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반에는 등을 쳤다고 하는데,등짝을 보자 이것을 맞은 사람이 얼마 안 되어 사망하는 경우가 많았다. 당연하게도 등의 경우에는 신체의 중요기관이 근처에 있는데다가 척추가 지나가니 매맞다가 죽거나 반신불수되기 딱 좋았다. 그래서 세종대왕 때 엉덩이를 치는 것으로 바꾸었다고 한다.
가상 매체에서야 맞는 가장 흔한 형벌이지만, 현실에서는 그 아픔이 어찌나 심했던지, 사람들이 버티지를 못하고 "사… 살려 으악!! 주…줍쇼 끄악!!"라면서 하나같이 GG를 쳤다고 전해진다. 그만큼 매가 심하게 아프고, 가장 낮은 60대만 맞아도 초죽음에 이르는 경우가 많으며 곤장 100대 수준까지 되면 인생퇴갤까지 이를 수 있는 정도였다. 따라서 사형같은 것을 집행하지 못할 때, 대신 합법적으로 사람을 저세상에 보내버릴 필요가 있을 경우 가장 빠르고 확실한 형벌로서 정치적으로도 많이 사용되었다. 고려 말엔 정몽주가 정도전 등 역성 혁명파를 숙청하기 위해, 유배된 정도전 등을 장형으로 죽이려 시도한 적이 있었다. 하지만 이방원(태종)의 정몽주 살해로 실패하고, 훗날 조선이 건국된 뒤 정도전이 똑같은 방법으로 정몽주 일파의 인물들을 죽여 보복하였다.
곤장을 맞던 중 현장에서 사망하는 경우는 대부분 쇼크사에 가깝고, 곤장을 맞은 후 옥이나 유배 중, 또는 집으로 돌아간 후 사망한 경우는 대부분 근육 파괴로 인한 급성 신부전으로 사망하는 경우가 많았다. 곤장을 맞아 광범위하게 근육세포가 파괴되면서 세포 내의 미오글로빈이 콩팥에 과다하게 축적되어 급성 신부전이 발생하는 것으로 오늘날에도 사고 등으로 무거운 물체에 깔린 사람의 주된 사망원인 중 하나다. 급성 신부전이 생기지 않았더라도 곤장을 맞은 후 터진 상처부위의 2차 감염으로 사망한 경우도 많았다. 곤장을 맞다가 괄약근에 힘이 풀려 대소변이 새어나와 상처로 들어가거나 하는 경우가 많았고, 그렇지 않더라도 페니실린과 같은 항생제가 개발되지 않은 전근대였기에 세균의 감염이 빠르게 이루어졌기 때문이다. 이렇게 죽었을 때 보통 '장독(杖毒)이 올라 죽었다'고 말했다. 민간에서는 장독을 치료할 요법으로 푸세식 변소에서 삭히고 삭힌 똥물을 생으로 먹인다고 한다. 독은 독으로 해소시켜야 한다나?
일부는 물곤장이라고 크고 단단한 참나무 곤장을 물에다가 조금 불린다음 죄수의 엉덩이 피부도 물을 흡수하도록 한 다음에 내리치는데 물에 불어서 약해진 살갓에 그런 몽둥이질까지 더해지면서 일부 심하면 뼈가 보일 정도가 되며 운좋게 살아남는다 해도 앉은뱅이가 되서 평생 일어설 수 없게 된다.
그리고 더 무서운 것은 이런식으로 볼기를 맞다가 고자가 되버리는 경우도 생긴다는것. 원인은 트라우마나 척추등의 신경 손상으로 추정된다. -태형은 이미 폐지 되었으니 실제 예를 분석할 수도 없고 그렇다고 실험체를 때려보며 실험을 해볼 수도 없는 노릇이니
이렇게 대미지가 어마어마했기 때문에 때리다가 몇 대 때렸는지 까먹어서 더 많이 때리는 불상사(…)가 생기지 않게 하기 위해서 여러 방법이 동원되었다. "한 대요!" "두 대요!" 외치면서 때리거나, 활줄에 산가지를 매달아 한 대 때릴 때마다 옆에서 하나씩 셈한다거나.[4]
그러다 보니 조선시대에 곤장을 대신 맞아주는 '매품팔이'라는 일을 하는 사람이 있기도 했다. 흥보가의 흥부 또한 먹고살 수가 없어서 이것으로 돈을 벌려고 했다가 이마저도 일감을 빼앗겨 실패하는 내용이 나올 정도로 널리 알려진 직업이다. 보통 높으신 분들이 곤장을 맞게 되면 품삯을 받아서 대신 매를 맞고, 그런만큼 번 돈으로 고기를 사먹으며 몸을 추스린 후 회복되면 다시 매를 맞는 걸 반복...
또한 조선시대에서 태형은 최대 120대까지 때리게 되는데 절대로 한꺼번에 다 때리는 게 아니라 한 번에 30대까지만 때리고 이틀 간격으로 나눠서 때린다. 왜냐하면 30대만 맞아도 죽어나가기 때문에...
야사에 따르면 이런 개인사업을 하면서 먹고사는 부부가 있었는데, 신나게 맞고 돈을 많이 번 어느 날 남편이 "오늘은 힘들어서(아파서) 그만 해야겠어"라고 하는 걸 아내가 "한번만 더 맞고 와요"라고 졸라댔다. 결국 남편은 관아로 가서 곤장을 한 번 더 맞다가 그대로 요단강 익스프레스를 타고 저세상으로 가버렸다고 하며, 그 후 아내는 마을에서 쫓겨나 유랑하다 굶어 죽었다고 전해진다.
장영실도 세종대왕이 탈 가마 제작을 감독했다가 그게 부서져서 책임을 지고 장형 80대에 처해진 후 파면되었다고 한다. 이후 장영실은 알 수 없는 인생의 뒤안길로…대왕 세종에서 장영실이 장형 100대를 맞는 장면이 나온다.
가상 매체에서야 맞는 가장 흔한 형벌이지만, 현실에서는 그 아픔이 어찌나 심했던지, 사람들이 버티지를 못하고 "사… 살려 으악!! 주…줍쇼 끄악!!"라면서 하나같이 GG를 쳤다고 전해진다. 그만큼 매가 심하게 아프고, 가장 낮은 60대만 맞아도 초죽음에 이르는 경우가 많으며 곤장 100대 수준까지 되면 인생퇴갤까지 이를 수 있는 정도였다. 따라서 사형같은 것을 집행하지 못할 때, 대신 합법적으로 사람을 저세상에 보내버릴 필요가 있을 경우 가장 빠르고 확실한 형벌로서 정치적으로도 많이 사용되었다. 고려 말엔 정몽주가 정도전 등 역성 혁명파를 숙청하기 위해, 유배된 정도전 등을 장형으로 죽이려 시도한 적이 있었다. 하지만 이방원(태종)의 정몽주 살해로 실패하고, 훗날 조선이 건국된 뒤 정도전이 똑같은 방법으로 정몽주 일파의 인물들을 죽여 보복하였다.
곤장을 맞던 중 현장에서 사망하는 경우는 대부분 쇼크사에 가깝고, 곤장을 맞은 후 옥이나 유배 중, 또는 집으로 돌아간 후 사망한 경우는 대부분 근육 파괴로 인한 급성 신부전으로 사망하는 경우가 많았다. 곤장을 맞아 광범위하게 근육세포가 파괴되면서 세포 내의 미오글로빈이 콩팥에 과다하게 축적되어 급성 신부전이 발생하는 것으로 오늘날에도 사고 등으로 무거운 물체에 깔린 사람의 주된 사망원인 중 하나다. 급성 신부전이 생기지 않았더라도 곤장을 맞은 후 터진 상처부위의 2차 감염으로 사망한 경우도 많았다. 곤장을 맞다가 괄약근에 힘이 풀려 대소변이 새어나와 상처로 들어가거나 하는 경우가 많았고, 그렇지 않더라도 페니실린과 같은 항생제가 개발되지 않은 전근대였기에 세균의 감염이 빠르게 이루어졌기 때문이다. 이렇게 죽었을 때 보통 '장독(杖毒)이 올라 죽었다'고 말했다. 민간에서는 장독을 치료할 요법으로 푸세식 변소에서 삭히고 삭힌 똥물을 생으로 먹인다고 한다. 독은 독으로 해소시켜야 한다나?
일부는 물곤장이라고 크고 단단한 참나무 곤장을 물에다가 조금 불린다음 죄수의 엉덩이 피부도 물을 흡수하도록 한 다음에 내리치는데 물에 불어서 약해진 살갓에 그런 몽둥이질까지 더해지면서 일부 심하면 뼈가 보일 정도가 되며 운좋게 살아남는다 해도 앉은뱅이가 되서 평생 일어설 수 없게 된다.
그리고 더 무서운 것은 이런식으로 볼기를 맞다가 고자가 되버리는 경우도 생긴다는것. 원인은 트라우마나 척추등의 신경 손상으로 추정된다. -태형은 이미 폐지 되었으니 실제 예를 분석할 수도 없고 그렇다고 실험체를 때려보며 실험을 해볼 수도 없는 노릇이니
이렇게 대미지가 어마어마했기 때문에 때리다가 몇 대 때렸는지 까먹어서 더 많이 때리는 불상사(…)가 생기지 않게 하기 위해서 여러 방법이 동원되었다. "한 대요!" "두 대요!" 외치면서 때리거나, 활줄에 산가지를 매달아 한 대 때릴 때마다 옆에서 하나씩 셈한다거나.[4]
그러다 보니 조선시대에 곤장을 대신 맞아주는 '매품팔이'라는 일을 하는 사람이 있기도 했다. 흥보가의 흥부 또한 먹고살 수가 없어서 이것으로 돈을 벌려고 했다가 이마저도 일감을 빼앗겨 실패하는 내용이 나올 정도로 널리 알려진 직업이다. 보통 높으신 분들이 곤장을 맞게 되면 품삯을 받아서 대신 매를 맞고, 그런만큼 번 돈으로 고기를 사먹으며 몸을 추스린 후 회복되면 다시 매를 맞는 걸 반복...
또한 조선시대에서 태형은 최대 120대까지 때리게 되는데 절대로 한꺼번에 다 때리는 게 아니라 한 번에 30대까지만 때리고 이틀 간격으로 나눠서 때린다. 왜냐하면 30대만 맞아도 죽어나가기 때문에...
야사에 따르면 이런 개인사업을 하면서 먹고사는 부부가 있었는데, 신나게 맞고 돈을 많이 번 어느 날 남편이 "오늘은 힘들어서(아파서) 그만 해야겠어"라고 하는 걸 아내가 "한번만 더 맞고 와요"라고 졸라댔다. 결국 남편은 관아로 가서 곤장을 한 번 더 맞다가 그대로 요단강 익스프레스를 타고 저세상으로 가버렸다고 하며, 그 후 아내는 마을에서 쫓겨나 유랑하다 굶어 죽었다고 전해진다.
장영실도 세종대왕이 탈 가마 제작을 감독했다가 그게 부서져서 책임을 지고 장형 80대에 처해진 후 파면되었다고 한다. 이후 장영실은 알 수 없는 인생의 뒤안길로…대왕 세종에서 장영실이 장형 100대를 맞는 장면이 나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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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혜윤 오늘자 살목지 무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