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성계 즉위 직후 세자1순위로 거론됐으나
산속에 은거해 술과 함께 살다 1년만에 사망.
대중에게는 고려에 대한 충절을 지키기 위해 창업에 참여하지 않고 건국직후 산속에 들어가 고려를 애도했다 알려짐.
이성계의 의형제인 이지란의 '청해문집'에는 이방우가 아버지의 역성혁명을 반대하고 산속에 살며 고려를 그리워하다가 술을 마시고 병을 얻어 죽었다고 설명하고 있음.
반역자 아버지와 충신 아들간의 충돌은 상당한 드라마적 요소고, 거의 모든 대중매체가 이걸 차용하고 있음.
하지만 이방우의 잠적에 대해선 여러 의견이 분분함. 위와같은 고려충신설은 사실과 멀다는 의견이 상당히 많음.
일단 청해문집엔 이방우와 이성계가 갈리기 시작한 시점을 위화도회군부터라 하지만
실제로는 공요군의 우왕진영에 있던 이방우가 회군소식을 듣고 신속하게 빠져나와 공요군 회군진영에 합류해 쿠데타에 참여함.
쿠데타 이후엔 창왕옹립에 적극적으로 개입함.
이는 후 공양왕 추대때 '신씨'를 옹립했다는 큰 정치적 부담이 되버리고 결국 조정에서 실각하게 됨.
결국 조정에서 실각한 상황에서 이방과와 이방원이 주도한 정몽주척살에도 기여하지 못하는 등, 건국전후로 정치적권력을 잃어감.
또한 문벌귀족인 지윤의 사위이자 사대부 보수파인 이색과도 사돈관계를 맺는등 고려 구세력과의 관계로 인해 정치적 권력에 점점 멀어짐.
조선 건국 후에도
선대들의 제사를 배향하는 등 이성계의 장자로서 책임과 소임을 다 했으나 위에 열거한 정치적 부담으로 인해서 세자책봉 순위에서 멀어져 1년 후에 사망하게 됨.
청해문집에선 고려에 대한 충절이라고 하지만
정사의 기록을 봤을땐 맏아들이나 정치적인 문제로 인해 후계자가 될수 없었던 좌절감때문에 산속에 은거해 술병으로 사망한것이 유력한 가설로 보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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