이었다.
형님은 나를 보자 더 즐거운 목소리로 소리쳐 물었다.
"야, 난 오늘 시험 아주 잘 봤어. 넌 어땠니?" 나는 이제 지옥하고도 밑바닥을 추락하는 기분이었다.
나는 더 이상 그곳에 머물러 있을 수가 없었다. 그곳은 걱정거리라곤 하나도 없는 행복한 사람들이 사는 천국이었고, 나는 대수시험에서 20점밖에 맞지 못하고, 게다가 자신감까지 상실해버린 천하의 불행한 사람이었던 것이다.
나는 가출을 결심했다.
교복도 갈아입지 않은 채, 어머니께는 이웃집에 잠깐 다녀오겠노라고 말씀드 리고 집을 나섰다.
그리고는 터벅터벅 조치원역을 향해서 걷기 시작했다. 집을 나서면서 이미 생각을 정했는지 아니면 조치원역을 향하면서 그렇게 정리했는지는 확실하지 않다. 어쨌든 그때 나는 이런 생각을 하고 있었다.
'이제 나는 정상적인 학교생활을 계속할 수 없다. 내 능력으로는 부모님의 기대를 따라갈 수 없다. 그렇다면 내게 남은 길은 한가지뿐이다. 화물칸을 타고라도 서울로 올라가는 것이다. 혼자서 돈을 벌어 고학이라도 하면서 내가 할 수 있는 최선을 다해 보는 것이다. 성공해서 새 삶은 찾게 된다면 다시 부모님을 찾아뵐 것이다. 아니, 꼭 그렇게 할 것이다....'
(중략)
내가 사라진 동안 청주의 집에서는 난리가 났었던 모양이다.
이웃집에 잠깐 다녀오겠다고 나간 아이가 자정이 가깝도록 돌아오지 않으니 아버지께서는 경찰에까지 연락해서 찾아달라고 한 것이었다.
그 무렵 청주에는 대절택시가 겨우 두 대 있었다. 하이야 택시라고 불렀는데, 아버지는 그 택시를 타고 달려오셨다. 역사로 들어서는 아버지를 보면서 나는 머쓱하게 굳어졌다. 아버지는 자상하기보다는 단호하고 엄격하신 편이었기에 이제부터 어떤 일이 벌어질지 짐작할 수 없었다.
그런데 역무원실로 들어선 아버지는 단번에 나를 들어올려 가슴에 안으셨다. 그리고는 아무 말씀도 안하셨다. 아버지 가슴이 그처럼 따뜻한 곳이었음을 나는 그날 처음 깨달았다. 160센티미터가 못 되는 작은 체구의 아버지셨지만 아들을 안은 가슴만큼은 누구보다도 넓고 크고 단단했다. 택시에 올라탄 다음에도 아버지는 나를 끌어안은 팔을 풀지 않으셨다.
나중에야 이렇게 한 말씀을 하셨다.
"어때? 나와 보니까 세상이 얼마나 무정한지 알겠지?" >
나는 더 이상 아무런 말씀도 드릴 수 없었다. 역에서 당한 일들을 아시는 것도 아닐 텐데 아버지는 어떻게 단박에 그런 말씀을 하셨을까 아버지는 원래 시골의 평범한 농가 출신이셨다.
시골에서 파묻혀 살자면 크게 부족하지는 않은 살림 이었겠지만 아버지는 서울로 올라가 고생하는 길을 택하셨다. 그래서 제일고보와 경성법전을 고학하 다시피 마치셨다. 그런 고생을 겪은 까닭에 아버지는 가출한 아들의 가슴 속을 훤히 들여다보고 계셨 던 것이었다. 그날 이후로 나는 오래도록 아버지의 가슴을 잊을 수 없었다. 그리고 나도 다른 사람들에게, 내 자식은 물론 다른 누구에게도, 그처럼 크고 넓고 따뜻한 가슴으로 기억될 수 있는 사람이 되고 싶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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