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노무현 정부뿐만 아니라 전임 김대중 정부에 이르기까지 가장 많은 논란을 빚고 있는 햇볕정책
과연 햇볕정책은 실속 없이 북한의 핵개발과 정권유지만 뒷받침한 친북 정책이었는가?
김대중과 노무현은 김정일에게 속절없이 끌려다닌 한국의 네빌 체임벌린이었을까?

햇볕정책을 올바르게 이해하기 위해서는 햇볕정책이 추진된 배경과 햇볕정책의 기본 전제를 분명히 이해하고 넘어가야 함.

1945년 8월, 일제의 식민 지배에서 벗어났지만 온전히 자신의 힘으로 광복을 성취해내지 못한 한반도는
결국 승전국인 연합국의 이해관계에 따라 남북으로 분단되는 역사상 초유의 운명에 처하게 되었는데
분단 초기에는 북한의 국력이 한국보다 훨씬 월등했음.
이는 중국 대륙 침략을 기획하면서 한반도의 주요 공업능력을 현재의 북한 지역에 집중한 일제의 탓도 있었고
정권 수립 당시의 북한은 '사회주의 형제국 지원', '사회주의식 국제교역' 원칙에 따라
소련과 중국, 동구권을 비롯한 사회주의 우방국으로부터 전방위적인 물적 · 기술적 · 군사적 지원을 받아낸 것은 물론
천연자원이 풍부한 소련과 중국 등에서 석유와 식량 등의 원자재를 말도 안되는 헐값에 수입해올 수 있었기 때문.
이는 서방 자본주의 세계에서는 절대 불가능한 수준의 헐값이었음.

미국에서도 6.25 전쟁 휴전 직후 한국에 막대한 물적 · 기술적 · 지원과 차관을 제공했지만
사실 이해타산을 따져봤을 때 소련과 사회주의 진영에 버금가는 막대한 지원을 무한정 계속하기에는 무리가 있었고
1950년대 후반 미국의 불황과 겹쳐 미국 의회에서 한국 지원액을 줄이라는 압력이 빗발쳐 미국의 지원 규모는 갈수록 줄어듬.
결국 미국의 지원 규모 축소는 미국의 영향력으로 38선 이남에 수립된 이승만 정권의 붕괴에 큰 역할을 했을 정도임.
결국 북한은 이러한 환경적 차이와 맞물려 1970년대 초중반까지 사회주의 특유의 경제적 풍요(!!)를 누린 것은 물론
한국에 대한 국력 · 경제력상의 우위를 이어나감.

1970년대 초중반까지 북한의 경제적 풍요와 국력상 우위는 이미 한국의 지식인들에게는 널리 알려져 있었는데
이미 6.25 전쟁 직전까지 한국은 북한의 발전소에서 생산된 전기를 공급받아 사용했으며
(급기야 북한이 6.25 전쟁 개전을 코앞에 두고 "밸브 잠가라"를 시전하자 한국 경제는 대혼란에 빠짐)
4.19 혁명 직후 남북 협상 분위기가 무르익었을 당시 한국 대학생들이 시위에서 외친 구호는 "남한의 쌀, 북한의 철!" 이었을 정도임.
("북한의 쌀, 남한의 철!"이 절대 아님)
또 한반도에서 먼저 지하철이 개통된 것도 북한, 먼저 컬러 TV 방송이 시작된 것도 북한
심지어 한반도에서 먼저 비데를 사용하기 시작한 것도 북한이었음.
영국의 경제학자들이 당시 "한반도의 경제 기적"을 말할 때 가리킨 한반도 국가는 한국이 아니라 북한이기도 했음.
북한의 중장년층 탈북자들이 한국에 와서 김씨 왕조 3부자 중에 김정일, 김정은은 신나게 씹어도
김일성 씹기를 주저하는 것은 1970년대 초중반까지의 경제적 풍요를 경험한 적이 많기 때문.
한국의 대다수 중장년층이 박정희를 바라보는 심리와 많은 부분이 비슷하다고 보면 됨.

그러나 북한의 경제는 1970년대 후반 오일 쇼크 이후 원자재 가격의 하락과 김일성 유일지도 체제의 내부적 모순으로 똥망 크리를 타기 시작한 반면
1970년대 초반부터 자동차와 중화학 공업 등 당시 경제에서 가성비가 높은 산업의 개발을 본격적으로 시작한 한국은 북한과의 국력 차이를 극적으로 뒤집고 역전에 성공함.
게다가 당시 북한이 정치 · 사회 · 외교 · 경제 · 문화 분야를 통틀어 야심차게 추진한 사업은 대부분 실패로 끝난 반면
한국은 대부분의 분야에서 성공을 거두기 시작하면서 한 번 역전된 남북한의 국력 차는 넘사벽으로 벌어지기 시작함.

결국 햇볕정책이 시행되기 직전인 1990년대 중반 남북한의 경제력 차이를 보면
한국이 4,500만 인구에 1인당 GDP는 1만 달러 수준까지 도달한 반면, 북한은 2,200만 인구에 1인당 GDP는 500달러 수준에 불과해
단순계산으로도 남북한의 경제력 차이는 40배까지 벌어지게 됨.
(참고로 1990년 독일 통일 당시 동서독의 경제력 차이는 9배 정도였음)

결국 햇볕정책을 실시할 수 있었던 것은 40여 년 간 이어진 남북한의 체제 경쟁에서 한국이 압승을 거두면서
이제는 북한을 우리 뜻대로 컨트롤할 수 있다는 자신감에서 비롯된 것.
이는 매우 중요한 부분인데, 바로 과거와 달리 남북 관계에서 한국이 슈퍼 甲의 위치에 올라섰다는 것을 의미하기 때문.
북한 경제가 그나마 멀쩡했던 1980년대 초반만 하더라도 한국에 수해가 나면 북한에서 구호품을 지원하는 사태가 벌어지기도 했지만 2015년 현재 그런 상황은 절대 벌어질 수가 없음.
노무현 정부의 햇볕정책을 제 2차 세계대전 직전 네빌 체임벌린 영국 총리의 대독 유화정책에 빗대어 비난하는 사람들이 있지만
당시의 영국 정부는 히틀러의 나치 정권을 과대평가한 나머지 독일에 대한 공포감에 사로잡혀 저자세를 취한 것이라면
햇볕정책의 경우 철저한 한국의 우위라는 전제 하에 대북 리스크를 관리하기 위해 입안된 정책이므로 둘은 전혀 같을 수가 없음.

특히 김대중 정부의 출범 직후 국지적 교전인 제1 연평해전이 발생하자 한국 해군이 북한 해군을 일방적으로 두들겨 패면서
한국과 북한의 국력 차가 넘사벽으로 벌어졌음을 실증해내기도 했음.
최근에는 김정은이 정권 창건 기념 열병식을 앞두고 "어떻게든 한국에서 거액의 차관을 타와라"라고 정부 고위층에 지시한 것만 봐도, 북한은 이미 한국을 국력으로 역전할 수 없음을 인정하고 있음.
마찬가지로 한국이 아무리 일본에게 "역사왜곡하지 마라", "신사참배하지 마라", "독도를 넘보지 말라"고 요구해도 씨알도 먹히지 않는 것은
아무리 한일 간의 경제력 격차가 과거에 비해 크게 줄어들었어도 2015년 현재 일본의 경제력은 한국의 3배가 넘기 때문.

이를 바탕으로 김대중은 자신이 역대 대통령과는 차원이 다른 통일 전문가임을 강조하면서 정권을 잡았고
마침 대북 유화정책에 긍정적인 태도를 갖고 있는 미국 빌 클린턴 행정부와 이해도 맞아떨어지면서
1998년 베를린 선언을 통해 햇볕정책을 발표함.
당시 김대중이 햇볕정책의 3대 원칙으로 무력도발 불용, 흡수통일 배제, 화해 · 협력을 제시함.

당시 김대중 정부는 햇볕정책 발표와 동시에 실향민 출신으로 대북사업에 관심이 많았던 당대 국내 최대의 재벌 정주영을 통해 북한 정권과의 접촉을 시도했고
자신들을 바라보는 한국의 태도가 눈에 띄게 부드러워진 것을 감지한 북한 정권 역시 대북 사업에 긍정적인 태도를 보임. 그렇게 시작된 것이 현대그룹의 금강산 관광 사업.
북한 주민들과의 접촉이 완전히 차단된 채, 북한 정권이 한국 기업에 임대한 조차지 같은 형태가 되어 한국인들만이 금강산 일대를 드나들 수 있었지만
분명한 것은 금강산 관광을 계기로 대북 협력 사업이 급격히 늘어나고 한반도에 해빙 무드가 형성되기 시작했다는 것. 이를 통해 김대중 정부는 역사상 최초로 남북정상회담을 성사시켰고, 당사자인 김대중 대통령은 한국인 최초로 노벨평화상을 받음.
그리고 노무현 정부는 취임 초기 대북 송금 특검을 치러내는 등 다소간의 홍역도 치렀지만 김대중 정부의 햇볕정책을 일관되게 계승해 나감.

햇볕정책으로 불리는 대북 화해 · 협력사업이 특히 한국 경제에 중요했던 이유는
IMF 외환위기로 한국 경제는 코스피 지수가 (1997년 고점 대비) 무려 65% 폭락하는 등 초유의 위기 상황을 맞고 있었을 뿐만 아니라, IMF와 세계은행, 주요 선진국으로부터 긴급 구제금융을 받아내기는 했지만
이미 1970~80년대식 압축성장 모델이 사형선고를 받고 연 10%대의 고성장이 불가능해지면서, 어떻게든 외국인들의 투자를 이끌어내고 새로운 성장 동력을 찾아야 하는 상황이었음.
그런데 당시까지 외국인들이 한국 투자를 꺼렸던 가장 큰 요인 중의 하나는 바로 남북한 간의 군사적 대치로 인한 안보 불안(코리아 디스카운트)이었음.
심지어 국내 모 프로스포츠의 한 용병이 지난 해 한 구단과 입단 계약을 체결할 당시 연고지가 휴전선에서 500km 이상 떨어져 있다는 전언을 듣고 안심했다는 웃지 못할 이야기도 있을 만큼 코리아 디스카운트는 한국 경제가 지금도 안고 있는 가장 큰 리스크임.
즉 햇볕정책은 IMF 외환위기를 맞은 한국에게 있어 위기를 돌파해 나갈 일종의 생존 전략이었던 것.

위의 사진은 2004년 개성공단이 조성되면서 다시 개업한 경의선 개성역의 모습.
북한 당국에서 설치한 김씨왕조 선전 설비를 빼면 한국의 일반 철도역과 똑같은 양식으로 지어진 것을 볼 수 있는데
바로 경의선 철도 복원사업을 진행하면서 한국의 코레일이 새로 싹 지어줬기 때문.
현재 문산~개성간 경의선 철도는 코레일의 최신 기술에 의해 복선 노반이 마련된 단선 철도로 지어진 상태.
이것이 무엇을 의미하는가 하면 햇볕정책은 북한 정권의 붕괴 이후 예상되는 막대한 통일비용을 상쇄하는 효과도 낳는다는 것.

현재 남북한의 통일에 소요될 비용은 예상하는 기관에 따라 다르지만 최소 60조원~최대 6,000조원 가까이 사이로 추정되고 있음.
이중 상당 액수는 북한의 사회간접자본(SOC)과 산업 기반을 재구축하는 데 들어갈 전망.
특히 북한의 SOC는 일제강점기 시절보다 효율성이 떨어진다는 말이 있을 만큼 극도로 낙후되어 있어(북한 열차의 평균 속도가 증기기관차 수준인 30km/h도 못 뽑아낸다니 말 다했다!)
북한 정권이 붕괴되고 통일이 이루어지면 사실상 휴대폰 공장초기화 수준으로 북한의 SOC를 처음부터 다시 구축해 나가야 함.

그나마 김정은 정권이 출범한 이후 수도 평양을 중심으로 나름대로 최신식의 건물과 인프라들이 조금씩 지어지고 있지만
그마저도 '70일 전투', '100일 전투' 하는 식의 날림공사 투성이라, 안전을 생각하면 현재 지어지는 최신식 건물과 인프라들도 죄다 리셋하고 다시 지어야 할 판.
문제는 1년 평균 예산이 400조원(2016년 기준) 수준인 한국 정부가 통일 비용을 한꺼번에 떠맡기에는 부담이 너무 과중하고
그렇다고 통일 비용의 대부분을 한국과 외국의 민간 기업에 떠넘겨 민자로 운영하자니 기업들이 추구하는 손익분기점과 북한 주민들의 구매력 사이에 발생하는 갭이 어마어마함.
결국 통일비용을 조금이나마 줄여나가려면 정권에 상관없이 한국 정부가 일관되게 대북 협력사업을 추진하여, 정부 예산에 부담이 가지 않는 선에서 북한의 SOC를 하나씩 재구축해 나가는 수밖에 없음. 그렇지 않으면 나중에 통일이 됐을 때 한국 경제에 큰 재앙으로 다가올 것임. 독일 경제도 통일 이후 옛 동독 지역의 SOC를 재구축하는 과정에서 10여 년을 고생했는데, 경제력 격차가 훨씬 극심한 한국은 최소 30~40년 이상은 고생할 가능성이 매우매우 높음.

뿐만아니라 햇볕정책은 코리아 디스카운트로 불리는 한국의 안보 불안을 상당 부분 해소하고 외국인들의 투자를 유치하는 데에도 큰 공헌을 했는데
이전 정부에 비해 노무현 정부 5년간은 북한의 크고 작은 도발 횟수가 큰 폭으로 감소해 그만큼 대북 리스크를 줄여냈고
이는 국가경제의 추세를 선반영하는 코스피 지수에도 그대로 나타나 노무현 정부 당시 코스피는 5년 내내 우상향을 거듭했음.
위의 그림을 보면 노무현 정부 출범 후 코스피 지수의 상승률은 역대 정부 최고치인 184.75%를 기록한 것을 볼 수 있음.

마지막으로 햇볕정책을 비판하고 대북강경정책을 주장하는 사람들이 가장 간과하는 부분은
한국이 대북 교류협력을 중단하고 북한에 대한 지원을 끊으면 자금줄이 막힌 북한은 자연스레 고립될 것이라고 기대하는데
오히려 북한에게는 중국이라는 커다란 스폰서가 뒤에 자리잡고 있다는 점을 잊어서는 안 되며
중국의 입장에서도 역사적으로 한국과 미국을 상대로 전쟁을 함께 치른 점, 한미 동맹의 완충국 역할을 해준다는 점에서
북한에 대한 전방위적 지원을 포기할 수 없음 그에 따라 중국은 북한에 지금도 헐값에 식량과 원유 등 원자재를 공급하고 있음.
또한 햇볕정책이 중단된 후 북한의 중국 쏠림현상은 지나치게 심화되어 노무현 정부 시기 평균 50%대에 불과했던 대중 무역 의존도가 이명박 정부 이후에는 평균 70%대를 돌파했을 뿐만 아니라
북한의 천연자원 개발권이 헐값에 줄줄이 중국에 팔려나가, 통일 이후 북한 지역의 천연자원 개발을 놓고 중국과 분쟁이 빚어질 가능성도 높아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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