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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조회 1928
이 글은 9년 전 (2016/6/01) 게시물이에요







나를 이루는 책들 | 인스티즈

"만일 내가 죽을 수만 있다면, 지금, 내가 가장 행복할 때, 당신이 날 죽게 해주겠어요? 당신이 날 죽일 필요도 없어요. 그저 '죽어라'. 하고 말만 하세요. 그러면 제가 죽을게요. 안 믿으시는군요. 그럼 한번 시험해 보세요. '죽어라.' 하고 말하세요. 그리고 제가 죽는 모습을 보시라니까요."

"죽어, 죽고 싶으면 죽으라니까!"

나는 그녀가 죽음의 경지에 이르는 것을 몇 번이고 지켜보았다. 그녀가 의미하는 죽음이 아니라 내 의미로의 죽음이다. 환한 태양 아래서, 그늘진 곳에서, 달빛을 받으며, 촛불을 켜놓고. 온 집 안이 텅 비고 우리를 친구 삼아주는 것은 오로지 태양밖에 없는 긴긴 오후마다. 우리는 태양도 차단해 버렸다.

*

눈물 한 방울. 나는 그 텅 비어 중오만 남은 광녀의 얼굴은 보지 않을 거다. 그녀가 안녕을 고하겠지. 그 소리를 들어야지. 그녀가 부르는 옛날 노래에서처럼 '아듀'라고 말하는 소리를 들어야지. 그들의 노래는 모두 아듀로 끝나더군. 만일 그녀가 이별을 고하며 울면, 내 품에 안아주어야지. 나의 광녀니까. 그녀는 미쳤지만 내 것이야, 내 것이야. 신들도, 악마들도, 운명도 다 관심 없다. 그녀가 웃건 울건 혹 두 가지를 다 하건, 그건 단지 나만을 위한 것이어야 해.

앙투아네타. 나도 부드러운 남자일 수 있어. 네 얼굴을 가려라. 내 품 안에서 네 몸을 숨겨라. 얼마나 부드러운지 너도 곧 알게 될 거야. 나의 광녀. 나의 미친 여자. 구름 낀 날이 너를 도와주겠지. 작열하는 태양은 없어

태양은 없어…… 태양은. 기후는 변해 버렸다.


*


…샌디가 나를 마지막으로 만나러 왔을 때 나는 이 빨간 드레스를 입고 있었다.

"나와 함께 갈래?"

그가 물었다.

"아니, 나는 갈 수 없어."

내가 대답했다.

"그럼 이게 이별이군."

"맞아 이별이야."

"그렇지만 너를 이렇게 두고 내가 어떻게 떠나지? 너는 불행하잖아."

광막한 사르가소 바다 / 진 리스

나를 이루는 책들 | 인스티즈


햇볕이 내리쬘수록 허리가 꼬부라들었다. 그러면서도 가지는 햇살을 향해 뻗어나갔다. 텔레비전에서 본 화상 환자가 연상되었다. 심한 화상을 입은 환자일수록 손을 뻗어 물을 달라고 애원했다. 누군가 물을 주면 환자는 죽었다. 꽃들은 죽기 위해 햇살을 받으려는 것 같았다. 꽃들은 물 대신 햇살로 목을 축였고, 그래서 오히려 타들어갔다. 


최선의 삶 / 임솔아

나를 이루는 책들 | 인스티즈

"그 여자, 울면서 맹세했어. 내가 자신을 버리기 전에는 결코 자신이 먼저 도망치지 않겠다고. 어떻게 그걸 증명하느냐. 담배 한 갑을 다 피우면서 그 담뱃불로 여기 오른손 손목에서 팔꿈치까지 빈자리가 거의 없게 지졌어. 그 여자가 했어. 왼손잡이여서 오른팔에 한 거지. 그때부터 그 여자를 재떨이라고 불렀어. 이틀 뒤 어머니가 돌아가셨다는 연락이 왔지."

*

"사실 난 재떨이하고 한 번도 제대로 못했다네. 그러니 애도 없었고, 재떨이는 한마디로 낙이 없었지. 새벽에 팔을 긋고 의식을 잃기 전에 그 여자를 깨웠지. 가라고 했지. 너는 이제 자유다. 나는 너를 버린다. 미안하다. 이젠 가라."

소뇌가 마비되는 듯 그의 혀는 어눌해졌고 말도 느려졌다.

"재떨이는 울면서 자긴 이제 자유니까 가고 말고는 자기 마음이라더군. 난 한 번으로는 마음이 놓이지 않아서 팔목을 네댓 번 그었어. 그뒤에 나는 도마가 됐지. 재떨이가 가면서 나를 그렇게 불렀어. 나는 재떨이, 당신은 도마. 돌아오지 않았어. 아직도."


해방 / 성석제

나를 이루는 책들 | 인스티즈

꽃이 핀 식물 같은 행복한 광경이 슬픔을 유발하는 건 너무도 기이한 일이었다. 그녀는 무언가를 갈구했지만 그것이 무엇인지 알지 못했다. 그 정체 모를 갈망 또한 기이했으며 지금 그녀가 느끼는 쓸쓸함은 남편을 잃고 난 뒤에 느꼈던 것보다 더 깊고 심각했다.

*

그녀는 털실을 감듯 수건을 양쪽 손목에 감았다. 기운이 없었지만 가능하다면 매트리스를 더럽히지 않고 싶었다. 침대에 누울 때가지는 수어건으로 피가 스며 나오지 않았다. 그다음엔 눈을 감았기 때문에 피가 스며 나오고 있는지 어떤지 알 수가 없었다. 어쨌거나 그건 중요하지 않았다. 아래층의 수선이 끝난 옷들과 아직 손대지 않은 옷들도 마찬가지였다. 주인들이 와서 찾아가겠지.

엘리너는 그를 생각했다. 작고 강하고 기이하면서도 너무도 분명하고 단순한 존재. 그는 그녀에게 자기 이름을 말해 준 적이 없었다. 그녀는 자신이 그를 사랑하고 있음을 깨달았다.


어쩌면 다음 생에 / 퍼트리샤 하이스미스

나를 이루는 책들 | 인스티즈


난 말이지, 정희야. 사랑한다는 말을 들으면 이상한 기분이 들어.


…나를 사랑한다는 그 어떤 남자의 말은, 자신을 사랑해달라는 말일 수도 있고, 나를 오해하고 있다는 말일 수도 있고, 내가 그를 위해 많은 걸 버려주길 바란다는 말일 수도 있지. 단순히 나를 소유하고 싶거나, 심지어 나를 자기 몸에 맞게 구부려서, 그 변형된 형태를 갖고 있다는 뜻일 수도 있고, 자신의 무서운 공허나 외로움을 틀어막아달라는 말일 수도 있어.


그러니까, 누군가 나를 사랑한다고 말할 때, 내가 처음 느끼는 감정은 공포야.

*

모르겠어, 이 모든 게 어떤 미친 짓이었는지. 무엇을 위해 나는 떠벌이고, 미소 짓고, 변명하고, 애원하고, 간절하고, 진지하고, 걷고, 뛰고, 인파를 헤치고, 먹고, 굶고, 목마르고, 계단을 오르고, 엘리베이터 단추를 누르고, 명함을 받고, 화장실에서 루주를 바르고, 눈을 맞추고, 미소 짓고, 고개를 끄덕이고, 결의에 차고, 기다리고, 메모를 남기고, 전화번호를 받아 적고, 사과하고, 감사하고, 수없이 네 이름을 말하고, 휴대폰 배터리를 바꿔 끼우고, 계단을 내려가고, 시계를 보고, 걷고, 간판을 읽고, 발뒤꿈치가 벗겨지고, 그리고

이 책을 펼치고 싶지 않아.

펼치는 순간 책장들이 부스러질 것 같아. 손가락에 엉기며 녹아버릴 것 같아. 촛농처럼 끓어오를 것 같아.

바람이 분다, 가라 / 한강




나를 이루는 책들 | 인스티즈



저쪽 심연 아래를 내려다보니 바다 한가운데 조그만 동력선 한 척이 떠 있었다. 그리고 거기 두 남자가 누워 애타게 사랑을 나누고 있었다. 그가 몸을 돌려 내 입술을 찾았다. 이어 주저하는 기색 없이 내 바지춤 속으로 손을 집어넣었다. 한때의 서늘한 바람이 불어가면서 배가 기우뚱 흔들렸다. 이어 두 사람은 하나의 맹렬한 불꽃으로 타오르기 시작했다. 그리고 동시에 숨죽여 사정했다. 순간 서로의 영혼이 파괴되는 소리를 들었다.


*


두려울 정도로 아름답고 공허했던 밤에 어쩌면 우리는 거대한 우주의 순수한 허리를 견디지 못했던 게 아니었을까. 그런데 그것이 정녕 사랑이었을까? 나는 그를 잊지 못하는 상태로 몇 년을 지냈으며 견디기 힘든 그리움에 사로잡히기도 했다. 하지만 집착하는 마음은 생기지 않았다. 그걸 원치 않는다는 걸 서로가 알고 있었다.


반달 / 윤대녕


나를 이루는 책들 | 인스티즈

방에 시체가 있다

내가 누군가를 죽였다

시체를 두고 나 여기 술 마시러 왔다

웃고 떠드는 사람들 알까 봐

우스워 우스워

요즈음 떠도는 농담이라며

지어낸 얘기 들려준다

이 자리 누구도 방 안에 시체를 두고

오진 않았나 보다

모두들 숨겨놓은 몸이 없는 사람들처럼 왁자하다

술집 어딘가 흰염소 눈알 같은

반질거리는 외눈박이 웅덩이가 열려 있다

내가 그 눈아 위에 의자를 올리고 앉아 있다

내가 정말 죽이긴 죽였나

꿈속처럼 방이 멀다

그 방엔 불에 타다만 사람의 심장을 쪼아대던

피 묻은 부리 하나

검은 웅덩이에 잠긴 발을

더러운 깃털로 닦을 때

그 사람의 두 다리는 이미 싸늘했지

나는 왜 방에다 불을 찌르고 소리소리 지르다

그 사람의 몸에 물을 끼얹었을까

하루 종일 문 앞을 떠나지 않는

주인 기다리는 강아지같은 빤히 열린 그 눈알

그것을 닫고 오기는 했나?

두렵다

그럼에도 지금 이 자리

웃고 떠드는 나를 견딜 수 없다

아무래도 불꽃 머리칼 다시 길러야겠다

아무래도 나는 나를 다시 죽이러 가야겠다

lady phantom / 김혜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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