희빈 장씨 하면 빼놓을 수 없는 사람이 숙빈 최씨야
희빈 장씨는 아들이 경종이지만, 경종이 즉위한지 4년 만에 죽는 바람에 역사의 패배자가 됐어 경종이 생전에 희빈을 추숭하는 일을 했지만 영조가 즉위하자 희빈 장씨 추숭 작업은 그대로 취소 됐어 그리고 조선이 멸망할 때까지 추숭되는 일은 없었어 왜냐하면 경종 이후 왕들은 모두 영조의 핏줄을 타고 내려온 후손이거든
여기까지 보면 숙빈 최씨는 확실히 역사의 승자야
그러나 오늘 쓰는 글은 영조, 숙종을 제외한 영조의 주변 인물이 한 말을 철저하게 배제하고 숙빈 최씨가 생전에도 승자였는지에 관한 글이야
숙빈은 1670년 음력 11월 6일에 태어났어
숙종은 1661년 음력 8월 15일에 태어났어
두 사람의 나이 차이는 9살이야
숙빈은 7세 때 무수리로 입궁했다는 설과 궁녀로 입궁했다는 설로 나뉘어져
무수리로 입궁했다는 설은 한국역대인물종합정보시스템에 나와
침방나인으로 입궁했다는 설은 고종의 후궁 삼축당 김씨와 광화당 이씨가 고종에게 직접 들은 이야기라고 <조선조 궁중풍속 연구>에 나와
침방나인 설을 뒷받침 할 수 이유는 영조가 연잉군 시절 숙빈과 나눈 일화가 있다고 해
연잉군: 어머니 어떤 옷을 만들기가 제일 힘듭니까?
숙빈: 세누비 옷이 가장 힘듭니다
이에 영조(=연잉군)는 평생 누비옷을 입지 않았다고 해
그런데 영조는 1694년에 태어났고, 고종은 1852년에 태어났어
158년이나 차이 나는데 대체 고종은 어디서 저런 말을 듣고 후궁들에게 알려줬을까?
고종은 아버지(흥선대원군)에게 들었겠지?
흥선대원군은 아버지(남연군)에게 들었겠지?
158년이라는 시간 동안 저 이야기가 그대로 보존 되었을까?
여러 의문이 있지만, 영조가 평생 출신 콤플렉스에 시달렸다고 하는 걸 보면 숙빈은 무수리 출신일 가능성에 무게를 둘 수 있어
일단 궁녀팀에서 침방은 지밀 다음으로 격이 높은 곳이야 궁녀들 중에서도 아무나 못 가는 곳이 지밀과 침방이야
영조가 서자라고 해도 평생 출신 콤플렉스를 겪기에는 “숙빈이 침방나인 출신이다”라는 이유가 잘 안 맞거든
왜냐하면 광해군의 생모 공빈 김씨가 궁녀 출신이야 광해군은 서자라서 설움을 겪었지만, 공빈의 출신이 미천해서 겪은 설움은 안 나와 있어
따라서 “숙빈은 무수리 출신이다”에 무게를 실어도 괜찮다고 봐
이제 숙빈이 숙종의 승은을 입은 시점부터 숙빈에게 있었던 일을 간략하게 나열할게
1693년 4월 26일, 최씨는 종4품 숙원으로 책봉 됐어
숙빈이 조선왕조실록에 처음 등장해
같은 해 10월 6일, 최씨는 왕자군(왕의 서자)을 낳아
하지만 첫 아들은 태어난 지 2달 만에 죽어
1694년 6월 2일, 최씨는 인현왕후 복위로 특별히 종2품 숙의가 돼
그리고 같은 해, 9월 20일에 왕자군을 낳는데 이 아들이 바로 영조야
1695년 6월 8일, 최씨는 종1품 귀인으로 승진 해
1698년, 최씨는 왕자군을 낳지만, 아들은 같은 해 요절해
1699년 10월 23일, 최씨는 숙빈이 됐어
이 때까지 숙빈은 언제 승진 했고, 언제 자식을 낳았는지 정도만 등장해
그러나 1701년 9월 23일, 숙종이 희빈 장씨의 오빠 장희재를 처형하라는 비망기를 내릴 때 숙빈이 등장해 이 때의 숙빈은 단순한 등장이 아니야
희빈 장씨가 취선당 서쪽에 몰래 신당을 설치하고 인현왕후를 저주했다는 사건이 밝혀졌어
당시 희빈은 세자(=경종)의 환후를 위해서 설치했다고 했어
하지만 숙빈이 평상시 인현왕후가 베푼 은혜 때문에 참고 또 참다가 숙종에게 몰래 알렸다고 해
이후 다들 알다시피 희빈 장씨는 자진하고, 그 일가는 풍비박산이 나
여기까지 보면 숙빈은 정치적으로 인현왕후와 관련된 사람이야
숙종이 숙빈의 말을 들어준 거 보면 숙종은 숙빈을 신뢰하고 있다는 뜻이야
그러나 희빈 장씨 사후 숙종실록에 나오는 숙빈의 이야기는 참 이상해
1711년 6월 22일
숙종: 옛날의 이현궁은 지금의 숙빈방이다 주위의 넓고 큼이 다른 궁에 비교할 바가 아니어서 연(가마)을 타고 지날 때마다 마음이 항상 남에게 괴로움을 끼쳐 거북했다 이제는 연잉군의 집으로 이미 정했으니 이 집에 숙빈이 연잉군 내외와 살아도 괜찮다
숙종이 한 말을 살펴볼게
“옛날의 이현궁은 지금의 숙빈방이다”라는 말은 일단
옛날의 이현궁은 지금 숙빈이 사는 곳이다 또는 옛날의 이현궁은 지금 숙빈의 사유지다
2가지로 나뉘어져
하지만
“연을 타고 지날 때마다 마음이 항상 남에게 괴로움을 끼쳐 거북했다”라는 말은 왜일까?
숙빈이 살고 있는 곳이라고 가정하면 숙종은 숙빈이 다른 집보다 넓고 좋은 집에 사는 게 거북하다는 뜻이야
반면 숙빈의 사유지라고 가정하면 숙종은 숙빈의 사유지가 너무 커서 불편하다는 뜻이야
근데 숙종은 후궁들이 궁에 살아도 궁 밖에 큰 집을 하사해주던 왕이야
그것도 신하들이 “전하, 후궁은 궁에 사는데 궁 밖에 집이 너무 화려합니다”라고 상소를 올릴 만큼 크고 좋은 집이야
그런데 왜 숙빈이 사는 집 보고 저런 말을 할까?
다음으로
“이제는 연잉군의 집으로 이미 정했으니 이 집에 숙빈이 연잉군 내외와 살아도 괜찮다”
숙종은 이현궁을 “항상 남에게 괴로움을 끼쳐 거북했다”라고 했어
그런데 이제 연잉군의 집으로 바뀌었으니 괜찮다?
그리고 숙빈이 연잉군 내외와 살아도 괜찮다?
여기서 짚고 넘어갈 점이 있어
후궁은 친자식이어도 왕의 허락 없이는 사가에서 자식과 함께 살 수 없어
후궁은 왕의 신하이고, 왕의 자식은 혈육이기 때문이지
다시 돌아가서 숙종이 한 말을 정리하자면 2가지로 나눌 수 있어
1. 이현궁은 현재 숙빈의 집이야 즉 숙빈은 희빈 장씨 사후, 어느 시점에서 출궁한 뒤 이현궁에서 살고 있어 그런데 숙종은 호화로운 숙빈의 집(=이현궁)이 마음에 안 들어 그래서 지나갈 때마다 불편했어 근데 그 집을 연잉군의 집으로 결정 하니까 괜찮아 그리고 숙빈은 연잉군 내외와 살아도 괜찮다는 뜻이야
2. 이현궁은 현재 숙빈의 사유지야 그런데 숙종은 호화로운 숙빈의 집(=이현궁)이 마음에 안들어 그래서 지나갈 때마다 불편했어 근데 그 집을 연잉군의 집으로 결정하니까 괜찮아 그리고 숙빈은 궁에서 살다가 어느 시점부터 몸이 안 좋아졌어 그러던 중, 마침 연잉군 집이 이현궁이니까 몸조리를 연잉군의 집에서 하면서, 그 집에서 살아도 괜찮다는 뜻이야
여기서 공통점이 있지
“숙종은 숙빈이 이현궁을 갖고 있는 게 마음에 안 든다”
그러나 숙종은 다른 후궁들에게 궁 밖에, 좋은 집을 하사하던 왕이야
1718년 3월 9일 숙빈이 세상을 떠나
숙빈은 정1품 후궁이니까 예조에서 법도에 맞춰서 장례 절차를 주관하고 숙종도 허락했어
그런데 숙빈의 장례와 관련해서 2가지 문제가 생겨
첫째, 1718년 4월 20일
숙빈의 장례를 담당하던 내관 장후재가 파직 돼
장후재가 파직된 이유는 숙종이 “숙빈의 장지를 명선공주와 명혜공주가 묻혀 있는 산으로 정해서 괘씸하다”라고 해서야
참 이상하지? 명선공주와 명혜공주는 숙종의 누이들인데 뭐가 문제라는 걸까?
숙종의 말은 이런 뜻이야
“명선공주와 명혜공주는 왕족이고 숙빈은 후궁이다 후궁이 어찌 왕족이 묻힌 산에 나란히 누울 수 있단 말인가?”
그래서 장후재를 파직 시키고 다른 사람을 충원하라고 한 거야
둘째, 1718년 5월 17일
숙종은 “연잉군은 상복을 벗을 때가 지났는데 아직도 상복을 입고 있다 연잉군은 이제 상복을 벗어라”라는 명을 내려
그러자 예조에서 “공적인 자리에서는 일상복을 입게 하고, 집에서는 (약식)상복을 입게 하자”라고 해
뭔가 좀 바뀐 거 같지 않아?
예조에서 “연잉군 상복 벗을 때가 됐는데 아직 안 벗는다”라고 하고
숙종이 “공식석상에서는 일상복 입고, 아닐 때는 상복 입어도 된다” 이게 아닐까?
반대로 희빈 장씨의 경우를 볼게
희빈 장씨는 죄를 지어 명에 따라 자진했지만 폐위되지 않았어
장례는 세자 내외에게 상주로서 참석하라고 명했어 또 상복은 3년이 되기 며칠 전에 벗으라고 했어 여기에는 인현왕후와 차별을 두기 위해서였어 왕비가 죽었을 때 상복을 입는 기간이 딱 3년이었거든
또 모든 장례절차는 궁에서 주관했고 무덤 역시 왕실 종친과 예조에서 했어
보통 후궁의 무덤은 친정이나 내관이 하거든
또 장례식은 왕과 왕비보다 딱 하루가 부족한 날로 치렀어
죄를 지어서 자진한 희빈의 장례는 거의 국장급이야
참고로 희빈 장씨는 인현왕후 복위 후, 후궁으로 강등된 게 아니야
원래 중전이 인현왕후니까 그 자리를 돌려준 거야
인현왕후 복위 후, 희빈의 신분은 중전보다는 낮고 세자보다는 높아
이렇게 보니 숙빈과 희빈의 사후 대우가 좀 다르지?
희빈 장씨 사후에도 숙빈이 숙종의 총애를 받았다면 숙빈의 장례에서 2가지 문제가 생길 이유가 없어 슬퍼해도 모자랄 시간인데 묘 자리가 어떻다느니, 상복이 어떻다느니 할 이유가 없어 오히려 죽은 사람을 위해 뭐라도 하나 더 해주고 싶지
숙빈은 역사적으로 승자가 맞아
하지만 생전에도 승자였냐고 하기에는 무리가 있다고 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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