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http://www.huffingtonpost.kr/2015/04/26/story_n_7145138.htm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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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티히에우(1935년생)
“나 좀 살려주세요. 저렇게 아이들도 있는데… 아무리 말해도 소용없었어. 총소리가 나고, 내가 애를 셋을 안고 있었어. 서너 명의 한국군이 들어와서 나를 잡고 머리에다 총을 댔어. 애들은 마당에 내동댕이쳐지고, 나를 뒷집으로 끌고 가서 강간했어. 한 사람씩 돌아가면서. 너무 무서워서 눈을 감고 있었는데 한국군들이 내 옷을 벗겨서 내 얼굴을 가렸어. 아이고 무서워.”
조상들에게 제사를 지내는 이야기 등 최근의 일로 화제를 돌렸지만 또다시 과거가 재현되는 듯 “아 난 너무 무서워. 무서워. 날 어디로 끌고 갈 건데. 날 어디로 끌고 갈 건데…”라고 하며 떨었다.
하티낌응옥(1935년생), 하티찐(1929년생)
“우리 셋을 베트콩 잡으러 가자며 따로따로 끌고 나갔어요. 그런데 풀숲으로 끌고 갔어요. 베트콩 잡으러 간 것이 아니라 강간하러 간 거죠. 한 사람은 이쪽 풀숲에, 다른 한 사람은 다른 풀숲에 끌고 가 강간했어요. 그러고는 다시 언덕으로 끌고 가서는 비시(VC, 베트콩)! 비시! 하고 소리쳤어요.”
언니인 찐 할머니가 이야기를 이어나갔다. “나는 그 풀숲에서 두 명의 병사가 내게 덤벼들었어요. 바지와 웃옷을 벗으라고 하더니, 낄낄거리고 웃고, 나를 이리 뒤집고 저리 뒤집고 하면서 희롱했어요 그리고 강간했어요. 한 명이 하고, 그다음 한 명이 하고. 그러고 나서도 나를 돌려보내지 않고 나를 끌고 베트콩을 찾으러 갔어요.”
응우옌티카인(1936년생), 응우옌티떰(1954년생)
“누군가 ‘따이한’ ‘따이한’ 소리를 쳤어요. 그 소리를 듣고서야 고보이 평야 쪽에서 한국군들이 오는 것을 알았어요.” 한국군 이야기가 시작되면서 떰 할머니는 더더욱 이상증세를 보였다. 갈수록 목소리는 떨리고, 얼굴 표정도 불안해 보였다. 그런데도 언니는 옆에서 무릎을 가지런히 모으고 그 무릎을 양팔로 감싼 채 자신의 맨발을 응시하고 있었다.
그길로 일곱 명의 마을 여자들은 묶인 채 끌려갔고, 가다가 마을이 나타나면 다시 수색을 해서 한 명을 다시 묶어서 끌고 갔다. 도착한 곳은 고보이 한국군 기지였다. 빈 건물에 여성들을 감금하고, 한 명씩 여자들을 불러내 눈을 가리고 뒤통수에 총을 겨눈 채 한국 군인들은 소리쳤다.
“너 베트콩이지!” 그러면 여자들은 있는 힘껏 머리를 세 번 흔들었다. 그것이 끝나면 강간을 하고 풀어줬다. 그리고 그다음 사람도, 또 그다음 사람도…. 2박3일 동안 계속 반복해서 강간을 당했다. 하룻밤에 정확하게 기억나진 않지만 일곱, 여덟 번은 끌려 나간 것 같다고 한다.
“(함께 끌려간) 엄마는 너무 늙어서 강간을 당하지는 않았어요. 그러나 무지하게 많이 맞았어요. 그때 우리도 많이 맞았어요. 총 개머리판으로 계속 맞으면서 강간도 당하고 그랬어요. 풀려날 때 걸음을 걸을 수가 없을 정도였어요. 그러나 살아서 풀려난다는 것이 너무 기뻐서 있는 힘을 다해서 걸었어요.”
응우옌티바이(1948년생)
“노인들을 땅굴 위로 올라오라고 했어요. 골라낸 것이죠. 땅굴에 남은 어린 사람은 결국 나 혼자였어요. 혼자 남은 내게 한국 군인들은 ‘그 짓’을 했어요. 너무 무서워서 아무 말도 못했어요.” 할머니는 한국 군인들의 강간행위를 ‘그 짓을 했다’고 표현을 했다.
손으로 손가락 네 개를 펴 보이며 “한국군 4명이 들어왔어요. 너무 무서워서 소리도 지를 수 없었어요.
한 사람씩 돌아가며 내게 그 짓을 했어요. 마지막 네 번째는 내가 혼절을 해서 축 늘어져 있으니까 무서워서 그냥 달아나버렸어요. 엄마도 나를 도울 수 없었어요. 아무 말도 할 수 없었어요.”
팜티하인(1951년생)
“그때 한국군에게 구타당하고, 고문당하고 그래서 폐가 손상이 된 것 같아요. 고문후유증으로 인해 신경계통의 질환도 있어요.”
“그곳에 목욕탕이 있었는데, 목욕하러 들어갔을 때 한국군이 들어왔어요. 있는 힘 다해서 저항을 했지만 군인이 입을 막았어요. 그 짓을 하는데 이겨낼 수 없었어요. 그곳에서 2개월 지내는 동안 세 번을 강간당했어요. 다 다른 군인들이었어요.” 팜티하인은 강간뿐만 아니라 전기고문과 구타, 발길질 등의 고문도 계속 당했다.
할머니는 그때 생각을 떠올리거나 하면 그날부터 악몽을 꾼다. 밥도 먹을 수가 없고, 온몸이 아파온다. 전쟁이 끝나고 40여년이 흘렀지만 여전히 고통은 계속된다.
팜티언(1951년생)
“내가 잡혀간 날 주민들 30~40명이 함께 잡혀갔어요. 그런데 남자는 남자대로 여자는 여자대로 격리를 했어요. 아이가 있거나 나이가 많은 여자들은 따로 모아놓고, 처녀이거나 소녀이거나 아이가 없는 여자들은 참호 속에 한 명씩 넣었어요.”
“참호 속에 있던 그 군인에게 2박3일 동안 연속해서 죽을 때까지 강간당했어요. 정확하게 기억은 안 나지만 낮에는 두 번, 밤에는 세 번 정도였던 것 같아요. 한국군이 옷을 벗으라고 하고 강간하고, 다시 옷을 입으면 벗으라 하고 강간하고, 또 옷을 입으면? 계속 반복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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