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한 크루이프, 그가 가지고 있는 최초, 최고의 타이틀
68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난 레전드 더치맨은 단순히 놀라운 스타가 아니었습니다.
그는 혁신 그 자체였습니다.
요한 크루이프는 단순히 아약스, 바르샤, 네덜란드의 레전드가 아닙니다.
그는 축구 그 자체의 전설입니다.
지금 까지 어느 누구보다 우아하게 게임을 했던 이 네덜란드의 상징은 암과의 사투를 이기지 못하고 끝내 숨졌습니다.
선수로 또 감독으로 크루이프는 혁신가였습니다.
흔해 빠진 전술책들을 갈기갈기 찢어버렸고 획기적인 시도를 했습니다.
1. ‘크루이프’턴의 창시자

긴 말이 필요하지 않습니다.
자신의 이름을 딴 세계적인 스킬을 보유한 선수가 세상에 몇이나 되겠습니까?
2. 토탈사커의 첫 스타

티키타카는 잊으세요.
오래 전 바르샤와 스페인의 간판 전술은 1970년대 크루이프가 이끌었던 아약스와 네덜란드의 ‘토털 사커’에서 따온 것입니다.
그들의 스타일은 빠른 패스, 빠른 무브먼트, 그리고 끊임없는 스위칭을 기본으로 했죠.
친숙하게 들리지 않습니까?
맞아요. 크루이프는 이미 40년 전에 혼자서 리오넬 메시와 안드레스 이니에스타의 역할을 동시에 수행하고 있었습니다.
3. 최초의 발롱도르 3회 수상자
맞아요, 메시는 5회죠.
하지만 오래전 그가 태어나기도 전에 크루이프는 4년 동안 세 번의 골든 볼을 탔습니다.(71년 73년 74년)
4. 월드컵 결승에서 2선 아디다스를 입은 최초의 선수

아마 크루이프가 진부한 관습을 거절한 최고의 증거일겁니다.
1974년 네덜란드와 서독 사이의 월드컵 결승에서 네덜란드는 아디다스 유니폼을 입었죠.
그리고 결승에서 아디다스의 상징 삼선 유니폼을 입기로 되어있었습니다.
하지만 크루이프는 자신의 퓨마 부츠를 신었습니다.
그가 그와 관련해서 그들의 스폰서(아디다스)에게 사정이라도 했을까요?
위의 사진을 잘 보세요. 팀 동료들이 삼선 유니폼을 입었을 때, 그는 이선 유니폼을 입었습니다.
5. 11을 벗어난 백넘버를 단 최초의 스타

40번이나 50번대 등번호를 단 유스 선수들이 이 기사를 보고 있다면, 크루이프에게 감사의 인사를 전하세요.
과거에 대부분의 1군 선수들은 1~11의 백넘버를 입었습니다.
크루이프가 부상에서 돌아왔던 70`71시즌, 아약스의 포워드넘버 9은 이미 그의 다른 동료가 입고있었습니다.
그는 결정했죠. 14번을 달기로.
그는 신선한 등번호를 달면서 관습을 깨 부쉈습니다.
6. $2m의 가격이 매겨진 최초의 선수

크루이프가 1973년 아약스에서 바르샤로 이적할 당시 성사된 월드 레코드는 2m달러입니다.
이 가격을 기록한 선수는 당시 어느 누구도 없었습니다.
얼마 안 되는 것 같나요? 무려 40년 전입니다.
7. 라 마시아를 창조한 남자

라마시아는 현재 전설적인 기관이 되었습니다.
컨베이어 벨트에서 작지만 영리하고 기술적이고 잠재력 넘치는 선수들이 찍어져 나오는 축구공장 같은 곳이죠.
바르샤1군은 여전히 이 기관에서 그들의 길을 찾고 있습니다.
이 아카데미가 누구의 아이디어에서 탄생한 걸까요? 물론 크루이프죠
라 마시아는 1988년 그가 바르샤 매니저로 부임하기 전부터 존재했습니다.
하지만 지금처럼 축구팬들 사이에서 알려진 정도는 아니였습니다.
어린 선수들은 당시 신체조건을 위주로 선별되어 졌습니다.
크루이프가 큰 틀을 바꿨습니다. 기술과 능력 위주로 선수들을 선별한 것이죠.
크루이프가 지금의 안드레스 이니에스타와 리오넬 메시를 키워냈다고 하는 것도 결코 과장하는 것이 아닙니다.
크루이프가 아니었다면 이 왜소한 선수들은 캄프누 정문도 통과하지 못했을 테니까요.
8. 네덜란드 국가대표로서 퇴장당한 최초의 선수

아마 명예로운 기록은 아닐지 모르겠네요.
하지만 1968년 체코슬로바키아와의 경기에서, 크루이프는 레드카드를 받은 최초의 네덜란드 플레이어가 됐습니다.
9. 최근 한 세기 동안 최고(이자 유일한) 유러피언 플레이어
설명이 필요 없습니다. 그는 정말 최고였습니다.
http://www.mirror.co.uk/sport/row-zed/9-things-johan-cruyff-before-762149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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