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달팽이>
언젠가 먼훗날에 저 넓고 거칠은
세상끝 바다로 갈거라고
아무도 못봤지만
기억속 어딘가 들리는 파도소리 따라서
나는 영원히 갈래
내 모든걸 바쳤지만
이젠 모두 푸른 연기처럼 산산히 흩어지고
내게 남아있는 작은 힘을 다해
마지막 꿈 속에서
모두 잊게 모두 잊게
해줄 바다를 건널꺼야
<기다리다>
네가 다시 나를 볼 순 없을까
너의 두눈 속에 나는 없고
익숙해진 손짓과 앙금같은 미소만
희미하게 남아서 나를 울게 하지만
너는 다시 내게 돌아올거야
너의 맘이 다시 날 부르면
주저말고 돌아와
네 눈앞의 내 안으로
예전처럼 널 안아줄테니
<강>
설레이던 내 어린 나날도
이제는 무거운 내 길 위에
더 무거운 짐들 조금씩 하나씩
나를 자꾸 잊으려 눈물을 떨구면
멀리 강물 따라 어디쯤 고여 쌓여가겠지
텅빈 난 또 하루를 가고
내 모든 꿈은 강물에 남았네
작은 섬이 되었네
<사진>
너는 아직도 내게 남아 노란 입김을 쌓아가고
네겐 아마도 내가 남아 마른 웃음을 흘리겠지
멀리 쓰러져 가는 기억 속에서
먼지낀 너를 보고파 먼지낀 너를 사랑해
먼지낀 너를 보고파 먼지낀 너를 사랑해
<내 낡은 서랍 속 바다>
때로 홀로 울기도 지칠 때 두 눈 감고 짐짓 잠이 들면
나의 바다 그 고요한 곳에 무겁게 내려다 나를 바라보네
난 이리 어리석은가 한 치도 자라지 않았나
그 어린 날의 웃음을 잃어만 갔던가
초라한 나의 세상에 폐허로 남은 추억들도
나 버릴 수는 없었던 내 삶의 일부인가
<태엽장치 돌고래>
오 나 이제 눈물이 흘러요
그 속에 매일같이 맴돌아요
풀어진 태엽 누군가 감아주면
하루가 되풀이되겠죠
때론 모든 것들이 사라지고
태평양을 누비는 꿈을 꾸죠
그 순간만은 온 세상이 내것 같아요
영원할 수는 없나요
<미안해>
해가 지고 별이 뜨고 긴 바람이 울어대면
그때라도 내 생각 해줄래
나는 정말 미안해
꽃이 지고 잎도 지고 큰 나무가 휘청이면
그때라도 내 생각 해줄래
나는 정말 미안해
<눈녹듯>
그 밤 눈이 펑펑 왔지 빛의 조각들처럼
골목 가로등 아래 반짝이는 눈 속에
나는 두 손 모아 빌었지
그리 아름답던 그 눈이 모두 녹을 줄이야
구두 위에 어지럽게 묻어 있는
얼룩이 하나 남은 흔적일 줄이야
<길을 내>
내가 가진 것들을 모두 잃어도
찾아가야 할 곳이 멀리 있다면
그 곳을 향한 내 마음은 모든 걸 넘을 수 있을까
<정류장>
나는 아무 말도 못하고 그댈 안고서
그냥 눈물만 흘러 자꾸 눈물이 흘러
이대로 영원히 있을 수만 있다면
오 그대여 그대여서 고마워요
<로시난테>
가자 가자
라만차의 풍차를 향해서 달려보자
언제고 떨쳐 낼 수 없는 꿈이라면
쏟아지는 폭풍을 거슬러 달리자
<거위의 꿈>
난 난 꿈이 있었죠
버려지고 찢겨 남루하여도
내 가슴 깊숙히 보물과 같이 간직했던 꿈
<짝사랑>
난 정말 멍청하지 말도 곧잘 못하고
얼굴만 붉히면서 네 주윌 맴돌아도
난 너를 원해 냉면보다 더 난 네가 좋아 야구보다 더
넌 내 맘 모를 거야 아냐 그건 괜찮아
저번에 집에 갈 때 내게 웃어 줬잖아
넌 너무 예뻐 햇살보다 더 난 네가 좋아 우주보다 더
창밖으로 출렁이던 헤드라잇 강물도
갈 곳을 잃은 채 울먹이고
자동응답기의 공허한 시간
모두 어디로 흘러가는 건지
기다림은 방 한 구석 잊혀진 화초처럼
조금씩 시들어 고개 숙여가고
<중략>
하루 하루 갈수록 더 조금씩
작아져만 가는 내게 너 영영 그치지 않을 빗줄기처럼
나의 마음 빈 곳에 너의 이름을 아로새기네
<회의>
그대 생각 나나요 아니 그만 두지요
이젠 모두 과거 속의 일인 걸요
몇 해 지나고 나면 예전 앨범을 보듯
아련한 마음으로 웃게 되겠죠
떠나도 울지 말아요 그 눈물 흘리며 더 아파요
<순례자>
길은 또 여기서 갈라지고 다시금 선택은 놓여있고
내가 가는 길 내가 버린 길 나 기억할 수나 있을까
어느 하늘 어느 대지 어느 바다 어느 길 끝에
나조차 모르고 좇는 그 무엇이 있을까
<내가 말한적 없나요>
눈이 무척 따뜻하다고 내가 말한 적 없나요
웃는 얼굴이 참 좋다고 내가 말한 적 없나요
맨날 라면만 사가시냐며 걱정해주던 그날에
모든 게 시작됐다고 내가 말한 적 없나요
난 농담도 서툴고 운동도 잘 못해요
나이가 어린 것도 아니죠
가진 건 솔직히 아무 것도 없지만
그대만은 가득해요 괜찮을까요
<무대>
다시 불이 켜지고 막이 오르고 나면
지구 어느 한 구석 손바닥만한 내 세상 위에
나 홀로 있네
짧지 않은 세월도 무디게 하진 못해
처음 바로 그 때의 떨리는 가슴 그대로 안고
나 홀로 있네
너는 숨죽이고 나는 노래하고
우린 또 한 번 사랑을 나누고
후한 손뼉에 난 눈물을 흘리다
쓰러질 것만 같지만
다시 불이 꺼지고 막이 내리고 나면
사랑을 떠나보내 슬픔에 빠진 사나이처럼
나 홀로 있네
<빨래>
빨래를 해야겠어요 오후엔 비가 올까요
그래도 상관은 없어요 괜찮아요
뭐라도 해야만 할 것 같아요 그러면 나을까 싶어요
잠시라도 모두 잊을 수 있을지 몰라요
<중략>
그대가 날 떠난 건지 내가 그댈 떠난건지 일부러 기억을 흔들어
뒤섞어도 그새 또 앙금이 가라앉듯 다시금 선명해져요
잠시라도 모두 잊을수 있을까 했는데
<매듭>
사랑이 너무 무거워 서로 짐이 되어
내려놓을 수밖에 없던
서러웠던 그 기억은 끊어지지 않네
지친 마음을 묻고 있네
그대라는 오랜 매듭이
가슴 속 깊이 남아서
아무 것도 풀지 못하고 있지만
날이 지날수록 더 헝클어지는 생각은
버릴 수가 없어 그대여
<고독의 의미>
험한 파도에 휩쓸리는 배처럼
나도 내 맘을 설명할 수 없어요
그댄 아나요 내 고독의 의미를
나 그대를 그리워하는 오랜 날들을

엄마의 하루
이동준 (본명)
습한 얼굴로
am 6:00 이면
시계같이 일어나
쌀을 씻고
밥을 지어
호돌이 보온 도시락통에 정성껏 싸
장대한 아들과 남편을 보내놓고
조용히 허무하다.
따르릉 전화 소리에
제2의 아침이 시작되고
줄곧 바삐
책상머리에 앉아
고요의 시간은
읽고 쓰는데
또 읽고 쓰는데 바쳐
오른쪽 눈이 빠져라
세라믹펜이 무거워라
지친 듯 무서운 얼굴이
돌아온 아들의 짜증과 함께
다시 싱크대 앞에 선다.
밥을 짓다
설거지를 하다
방바닥을 닦다
두부 사오라 거절하는
아들의 말에
이게 뭐냐고 무심히 말하는
남편의 말에
주저앉아 흘리는 고통의 눈물에
언 동태가 되고
아들의 찬 손이 녹고
정작 하루가 지나면
정작 당신은
또 엄마를 잘못 만나서를 되뇌시며
슬퍼하는
슬며시 실리는
당신의 글을 부끄러워하며
따끈히 끓이는
된장찌개의 맛을 부끄러워하며
오늘 또
엄마를 잘못 만나서를
무심한 아들들에게
되뇌이는
'강철 여인'이 아닌
'사랑 여인'에게
다시 하루가 길다.
둘째가 중학교 3학년 때 내 생일날 전해준 편지에 바깥일과 집안일의 틈바구니에서 허우적대는 엄마를 ‘엄마의 하루’라는 시에 담아 그렸는데 엄마의 괴로움이 너무 생생하게 그려져서 시를 읽는 친구들마다 “하, 고놈” 하고 혀를 찼다. 이 시는 내가 쓴 ‘삶의 여성학’ 뒷부분에 실렸는데 그걸 읽으신 작가 박완서 선생은 어떻게 중3짜리 남학생이 엄마의 삶을 그리도 정확하게 포착했느냐며 감탄을 거듭하셨다.
- 박혜란 자서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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