절벽에 매달린 기분으로
너의 손을 잡았을까
김행숙, 그곳에 있다 中
발목까지 빠져드는 길고 습한 골목길을 걸어나갔다
점점 무거워져 오는 발을 천천히 내디디면서
넘어지지 말아야지,
그렇게 마음 졸이며 걸어나갔다
아직도 등 뒤에는 고장난 방범등이 껌벅거리고 있었다
훈훈한 바람과 쌓인 눈과 얼어붙은 수도꼭지를
모두 녹이는 날에는 너는 자주 없었다
너에게로 가는 길은 참으로 고단하고 아픈 것이었다
홍영철, 너에게로 가는 층계
다시 돌아가고 싶었지만
나는 너무 멀리 떠나와버렸다
해는 지지 않고 달은 너무 많아
모두 당신 얼굴인 양 여기며 살았다
언제나 밤길이었다
잘 살아야 해
내가 어두운 달의 뒤편을 돌아나올 때
당신이 말했다
나는 가끔
태양계 저편에 전화를 걸었지만
당신은 아무말도 하지 않았다
박후기, 보이저 2호, 어떤 사랑의 방정식
죽이고 싶은 이름들을
수첩 귀퉁이에 적어 내려가던
그 어느 날의 사악함으로
이를 악물어야지
잊지않겠다고, 내가 너를 참 좋아했다는 것
이응준, 안부
꽃잎마다 그를 앓는 편지를 쓴다
어딘지 좀 채도가 부족한 생각일까
가끔 그를 거부하면서 즐거움을 느끼고 싶다
갖고 싶은 사람을 소유한 사람의 여유처럼
김지명, 꽃의 사서함
예를 들면,
바다에서 물놀이를 하고 돌아온 날 밤
잠자리에 들어도 여전히 몸이 파도에 울렁이는 느낌
한 낮의 해변에 드러누워 눈을 감아도 태양이 보이는 것 같은 느낌
그런식으로 너는 늘 내안에 있었다
에쿠니 가오리, 선잠 中
잠시 모든 것을 그대라고 부른다
먼지처럼 그리움이 쌓인다
그대가 쌓인다
이문재, 늠름한 금욕주의자 中
조각난 너를 가지고 폭죽을 만들겠다
너는 하늘로 솟구쳐 올랐다가 나를 향해 무서운 속도로 떨어질 것이다
두 팔을 활짝 벌려 너를 안아주겠다
열리지 않는 책이 되어 너를 내 가슴에 품고 있겠다
나로부터 나에까지 끝없이 달아나는 가운데 너
너로부터 너에까지 끝없이 쫓아가는 가운데 나
신영목, 우주의 저수지 中
사랑이여
나는 그대의 하얀 손발에 박힌
못을 빼주고 싶다
그러나
못박힌 사람은 못박힌 사람에게로
갈 수가 없다
김승희, 시계풀의 편지4
소년 너를 보면 맑은 하늘에도 무지개가 뜨고
사막에도 푸른 초원의 빛이 다가온다
너를 생각하면 한겨울에도 봄이오고
영롱한 아침이슬이 강물되어 흐른다
너를 보면 가슴에서 장미꽃이 피어나고
캄캄한 밤바다에 등대불이 반짝인다
너를 바라보면 광활한 우주가 다가오고
너는 커다란 지구를 굴렁쇠처럼 굴린다
박원자, 소년 너를 보면
그 빛에 부딪혀
어찌할 바를 모르고 허둥대는 내 마음이
대책 없이 설명할 수도 없이
그 속에 머물러
한 천년만 살고 싶은
혹은 빠져 죽을 수 있을 것 같은
기꺼이 죽어줄 수도 있을 것 같은
네 속눈썹 밑
그 깊은 빛 몇 천리
복효근, 네 속눈썹 및 몇 천리
아는지요
발길을 돌려야 하는 우리 사랑이
우리가 다시 세상속으로 돌아와야 하는 그것이
내 가장 참담한 절망이었다는 것을
저무는 해는 다시 떠오르면 그만이지만
우리가 다시 그곳을 찾게 될 날이 있을까
서로의 아픔을 딛고 우리가 무엇을 할 수 있을까
그대로 영원히 영원히
당신의 가슴에 저무는 한 점 섬이고 싶었던
내 마음, 그 저녁바다를
이정하, 그 저녁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