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호승, 어떤 사랑
내가 너를 사랑했을 때, 너는 이미 숨져있었고
네가 나를 사랑했을 때, 나는 이미 숨져있었다
너의 일생이 단 한 번 푸른 하늘을 바라보는 일이라면
나는 언제나 네 푸른 목숨의 하늘이 되고 싶었고
너의 삶이 촛불이라면
나는 너의 붉은 초가 되고 싶었다
너와 나의 짧은 사랑, 짧은 노래 사이로
마침내, 죽음이 삶의 모습으로 죽을 때
나는 이미 너의 죽음이 되어 있었고
너는 이미 나의 죽음이 되어있었다
이정하, 밤새 내린 비
간 밤에 비가 내렸나 봅니다
내 온몸이 폭삭 젖은 걸 보니
그대여, 멀리서 으르렁 대는 구름이 되지 말고
가까이서 나를 적시는
비가 되십시오
김종해, 그대 앞에 봄이 있다
우리 살아가는 일 속에
파도치는 날 바람부는 날이
어디 한 두번이랴
그런 날은 조용히 닻을 내리고
오늘 일을 잠시라도
낮은곳에 묻어 두어야 한다
우리 사랑하는 일 또한 그 같아서
높은 파도를 타지 않고
낮게 낮게 밀물져야 한다.
사랑하는 이여
상처받지 않는 사랑이 어디있으랴
추운 겨울 다 지내고
꽃 필 차례가 바로 그대 앞에 있다
이생진, 널 만나고부터
어두운 길을 등불 없이도 갈 것 같다
걸어서도 바다를 건널 것 같다
날개 없이도 하늘을 날 것 같다
널 만나고부터는
가지고 싶던 것 다 가진 것 같다
이정하, 장작
사랑했으므로
내 모든것이 재만 남았더라도
사랑하지 않아
나무토막 그대로 있는 것 보다는 낫느니