편히 잠드소서.

50여년이 지나서야 거행된 4.3 위령제.
현재 이념과 정당에 관계 없이 모두 추모하는 제주 4.3사건.
그리고 2014년, 국가 기념일로 지정된 '4.3희생자 추념일'.

하지만 교과서에 자세히 설명이 나와있지 않은 3만 여 명의 무고한 죽음.

국가 기념일로 지정된 그 참혹했던 날.
수많은 양민이 학살됐던 너무나 잔인하고 부끄러운,
70년이 채 되지 않은 그날의 이야기.
1948년 ...

#1. 1947년 3월 1일.
'시민들에게 총을 발포하다'

1947년 3월 1일, 3.1절 기념행사에 제주에서는 친일 경찰과 미 군정의 권력에 반대하는 시위가 일어났다.

시위 도중 어린아이가 군정 경찰의 말발굽에 치여 쓰러졌고,

이를 본 시민들이 분노하여 경찰을 향해 돌을 던졌다.

군정 경찰들은 본인들에 대한 반항으로 오인하고 모여있는 군중들을 향해 발포한다.

그렇게 농부 4명, 초등학생 1명, 21세 젖먹이 여인이 사망했고,
제주사회는 미 군정과 정부에 대한 분노로 들끓기 시작한다.

#2. 1948년 4월 3일 새벽.
'무장대가 경찰서를 급습하다'

단독선거를 추진하는 미군을 반대한 좌익 무장대는 봉기를 일으켰다.

그날 제주도 내 11개의 경찰서가 습격당했고,
서북청년단을 비롯한 우익단체 15명이 피살된다.

4.3사건 발발 후 미 군정과 조병옥 경무국장은 육지경찰 1,700명과
서청단 500명을 급파하여 사건 진압을 시도했고,

4.3진압에 친일 경찰과 서청단을 대거 중용했던 조병옥 경무부장은
'20만 명을 다 죽여도 좋으니 좌익세력을 모두 진압하라'라고 명령했다.

선거를 저지하려는 좌익 무장대와 이들을 토벌하려는 토벌대 간의 싸움이었지만,

경찰과 서북청년단은 무장대뿐만 아니라, '양민'을 가리지 않고 체포, 고문, 즉각 처형했다.

1999년에 공개된 미 군정 정보 보고서에 따르면,
양민의 사망 숫자까지 미 군정에 상세히 보고됐지만 그들은 묵인했다.

1947년 3월 19일 미 군정 정보 보고서 - '제주도민의 70%는 좌익이나 그 동조자들이다.'
이것이 당시 4.3사건을 진압하는 미 군정의 시각이었기 때문이다.

또한 5.10선거를 앞두고 이러한 사건이 육지에 퍼지면
곤란했기 때문에 선거를 위해 미 군정은 시급히 무장대를 진압해야 했다.

#3. 1948년 5월 10일.
'전국 200개 선거구에서 선거가 실시되다'

드디어 전국 200개 선거구에서 선거가 실시됐다.
하지만 제주도는 4.3사건의 여파로 3개 중 2개의 선거구가 무효 처리되어
제주도는 유일하게 5.10 선거를 반대한 지역으로 남게 됐다.

5.10선거 이후, 토벌은 보복전 양상을 띄게 된다.
선거 기권자는 '빨갱이'로 간주돼 불과 한 달 만에 6,000명이 무장 폭도로 체포되었다.

경찰은 무장 폭도로 간주된 사람들을 때려죽이고 총살했다.
그리고 이를 피해 산으로 피신한 청년들의 행방을 알아내기 위해
부모, 아내, 어린 동생을 죽이는 대살이 성행했다.

#4. 1948년 8월 15일.
'마침내 남한에 단독 정부가 수립되다'

단독정부가 수립됐으나 전국은 여전히 좌, 우익의 갈등과 분단을 반대한 지도자들로
이승만 대통령의 지위는 불안한 상태였다. 그리고 반대 정점엔 제주도가 있었다.

#5. 1948년 11월.
'제주, 초토화 작전 개시'

정부 수립으로 잠시 소강상태였던 공비 토벌. 그 해 11월 '초토화 작전'을 기점으로 양민 대 학살을 몰고 온다.

'초토화 작전'이란 빨간 선 바깥 지역에 사는 주민들만 양민으로 인정,
빨간 선 안쪽으로는 통행을 금지하고 이를 어기면 모두
좌익 무장세력으로 간주하여 소탕하는 작전이었다.

이 작전을 듣지 못했거나, 미처 이주하지 못한 양민들은 모두 밭에서, 집 안에서 즉결 처형되었다.

수많은 양민들이 ‘산사람’의 가족이라는 이유로 ‘빨갱이’로 몰려 토벌대의 총탄에 죽어 가고,
적잖은 양민들이 경찰의 가족이라는 이유로 ‘앞잡이’로 몰려 무장대의 죽창에 죽어 갔다.

그러던 1949년 6월, '초토화 작전'은 무장대 총사령관 이덕구가 잡혀
살해되면서 4.3사건은 1년 2개월 만에 일단락되었다.

#6. 1950년 6월
'전쟁이 시작됐으니 제주도의 빨갱이를 죽여야겠다'

한반도에 전쟁이 시작되면서 4.3사건은 제주도에서 다시 재현되었다.

전쟁이 일어나자 4.3당시 예비 검속(죄를 저지를 개연성이 있는 사람을 사전 구금)을
받았던 800여 명에 대한 재조사를 단행했고,

무장대와 전혀 상관 없는 양민들까지 '예비검속자 총살집행' 명령서에 의해 즉결 처분되었다.

6·25전쟁이 발발하였을 때 한라산에 잔존한 무장대는 60여 명이었지만,
그 무장대를 잡는 과정에서 몇 십 배 많은 '양민'이 죽어나갔다.

#7. 1954년 9월 21일.
'제주 4.3사건, 종결'

한라산의 금족(禁足) 지역이 1954년 9월 21일 전면 개방되어
4·3사건은 발발 이후 7년 7개월 만에 사실상 종결되었다.

제주 4.3사건으로 희생된 27,719명.
이 중 확정된 희생자의 가해별 통계를 보면 토벌대가 84.4%를 희생시켰고,
무장대가 12.3%를 희생시켰다.

경찰이 쏜 총탄에 턱을 잃고 천으로 턱을 두른 채 55년을 사시다
2004년 타계한 '무명천 할머니' 진아영 할머니.
사건 이후 산 사람은 산 사람 대로 평생 고통 받았고,

죽은 사람은 죽은 사람 대로 '빨갱이'라는 오명으로 죽음보다 더 고통스러울 억울함 속에서 세월을 보냈다.

4.3사건 종결 7년 후 이름 없는 무덤들로 묘역이 만들어 졌고, 이 묘역을 '백조일손지묘'라고 부른다.

'빨갱이'가 무엇인지 모른 채 죽음을 맞이했던 수 많은 양민들의 넋을 위로하는 데도 참으로 오랜 시간이 걸렸다.

희생자들을 추념하고 화해와 상생의 미래를 위해 제주4.3평화공원이 세워졌고,

많은 사람들에게 기억되고 있지만, 여전히 규명할 것이 많은 '제주 4.3사건'.

부디 어제보다 더 나아지는 오늘이기를,
작년보다 더 나아지는 4월 3일이기를.

'어머니, 그럼 나도 빨갱이예요? 빨갱이가 뭐예요?'

'글쎄……, 나도 모르겠다. 바다 건너 들어온 말이지…….'
BGM : 김윤아 - 야상곡(夜想曲)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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